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遼東)의 전쟁 때에는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아주 여러 가지였고, 사자(使者)들은 길에 널려서 군과 현을 질책하니, 백성이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였는데, 오직 귀향에 있는 촌락만큼은 동요되지 않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통하게 하여 그 힘을 다 없애지 않고도 찾는 것을 모두 주었다.

어떤 사람이 굴돌통에게 항복하도록 유세하자, 굴돌통이 울면서 말하였다. "나는 두 주군을 섬겨 오면서 은혜와 돌봄을 받은 것이 아주 두텁다. 다른 사람의 봉록을 먹고서 그가 어려운 것을 못 본 체하는 일은 나는 하지 않는다!" 매번 스스로 그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응당 국가를 위하여 칼을 한 번 받아야 한다!" 장수와 병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 또한 이것을 가지고서 그를 가슴 속에 품어 두었다.

이연이 불러서 그에게 물으니, 이세민이 말하였다. "지금 군사는 대의로써 움직이는 것이어서 나아가서 싸우면 이기고, 물러나 돌아오면 흩어집니다. 무리가 앞에서 흩어지면 적은 뒤에서 틈을 탈 것이어서 죽고 망하는 것이 며칠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연이 마침내 깨닫고 말하였다. "군대가 이미 출발하였는데, 어찌 하는가?" 이세민이 말하였다.
"우군(右軍)은 엄하게 하여 아직 출발하지 않았고, 좌군은 비록 떠났으나 계산하여보면 또한 멀지 않으니, 청컨대 스스로 그 뒤를 쫓겠습니다."
이연이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모두 너에게 달려있으니, 다시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알겠으며, 오직 네가 시행하라."

이세민은 마침내 이건성과 더불어 밤으로 좌군 뒤를 좇아가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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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정말 그런 줄 여기고 혹 그 사자를 매질하면 망령된 말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해내(海內)에 두루 퍼졌고 군현은 함락되어 없어졌으나, 황제는 그것을 모두 알지 못하였다. 양의신이 황하 북쪽에 있는 도적 수십만을 깨뜨려 항복시키고 상황을 나열하여 보고하자 황제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처음에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도적이 갑자기 이와 같아서 양의신이 항복시킨 도적이 어찌 이리 많은가!"

소위가 말하였다. "다른 날에는 도적이 장백산(長白山, 산동성 추평현 남부)을 점거하였지만 지금은 가까이 사수(?水, 하남성 형양현 서북 비수진)에 있습니다. 또 지난날에 있었던 조세와 전부(田賦) 그리고 부역하던 정남(丁男)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어찌 그 사람들이 모두 변하여 도적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도적에 관한 주문(奏文)을 보건대, 모두 사실대로 하지 않아 드디어 지원하는 계책에서 빠뜨려 때에 맞추어 자르고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또 옛날에 안문(?門, 산서성 대현)에서 요동(遼東) 정벌을 그만 두는 것을 허락하시고 지금 다시 징발하니 도적이 무엇으로 잠잠해지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지 않고서 해산하였다.

이세민이 사이를 틈타 사람을 물리치고 이연에게 유세하였다. "지금 주상은 무도하고 백성은 곤궁하며 진양성(晉陽城, 산서성 태원시) 밖은 모두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대인(大人)께서 만약 작은 절개를 지키면 아래로는 노략질하는 도적이 있고 위로는 엄격한 형벌이 있어서 위태롭고 망하는 것은 몇 날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민심을 따르고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재앙을 돌려 복으로 만드는 것만 못하니 이것은 하늘이 주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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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일(28일) 밤 이경(二更)40에 황제가 비밀리에 제장을 소집하여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게 하니, 군사물자·기계(器械)·공격용 도구가 쌓인 것이 마치 언덕이나 산과 같았으며, 군영의 보루와 장막(帳幕)은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여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모두 버리고 갔다. 무리들의 마음은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다시 부대별로 구분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길로 분산되었다.

지금 저 이밀이 바른 말을 하고자 하나 오히려 두 사람의 뒤를 좇게 될까 두려우며, 아첨하며 생각을 따르는 것은 또한 저 이밀의 본 의도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비록 다시 빈번하게 승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군과 현에 이르러서는 아직 좇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동도에서 지키고 방어하는 것이 오히려 강하다고 하나 천하의 구원병이 더욱더 도착하고 있으니, 공은 마땅히 몸을 던져 힘써 싸워서 일찍이 관중(關中, 섬서성 중부)을 평정해야 하는데 자주 일찍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데 이르렀으니, 어찌 넓지 못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십니까?"

양현감이 웃으면서 중지하였다.

가을, 7월 계축일(17일)에 거가가 회원진(懷遠鎭, 요녕성 요중현)에 이어졌다. 당시 천하는 이미 혼란해졌고, 징발된 군사는 대부분 기약한 날을 지키지 못하거나 도착하지 않았으며, 고려 또한 피곤하고 피폐하였다.

봄, 정월 정축일(2일)에 조서를 내려서 천하의 군사들을 징소하여 탁군(?郡, 북경시)에 집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백성을 모집하여 ‘교과(驍果)’라고 하고 요동(遼東)의 옛 성을 수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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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제한적이며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은 상상되었다(imagined). 가장 작은 민족의 일원들조차도 같은 겨레를 이루는 이들 절대 다수를 알거나 만나보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일조차도 거의 없으리라. 그럼에도 각자의 가슴속에는그들의 교감(communion)에 대한 심상이 살아 숨쉬고 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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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2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때 천하에는 무릇 군(郡) 190개, 현(縣) 1천255개, 호(戶)가 8백90여 만이 있었으며, 동서로 9천3백 리이고 남북으로는 1만4천815리이었다. 수씨[수]의 융성함은 여기에서 극에 달하였다.

황문시랑 배구(裴矩)가 황제에게 유세하였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 받은 땅으로 한(漢)과 진(晉)이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습니다."

두건덕이 손안조에게 말하였다. "문(文) 황제 때에는 천하가 부유하고 번성하였지만 1백만의 무리를 징발하여서 고려를 쳤다가 오히려 패배하였소. 지금 홍수가 재앙이 되어 백성들은 곤궁하며, 이에 더하여 지난해에는 서쪽으로 정벌하러 갔고[토욕혼 정벌군],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픈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소.

애초에, 아홉 개의 부대가 요하를 건너서 무릇 30만5천 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요동성까지 도착한 사람은 오직 2천700명뿐이며, 군용물자와 무기가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잃어버리고 없애서 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었다. 계묘일(25일)에 이끌고 돌아왔다. 애초에, 백제왕(百濟王) 부여장(扶餘璋, 백제 30대 무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그로 하여금 고려의 동정(動靜)을 엿보게 하였더니, 부여장이 안으로 고려와 몰래 내통하고 있었다.

봄, 정월 을사일(1일)에 조서를 내려서 하북(河北, 황하 이북)에 있는 여러 군사 1백여만을 징발하여 영제거(永濟渠)1를 뚫었는데, 심수(沁水)의 물을 끌어서 남쪽으로 하(河, 황하)에 도달하게 하고, 북쪽으로 탁군(?郡, 북경시)으로 통하게 하였다. 정남(丁男)이 공급되지 못하자 처음으로 부인을 부렸다.

신축일(6일)에 황제가 급사랑(給事郞) 채징(蔡徵)에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천자는 순수(巡狩)하는 예의(禮儀)가 있었다. 그러나 강동(江東, 남북조의 남조)의 여러 황제들은 대부분 연지와 분을 바른 것을 좋아하며 깊은 궁궐에 앉아있기만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서로 만나지 않으니 이 무슨 이유인가?" 대답하였다. "이것이 그들이 오래가지 못하였던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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