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의 <팡세 Pensees>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일 것이다. 많은 경우 위의 문장은 인간을 '이성(理性)을 가진 약한 존재'로 표현할 때 이 문장을 인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파스칼이 <팡세>를 통해 목적했던 바는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간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팡세>를 통해 파스칼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인간의 본성(本性) : 본능(本能)과 이성(理性)
파스칼은 본능과 이성이 인간의 두 본성이며, 이는 자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연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 또는 사유(思惟)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의 사유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사유와는 조금 다르다.
216-(344) 본능과 이성, 두 본성의 표시. (p115)
162-(94)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연이다. omne animal. 인간이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없애지 못하는 자연적인 것도 없다. (p93) <팡세> 中
데카르트 비판 : 사유의 한계
232-(365) 사유(思惟).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사유는 그 본성으로는 경탄할 만하고 비길 데가 없다. 그것이 멸시받을 만하다면 무엇인가 야릇한 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유는 그보다 더 가소로운 것이 없을 만큼 결함을 가지고 있다. 본성으로서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결함으로서는 얼마나 저속한가! (p119) <팡세> 中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철학의 제일원리'로서 명제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 사유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인식된다. 반면, 파스칼에 있어 사유는 인간이 가진 한계에 불과할 뿐이며, 파스칼의 사유 끝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p18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p185)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中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p137) <팡세> 中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비판 : 회의(懷疑)주의 비판
이와 동시에, 파스칼은 몽테뉴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역시 비판한다. 회의주의를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은 자연에 의해 견제되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사물의 본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246-(434)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회의할 것인가. 깨어 있는지, 꼬집히는지, 불태워지는지도 회의할 것인가. 회의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수 없다. 실로 완벽한 회의론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이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그렇게까지 극단을 달리지 못하게 견제한다.(p126) <팡세> 中
파스칼의 몽테뉴 비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습관'에 대한 관점이다. 몽테뉴는 기존의 습관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파스칼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 속에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습관이 가지는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이성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일이라고 믿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얼마나 이치에 벗어나는 일인가!(p128)... 습관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맹렬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을 발견할 것이다.(p129) <수상록 Les Essais> 中
241-(93) 사라질지도 모를 이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 그러나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왜 본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가. 나는 이 본성도, 마치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 같이, 단지 제1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몹시 두렵다.(p123) <팡세> 中
245-(97)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偶然)이 그것을 좌우한다. 습관이 석공, 군인, 기와장이를 만든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덕을 사랑하고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이 마음을 정하게 할 것이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른다. 습관의 힘이 이다지도 큰 것이어서 자연이 단순히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든 신분을 만들었다... 습관이 자연을 속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은 종종 습관을 이기기도 하며, 좋고 나쁜 모든 습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의 본능 속에 머물게 한다.(p132) <팡세> 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생각(또는 사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갈대와 같지만, 동시에 생각할 수 있기에,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의 길이다.
217-(348)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p115) <팡세> 中
391-(347) H.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즐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p213) <팡세> 中
중용(中庸) 그리고 신앙(信仰)
인간이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힘쓴다고 했을 때, '올바르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중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중용(moderation)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위치는 '한 점'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이 안에서 두 본성인 본능과 이성이 결합될 수 있다. 파스칼에게 이 점은 바로 기독교(基督敎) 신앙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58-(381)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림을 너무 멀리서 또는 너무 가까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p51) <팡세> 中
289-(378)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한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 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데 있다.(p153) <팡세> 中
462-(862)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여러 진리들을 포용한다. 웃을 때, 울 때 등등. Responde. Ne respondeas.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이 결합한 데 있다.(p241) <팡세> 中
409-(433) 인간의 모든 본성을 이해한 다음, 한 종교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위대와 비속을 알고 또 이것들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그 어떤 종교가 이것을 알았는가.(p222) <팡세> 中
<팡세>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절대 진리임을 끌어내고 있다. 큰 줄기만 요약하면, 뛰어난 수학자인 파스칼의 '신 존재 증명'이 <팡세>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읽기에 불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인들이 신(神)과 이성(理性)을 어떻게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이 <팡세>를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몽테뉴 사망한 해인 1592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는 것이 그냥 생각나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