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천하에는 무릇 군(郡) 190개, 현(縣) 1천255개, 호(戶)가 8백90여 만이 있었으며, 동서로 9천3백 리이고 남북으로는 1만4천815리이었다. 수씨[수]의 융성함은 여기에서 극에 달하였다.
황문시랑 배구(裴矩)가 황제에게 유세하였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 받은 땅으로 한(漢)과 진(晉)이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습니다."
두건덕이 손안조에게 말하였다. "문(文) 황제 때에는 천하가 부유하고 번성하였지만 1백만의 무리를 징발하여서 고려를 쳤다가 오히려 패배하였소. 지금 홍수가 재앙이 되어 백성들은 곤궁하며, 이에 더하여 지난해에는 서쪽으로 정벌하러 갔고[토욕혼 정벌군],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픈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소.
애초에, 아홉 개의 부대가 요하를 건너서 무릇 30만5천 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요동성까지 도착한 사람은 오직 2천700명뿐이며, 군용물자와 무기가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잃어버리고 없애서 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화가 나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었다. 계묘일(25일)에 이끌고 돌아왔다. 애초에, 백제왕(百濟王) 부여장(扶餘璋, 백제 30대 무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그로 하여금 고려의 동정(動靜)을 엿보게 하였더니, 부여장이 안으로 고려와 몰래 내통하고 있었다.
봄, 정월 을사일(1일)에 조서를 내려서 하북(河北, 황하 이북)에 있는 여러 군사 1백여만을 징발하여 영제거(永濟渠)1를 뚫었는데, 심수(沁水)의 물을 끌어서 남쪽으로 하(河, 황하)에 도달하게 하고, 북쪽으로 탁군(?郡, 북경시)으로 통하게 하였다. 정남(丁男)이 공급되지 못하자 처음으로 부인을 부렸다.
신축일(6일)에 황제가 급사랑(給事郞) 채징(蔡徵)에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천자는 순수(巡狩)하는 예의(禮儀)가 있었다. 그러나 강동(江東, 남북조의 남조)의 여러 황제들은 대부분 연지와 분을 바른 것을 좋아하며 깊은 궁궐에 앉아있기만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서로 만나지 않으니 이 무슨 이유인가?" 대답하였다. "이것이 그들이 오래가지 못하였던 까닭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