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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카
크세노폰 지음, 최자영 옮김 / 아카넷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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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회상
크세노폰 지음, 김주일 옮김 / 아카넷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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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론.향연
크세노폰 지음, 오유석 옮김 / 부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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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의 교육- 개정판
크세노폰 지음, 이동수 옮김, 정기문 감수 / 한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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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회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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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여기곤 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고발장의 취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첫째, 나라에서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그와는 다른 새로운 신적 존재들을 들여옴으로써 둘째,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1권 제1장, p14


  <소크라테스의 변론 Apologia Sokratous>이 소크라테스(Scrates, BCE 470~399)이 자신에 대한 변론이라면, 크세노폰 (Xenophon, BCE 428~354?)의 <소크라테스 회상록 Apomnemoneumata>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제자의 변론이라 하겠다. 크세노폰은 신들에 대한 불경(不敬)과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고발장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로 반증한다. 평소 신들에 대한 공경에 대한 본인의 말과 평소 자신에게 엄격한 소크라테스의 생활태도로 볼 때 고발장의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17) 신들을 공경하되 자기 능력 이하로 해서는 안 되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신들을 공경하지 않음이 확실하니까. 능력껏 신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신들이 가장 큰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자신하고 기대해도 좋네. 가장 큰 복을 줄 수 있는 분들 말고 다른 데서 더 큰복을 기대하는 것도, 그분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더 큰 복을 기대하는 것도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니까. 또한 신들에게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들을 기쁘게 해드리겠는가?"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4권 제3장, p218 


 (1)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말에 설득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또한 놀랍다. 앞서 말한 것에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우선 성욕과 식욕에 관한 한 가장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다음 그는 추위와 더위와 온갖 노고를 가장 잘 참고 견뎠다. 그 밖에도 그는 절제가 몸에 배어 아주 조금만 가지고서도 아주 쉽게 만족했다. (2) 그런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불경한 자나 범법자나 욕심쟁이나 호색가나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겠는가?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1권 제2장, p21


 <소크라테스 회상록>은 철학자이자 역사가, 군인이었던 크세노폰의 강직함과 간결함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여러 면에서 또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Platon, BCE 427~348)의 대화편들과 비교하게 된다. 플라톤의 작품들이 주제를 향해 치밀하게 계획된 구조로 짜여져 있다면, 크세노폰의 작품은 다소 느슨한 구조로 (플라톤에 비해)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살핀다. 만약, 스승 공자(孔子, BCE 551~479)의 제자 중 말 잘하는 자공(子貢, BCE 520~456?)이 플라톤이라면, 강직한 자로(子路, BCE 542~480)에 크세노폰을 비할 수 있을까.


 (1) 나는 앞서 소크라테스가 솔선수범하고 대화를 나눔으러써 실제로 제자들을 이롭게 했다고 말했는데, 나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억나는 대로 그런 일을 기록하려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 제물을 바치거나 조사의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일과 관련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델포이의 퓌티아가 주는 조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1권 제3장, p41


 그렇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자로'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 플라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기, 절제, 정의, 국가 등 주로 형이상학적 논의를 펼치며, 불멸의 영혼과 이데아에 대해 말한다. 독자들이 대화의 주요 내용에 담긴 플라톤의 목소리에 주목하면서, 소크라테스는 구석으로 밀려난 것이 플라톤 대화편에서의 소크라테스 위상이라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중심에 세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관념과 추상에 대한 논의 대신 일상 생활에서의 도덕에 대해 말하면서 세계 4대 성인(聖人)의 모습을 보여준다.


 (10)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래서 네 어머니가 네게 호의를 베풀고, 네가 몸이 아프면 정성껏 돌보고, 네게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보살필뿐더러,  너에게 복을 많이 내려달라고 늘 신들에게 기도하고, 너를 위해 서약한 것을 이행해도 너는 어머니가 드세다고 말하는 게냐? 내 생각에, 그런 어머니를 참고 견딜 수 없다면 너는 네게 좋은 것들을 참고 견딜 수 없을 것 같구나(p82).... (14) 그러니 아들아, 네가 분별력이 있다면 어머니를 홀대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신들에게 기도할 것이다. 신들이 너를 배은망덕한 자로 여기고 네게 잘해주기를 거절하지 않도록 말이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2권 제2장, p83


 (4) 하지만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함께 자란 이들은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되네. 야수도 함께 자란 경우 서로에게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니 말일세.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형제가 없는 사람보다는 형제가 있는 사람을 더 존중하고 덜 공격한다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2권 제3장, p86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지는 인간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플라톤의 작품에서의 주제와는 조금 다르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 그는 수학 대신 도덕철학을 말한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기하학 증명을 통해 상기설을 주장하며, 탁월함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다면, <소크라테스 회상록>에서는 육체의 단련과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주제 뿐 아니라 내용까지 충돌하는 면이 한 인물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를 소크라테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39) 크리토불로스, 자네가 어떤 일에 훌륭해 보이기를 원한다면 실제로 유능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네. 그게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훌륭한 길일세.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들 사이에서 미덕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학습과 연습으로 증대됨을 알게 될 걸세. 크리토불로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자네에게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말해주게.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2권 제6장, p107


 (4) 하지만 체력단련을 한 결과와 하지 않은 결과는 정반대일세. 체력단련을 한 사람은 건강하고 강하기 때문일세. 그리하여 그들 중 대다수가 싸움터에서 무사히 귀환하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네. 또한 대다수가 친구들을 도와주고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명성을 크게 드날리고 명예가 크게 드높아지며, 그래서 여생을 더 즐겁고 더 훌륭하게 살고 자식들에게는 더 훌륭한 살림 밑천을 남겨놓는다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3권 제12장, p180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드러난 인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에게 플라톤의 작품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그가 고발당한 이유를 알게 된다. 산파술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논박과 결과적으로 상대가 느낀 모멸감. 우리는 이러한 감정이 쌓여서 결국 인간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갔음을 추측할 수 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은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나오는 플라톤의 주장 대신 인간 소크라테스를 중심에 놓으면서 그의 삶에 대해 함께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40)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에우튀데모스는 소크라테스와 함께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자기가 이렇다 할 인물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 뒤로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우 말고는 소크라테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소크라테스의 습관 가운데 일부를 모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에우튀데모스의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는 더는 그를 놀리지 않았고, 그가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지식이나 지키는 것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_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4권 제2장, p211


 천병희의 <소크라테스 회상록>에는 그외에도 <향연 Symposion>과 <소크라테스의 변론  Apologia Sokratous>도 함께 실려있다. 뒤의 두 작품은 플라톤의 대화편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실려있는데, 이들 작품에도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의 자공과 자로를 서로 비교해 읽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7)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들이 자유민이고 자네 친척이기 때문에 먹고 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겐가? 자네는 다른 자유민 가운데 그런 식으로 사는 자들이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할 줄 아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살고 더 행복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자네는 게으름과 무관심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며 신체를 건강하고 강하게 하고 살아가는 데 유용한 것을 획득하고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근면과 세심함은 아무 쓸모없다고 느끼는가? - P111

(1) 한번은 용기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타고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떤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몸보다 노동에 선천적으로 더 강하듯이, 어떤 사람의 혼은 다른 사람의 혼보다 위험에 선천적으로 더 용감하다고 생각하네. 같은 법률과 관습 민테서 자란 사람들도 용기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보기 때문일세. (2)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의 본성은 학습과 훈련에 따라 더 용감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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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13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스승을 두고도 제자들이 이렇게나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워요^^

겨울호랑이 2023-09-13 15:49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기에 조금씩 다른 형태와 색깔로 남은 것 같아요. 말씀처럼 재밌는 지점입니다 ^^:)
 

이러한 상황을 도입하기 위해 시인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아울러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 관한 담론을 ‘가능한 세계’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시가 역사 서술보다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했다.

연민은 불행에 빠진 주인공을 향한 연민이며 공포는 재난의 잔인함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감정에 참여하면서 관객 혹은 독자는 카타르시스 혹은 정화를 경험한다. 즉 주인공의 고통에 참여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그가 메타포에 ‘인식의 기능’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포를 이해하는 것이 "유사한 개념" 혹은 "비슷한 것들을 포착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방 이론에만 집착한다면, 예를 들어 새들이 화가 제우시스Zeusis가 그린 포도 알들을 쪼아 먹으러 모여 들었다는 전설만 중요시한다면(이것이 바로 예술을 모방의 모방으로 보고 비판하던 플라톤이 예술을 이해하던 방식이다) 『시학』의 핵심적인 내용, 즉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방과 관련된 부분은 놓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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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3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42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진인혜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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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법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고, 시민법은 소유권을 가져다주었다. 소유권에 관한 법으로만 결정해야 할 것을 자유의 법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자유의 법은, 우리가 말했듯이, 단지 국가의 지배권에 불과하다. 개인의 이익은 공익에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91


 앞서 논의에 이어서 샤를 드 몽테스키외 (Montesquieu Charles Louis de Secondat, 1689~1755)는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3-3>에서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규제하는 만민법,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를 확립하는 정치법, 시민들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시민법이 서로 충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정치법의 규칙으로 결정해야 할 때, 시민법의 규칙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국가의 소유권에서 유래하는 규칙과 국가의 자유에서 비롯되는 규칙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의 핵심이 보일 것이다(p93)... 계승 순서를 확정하는 것은 지배 왕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배왕가가 있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속을 규정하는 법은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시민법이다. 왕위계승을 규정하는 법은 국가의 이익과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법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93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사안에 따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국제법, 헌법, 민법의 적용 부문이 서로 다르며 이들은 서로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법의 규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을 때 법은 지나친 자유와 목적에 맞지 않게 되는 두 극단을 오가게 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중용'의 정신이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용(中庸)의 정신이 입법자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선(善)은 도덕적 선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 있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229


 몽테스키외의 정체는 플라톤(Platon, BCE 427~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와 달리 확정적이지 않다. 풍토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宗敎)와 정체(政體)가 자리하기에 여기에 부합하는 최선의 정체는 저마다 다르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풍토에 따라 자리할 수 있는 종교가 결정되고, 종교의 성격에 따라 더 적합한 정체가 결정된다. 전제정체는 이슬람교에 더 적합하고, 제한된 정체는 기독교에 더 적합하지만 보다 독립적인 개신교에는 공화정체가, 가톨릭은 군주정체가 더 어울린다.


 풍토에 토대를 둔 종교가 다른 나라의 풍토와 몹시 충돌할 때, 그 종교는 그 나라에 수립될 수 없었다. 그곳에 도입되어도 곧 사라졌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경계를 정해준 것은 바로 풍토인 듯하다. 그러므로 종교는 특수한 교리와 일반적인 종교의식을 갖는 것이 거의 언제나 적당하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45


 기독교가 2세기 전에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는 불행한 분열을 겪었을 때, 북쪽의 민족은 개신교를 선택하고, 남쪽의 민족은 가톨릭을 유지했다. 북쪽 민족은 남쪽 민족이 갖지 않은 독립정신과 자유정신을 갖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텐데,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는 종교는 그런 지도자가 있는 종교보다 독립적 풍토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25


 법에 의한 통치(法治)가 이루어지지 않는 전제정을 제외한 군주정체와 공화정체는 법을 필요로 하는데 법의 지향은 바로 훌륭한 자질을 보존하고 계승시켜 국가의 힘을 보다 강대하게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적절한 법의 규칙 적용이며, 입법의 정신 - 중용 - 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러한 자신의 논거를 로마와 프랑스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뒷받침한다.


  프랑스에서 대머리왕 카롤루스의 나약한 정신은 나라도 똑같이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독일인 루도비쿠스와 그를 계승한 몇몇 사람들은 더 훌륭한 자질을 가졌으므로, 그들 국가의 힘은 더 오래 유지되었다. 아니, 어쩌면 독일 국민의 차분한 기질, 그리고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들 정신의 불변성이 프랑스 국민의 기질보다 그런 추세에 더 오랫동안 저항할 수 있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_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3-3>, p400


 이처럼,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삼권분립에 대한 주장만을 담고 있지 않다. 정체와 관련하여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는 다르게 자연 풍토까지 고려한 최선이 아닌 최적의 정체를 말하고, 이를 위해 플라톤의 <법률>에서처럼 중용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 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신국론 De civitate Dei>과 같이 로마와 프랑스 역사를 갖고 온 점은 자못 흥미롭게 다가온다. <법의 정신>과 함께 이상의 책들을 읽는다면 보다 깊이 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된다...

기독교는 단순한 전제정체와는 거리가 멀다. 복음서에서 온화함이 그토톡 권장되고 있으니, 기독교는 군주가 벌을 주고 잔인함을 행사하는 전제적인 분노와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인간적이다. 그들은 법을 만들려는 의향이 더 많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p22)... 기독교 덕분에 통치에서는 정치법을, 전쟁에서는 만민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제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만민법 덕분에, 우리는 승리를 해도 패배한 민족에게 생명, 자유, 법, 재산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그대로 남겨준다. - P23

종교에 관한 정치법의 근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나라 안에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을 때는 새로운 종교를 정착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가 나라 안에 정착하면, 그것을 관용해야 한다. - P60

법의 문체는 간결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단순해야 한다(p243)... 법은 미묘해서는 안 된다(p245)... 충분한 이유 없이 법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p246)... 법에는 순수함이 필요하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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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건축은 일본 국내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건축가가 동아시아의 일본 식민지에 파견돼 공부한 결과를 일본 바깥에서 보여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 도달한 건축물 몇몇은 중국 내 세계적 수준의 건축물들을 접하면서 쌓은 견문과 지식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코하마정금은행 다롄지점이나 초대 대만은행 본점 등 식민지 은행의 점포는 대부분 지배 지역에 거점을 둔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것이 식민지 건축의 본래 특징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대만은행 본점과 만주중앙은행 본점만 도쿄에 거점을 둔 니시무라 요시토키가 설계했는데, 이는 만주사변 발발과 만주국 성립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변하고 일본과 지배 지역 간 결합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설할 수 있다.

식민지 은행 건물은 은행 조직이 변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례가 많다. 조선은행 본점은 1950년 한국은행 본점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쓰였다. 한국은행이 기존 건물 서쪽에 고층 빌딩을 새로 지어 본점을 이전한 후에 구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노무라가 대만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것은 그의 대만총독부 영선과장 경력에 조선총독부가 주목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 청사 설계에서 보여준 노무라의 업적을 고려해 당시 설계 중이던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그의 경험을 살리고자 했다.

오노기가 대만총독부에서 만철로 옮겨 간 일이다. 이는 만철 건축 조직이 지배 지역인 중국 동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데 큰 의미를 띠었다. 즉, 이민족 지배나 일본과는 다른 기후나 풍토를 겪어보지 못한 만철의 일본 건축가·건축기술자들이 만철 본사가 다롄으로 이전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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