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의 <팡세 Pensees>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일 것이다. 많은 경우 위의 문장은 인간을 '이성(理性)을 가진 약한 존재'로 표현할 때 이 문장을 인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파스칼이 <팡세>를 통해 목적했던 바는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간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팡세>를 통해 파스칼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인간의 본성(本性) : 본능(本能)과 이성(理性)

 

 파스칼은 본능과 이성이 인간의 두 본성이며, 이는 자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연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 또는 사유(思惟)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의 사유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사유와는 조금 다르다.

 

 216-(344) 본능과 이성, 두 본성의 표시. (p115)

 

 162-(94)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연이다. omne animal. 인간이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없애지 못하는 자연적인 것도 없다. (p93) <팡세> 中 

 

데카르트 비판 : 사유의 한계

 

 232-(365) 사유(思惟).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사유는 그 본성으로는 경탄할 만하고 비길 데가 없다. 그것이 멸시받을 만하다면 무엇인가 야릇한 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유는 그보다 더 가소로운 것이 없을 만큼 결함을 가지고 있다. 본성으로서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결함으로서는 얼마나 저속한가! (p119) <팡세> 中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철학의 제일원리'로서 명제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 사유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인식된다. 반면, 파스칼에 있어 사유는 인간이 가진 한계에 불과할 뿐이며, 파스칼의 사유 끝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p18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p185)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中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p137) <팡세> 中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비판 : 회의(懷疑)주의 비판

 

 이와 동시에, 파스칼은 몽테뉴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역시 비판한다. 회의주의를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은 자연에 의해 견제되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사물의 본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246-(434)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회의할 것인가. 깨어 있는지, 꼬집히는지, 불태워지는지도 회의할 것인가. 회의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수 없다. 실로 완벽한 회의론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이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그렇게까지 극단을 달리지 못하게 견제한다.(p126) <팡세> 中 

 

 파스칼의 몽테뉴 비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습관'에 대한 관점이다.  몽테뉴는 기존의 습관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파스칼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 속에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습관이 가지는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이성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일이라고 믿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얼마나 이치에 벗어나는 일인가!(p128)... 습관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맹렬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을 발견할 것이다.(p129) <수상록 Les Essais> 中

 

 241-(93) 사라질지도 모를 이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 그러나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왜 본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가. 나는 이 본성도, 마치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 같이, 단지 제1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몹시 두렵다.(p123) <팡세> 中


  245-(97)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偶然)이 그것을 좌우한다. 습관이 석공, 군인, 기와장이를 만든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덕을 사랑하고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이 마음을 정하게 할 것이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른다. 습관의 힘이 이다지도 큰 것이어서 자연이 단순히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든 신분을 만들었다... 습관이 자연을 속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은 종종 습관을 이기기도 하며, 좋고 나쁜 모든 습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의 본능 속에 머물게 한다.(p132) <팡세> 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생각(또는 사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갈대와 같지만, 동시에 생각할 수 있기에,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의 길이다.

 

 217-(348)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p115) <팡세> 中

 

 391-(347) H.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즐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p213) <팡세>

 

 중용(中庸) 그리고 신앙(信仰)


 인간이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힘쓴다고 했을 때, '올바르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중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중용(moderation)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위치는 '한 점'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이 안에서 두 본성인 본능과 이성이 결합될 수 있다. 파스칼에게 이 점은 바로 기독교(基督敎) 신앙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58-(381)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림을 너무 멀리서 또는 너무 가까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p51) <팡세> 中

 

 289-(378)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한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 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데 있다.(p153) <팡세> 中

 

 462-(862)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여러 진리들을 포용한다. 웃을 때, 울 때 등등. Responde. Ne respondeas.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이 결합한 데 있다.(p241) <팡세> 中

 

 409-(433) 인간의 모든 본성을 이해한 다음, 한 종교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위대와 비속을 알고 또 이것들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그 어떤 종교가 이것을 알았는가.(p222) <팡세> 中

 

 <팡세>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절대 진리임을 끌어내고 있다. 큰 줄기만 요약하면, 뛰어난 수학자인 파스칼의 '신 존재 증명'이 <팡세>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읽기에 불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인들이 신(神)과 이성(理性)을 어떻게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이 <팡세>를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몽테뉴 사망한 해인 1592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는 것이 그냥 생각나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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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21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기분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2018-04-21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8-04-21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글을 읽으면서 신. 인간. 존재. 사유. 습관. 본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바가바드 기타 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이끄신다.‘
참 신기하죠? 강철 쇠사슬도 아니고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 이라니..

겨울호랑이 2018-04-21 22:29   좋아요 1 | URL
쉽게 끊어지는 명주실로 이어진 관계라면 조심스럽고 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곧 끊어지겠군요. 끊임없는 성찰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말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8-04-22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2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근간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큰 줄기가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주의자 파스칼이 ‘회의주의‘를 비판한 건 그런 연장선이라고 봐야할 거 같아요.
사실 ‘이성‘의 본질적 특징도 ‘믿음‘이잖아요^^;

겨울호랑이 2018-04-22 12:35   좋아요 1 | URL
그렇겠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해봤네요. 그런 면에서도 과학과 신학은 함께 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AgalmA님 덕분에 더 많이 배워갑니다. ^^:)

AgalmA 2018-04-22 12: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게 기본규칙이잖습니까^^; 주류과학이 되어서 뻗댈 때가 있지만 이건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입장을 취하는 인간이 문제인 걸 테고요ㅎ;;

겨울호랑이 2018-04-22 12:40   좋아요 1 | URL
또한, 정치에서 ‘프레임‘으로 규정되는 것들과 과학에서 ‘패러다임‘으로 규정되는 것 모두가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인간 또는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oren 2018-04-29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와 파스칼을 두고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주 재치있는 말을 남겼더군요.

˝몽테뉴는 인간의 슬픈 존재 조건을 흥미, 유머, 관용을 가지고 살폈고, 재치는 번뜩이지만 유머는 없는 파스칼은 전율과 절망 속에서 인생을 쳐다보았다. 그리하여 계시 종교의 품안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런 절망에서 가까스로 구제되었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대작을 쓰기 위해 준비한 노트가 <파스칼>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니체가 파스칼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결코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님의 페이퍼 덕분에 니체의『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파스칼‘과 ‘데카르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됩니다.^^

* * *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며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나는 혼자다. 아,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숲과 원시림이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쫓기 위해 그들을 인간 영혼의 역사 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백 명의 몰이꾼들과 예민하게 훈련된 사냥개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다 : 바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 중에서 몰이꾼과 사냥개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철저하게 쓰디쓰게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사냥터에 학자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큰 사냥‘이, 그러나 큰 위험도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 ㅡ 그런 다음에는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ㅡ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이러한 봉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봉사하는 자를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ㅡ 그러한 사람의 출현은 분명 너무 드물며, 그러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호기심은 이제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남는다. ㅡ 용서를 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보답을 하늘에서와 이미 지상에서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5절

* * *

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 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연약하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양심에 요구되는 이러한 신앙에는 잔인성과 종교적인 페니키아주의가 깃들여 있다 : 이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문 용어 체계에 무감각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형식의 역설이 고대의 취미에서는 전율할 정도로 최상의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형식처럼 전도된 상태에서의 그와 같은 대담성, 그만큼 무서운 것, 문제시되는 것, 의혹이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는 고대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ㅡ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 그 고상하지만 경솔한 관용에 대해 로마적인 산앙의 ‘카톨릭주의‘에 복수를 한 것은 동방이며, 깊이 있는 동방이고, 동방의 노예였다 :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은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즉 신앙의 진지함에 대한 반쯤은 금욕적이고 반쯤은 냉소적인 무관심이었다. ‘계몽주의‘는 반란을 일으킨다 : 즉 노예는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에서조차 단지 포학한 것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는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심층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러울 때까지 병이 들 정도로 사랑을 한다. ㅡ 감추어진 그의 많은 고통은 고통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고상한 취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고통에 대한 회의, 근본적으로는 단지 귀족 계급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최후의 거대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 * *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해 종교란 정상적인 인간이 만든 산물이며, 인간이 더욱 종교적일수록, 무한한 운명을 확신할수록, 더욱 더 진실해진다.······ 인간은 선할 때, 미덕이 영원한 질서와 조응되기를 바란다. 사심 없는 태도로 사물을 관조할 때, 인간은 죽음이 불쾌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가장 잘 보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내 귀와 습관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문장 옆에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이라는 내 최초의 분노를 적어넣었다. ㅡ 마지막 분노에 이르러 나는 거꾸로 뒤집힌 진리를 담은 이 문장이 심지어는 좋아지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에게 대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정중하고 훌륭한 일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8절

* * *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도대체 현대 철학 전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데카르트 이래 ㅡ 사실은 그의 선례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에 대한 반항에서 ㅡ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ㅡ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든, 반(反)그리스도교적이다 :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ㅡ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간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ㅡ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은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ㅡ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54절

* * *

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

그리하여 교회의 가치평가를 위해 마침내 ‘탈세속화‘, ‘탈관능화‘와 ‘보다 높은 인간‘이 하나의 감정으로 융합하게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신 같은, 비웃는 듯하고 무관심한 눈으로 유럽 그리스도교의 기이하게 고통스럽고 조야하기도 하며 또한 섬세하기도 한 희극을 조망할 수 있다면, 끝없이 놀라워하며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결국 인간에게서 하나의 숭고한 기형아를 만들려는 의지가 18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해왔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누군가가 정반대의 욕구, 즉 더 이상 에피쿠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해머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인(예를 들어 파스칼)이 그런 것처럼 이렇게 거의 자의적으로 인간을 퇴화시키고 위축하게 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고 한다면, 그는 여기에서 분노와 동정, 놀라움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오, 그대 바보들이여, 그대 오만하고 불쌍한 바보들이여, 그대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손에 맞는 작업이었던가! 그대들은 그대들에게서 무엇을 끄집어 냈던가!˝ ㅡ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이었다.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고귀하지도 준엄하지도 않다. 숭고한 자기 극복으로 천태만상의 실패와 몰락의 중요한 법칙을 지배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강하지도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위계 질서와 위계의 간극을 보기에는 인간에게 충분한 품위가 없다 : ㅡ그러한 인간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왔다. 즉 마침내 왜소해지고 거의 어처구니없는 종족, 무리 동물, 선량하고 병들고 평범한 존재가 육성될 때까지 말이다. 오늘날의 유럽인들이 그들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62절


겨울호랑이 2018-04-30 07:45   좋아요 0 | URL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종교와 관련한 위의 내용이 있었군요!^^:) oren님 덕분에 유명하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와 연결하여 읽으면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와 ‘노예-주인‘의 내용이 파스칼과 연결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oren님 항상 좋은 내용과 과제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