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2년 5월 14일 대법원장에게 ‘지시’각서 5호를 내려보냈다. 이 지시각서에서 그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는 등 구질서와 타협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으로 혁명정신과 동떨어진 재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일부 법관들이 중대한 국가적ㆍ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권리 위에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박정희는 당시 사법부를 군대의 법무감실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동백림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해외에 있던 피의자들을 우방국 주권을 침해하면서 무리하게 국내로 연행해 와 국제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은 사건이다. 1심과 2심에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중형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는 간첩죄를 비롯해 대부분 무죄가 선고되는 등 파기환송 판결이 많이 나왔다.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씨 등은 재판 과정에 중앙정보부 등 외부의 압력이 작용했다면서 "중정은 재판관과 검사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재판관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3일간 호텔에서 감금되다시피 했다"라고 주장했다.

최영도 변호사에 따르면 대법원장이 "놀라시는 척하시는 것" 같았다고 한다. 검찰총장에 법무장관까지 지내, 검찰의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 만한 대법원장이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판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여태까지 외압에 굴하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검찰과 정보기관에서 일일이 판사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도청하고 미행하고 은행계좌를 조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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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의가 처음 이르렀는데, 흰 뼈가 땅을 덮었고 가시밭은 넓게 바라다 보였고, 살고 있는 백성도 100호를 넘지 못하였으며, 장전의의 휘하에는 겨우 100여 명뿐이었고 서로 함께 중주성(中州城)을 지켰지만 사방의 들판에도 모두 밭을 가는 사람은 없었다. 장전의는 이에 휘하에서 18명의 쓸모 있어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람마다 1기(旗)와 1방(?, 공문서)을 주고서 그들을 둔장(屯將)이라고 하면서 18개 현(縣)의 옛 터전으로 가게 하여 깃발을 세우고 공문서를 펼쳐놓고 떠나고 흩어진 백성을 불러 위로하고 나무와 곡식을 심어 가꾸도록 권하게 하였다.

오직 살인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단지 곤장을 쳤을 뿐이고 엄격한 형벌은 없애고 조세도 없애니 백성 가운데 그곳으로 돌아온 사람은 저자와 같았다. 또 장정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전투와 진(陣)치는 방법을 가르쳐서 노략질하는 도둑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몇 년 후에 도성에 있는 마을들은 점차로 옛날의 제도를 회복하였고, 여러 현(縣)의 호구(戶口)도 거의 모두 돌아와 회복되고 뽕과 삼베도 울창하여 들판에 노는 땅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이웃 마을 사이에 있고 없고 간에 서로 도와주니, 그러므로 모든 호구에는 저축한 것이 있어서 흉년에도 굶지 않고 드디어 부유함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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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벼락처럼 찾아왔다.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들에게는 대규모 판검사 임용이라는 엄청난 기회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모두가 그 기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좌익이나 중도성향의 변호사들에게 그 문은 유난히 빨리 닫혔다. 문이 열렸다는 기억을 간직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적산(敵産)은 점령지대 안에 소재하는 적국 소유 또는 적국국민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승전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은 모두 미국 것이었다. 승전국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귀속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적산’은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탈한 우리 재산이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1945년 9월 25일의 군정법령 제2호는 조선 내 일본의 국공유 재산, 일본군 소속 재산을 군정당국 또는 미국이 접수할 것을 규정했다. 적산의 매매·취득·양도는 금지되었고, 일본인들은 귀국 시 현금 1000원만을 들고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사유재산은 ‘정당한 수속’을 밟아 매매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기 재산을 조선인에게 헐값으로라도 처분해서 현금화하려고 했다. 한동안 적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적산 처리는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리는 첫 분기점이었다. 정치적 힘이 곧장 경제적 힘으로 연결된 계기이기도 했다.

법원과 검찰의 실권은 빠른 속도로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빨랐다. 문제는 일본인 판검사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해 조선인 법률가의 숫자였다. 이런 공급부족 상황에서도 고위직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경쟁에서 밀려난 법률가들, 정치를 비롯해 다른 진로를 꿈꾸는 법률가들 틈새에서 사회주의에 기반한 아예 다른 세상을 꿈꾸는 법률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일본식 법률가 양성 시스템을 통하지 않은 미국식 통역권력도 등장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법률가들은 ‘사다리 걷어차기’에 좌절하면서도 조금씩 입지를 넓혀나갔다. 혼돈이지만 아직 서로를 잡아먹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은 법조 생태계였다.

장도영과 오제도는 평북 출신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영락교회에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오제도는 1948년 영락교회 청년면려회 지육부장을 지냈고, 평북 선천의 오래된 기독교 가문 출신인 장도영도 월남 후부터 계속 영락교회를 다녔다. 평북 의주, 용천, 선천 출신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영락교회는 1955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교인 중 평북 출신이 3000명, 평남 출신이 1000명, 황해도 출신이 300명이었다. 서울 출신은 400명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중 오제도가 횡령혐의로 위기에 처했을 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구명성명서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오제도는 그런 인연들이 엮어낸 과장된 ‘반혁명’ 사건의 창피스러운 조연이었다. 이번에도 오제도는 도피를 선택했다. 그의 도피를 도운 것도 영락교회 동료들이었다.

일제시대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법원에서 내쫓는다고 해서 일제유산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법조계만큼 해방전후 구분이 의미없는 분야도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경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몇차례 운을 띄운 이법회 문제다. 이법회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말하는 ‘열패고’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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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최선의 수단이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를 좀먹는 대표적인 신화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근대적 개인이 자리잡을 공간은 너무나 협소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마시지만, 은근히 즐기기도 하는 게 술입니다. 술 이후에 혹시 마련될지도 모르는 어떤 자리, 이른바 ‘2차’에 대한 욕망이 일부 남성 판검사들을 술자리로 끌고 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술문화만 바로잡아도 법원 검찰에서 문제되는 비리의 절반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돈을 받든, 청탁을 받든, 사건에 영향을 주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우리 법원과 검찰을 오랜 세월 지배해온 특별한 믿음입니다. 돈을 받아서 먹고 마시는 데 쓴 것과 그 돈을 통째로 주머니에 넣은 것을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나눠 "먹은 것"은 죄가 아니지만, 나눠 "가진 것"은 죄가 될 수 있다는 얘긴데, 이는 판검사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폭넓게 공유되는 기준으로 보입니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이 되려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좁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일단 이 관문을 통과하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청탁이 ‘순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성가족의 모습을 우리는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검찰도 검찰 나름의 신성가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러 청탁 중에서도 신성가족 구성원들의 청탁이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른바 ‘관선 변론’이지요.

처음 만난 사람의 신뢰도가 4.0이므로, 우리 법원, 검찰은 고작 낯선 사람 수준의 신뢰를 얻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불신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법원, 검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피해자는 바로 시민들 자신입니다. 법원, 검찰에 대한 ‘불신’은 누군가 불공정하게 재판에 개입하고 있다는 ‘불안’으로 이어지고 그 불안은 내쪽에서도 뭔가 손을 써야 한다는 강박을 낳습니다. 공격적으로 자기 이익을 구하는 청탁이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서도 청탁이 필요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동창회, 종교단체, 종친회 등 전통적 사회관계망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는 KDI의 조사결과 역시, "전화 한통"에 목마른 사람들의 절박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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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왕조(王潮) 형제만이 그의 어머니인 동(董)씨를 부축하며 험한 길로 군사들을 좇아갔는데, 왕서가 왕조 등을 불러서 이를 나무랐다. "군대에선 모두 법이 있으며, 아직 법이 없는 군대는 없었다. 너희가 나의 명령을 위반하였으니 죽이지 않는다면 이는 법이 없는 것이다."

주매는 전령자가 천자의 좌우에 있어서 끝내 제거할 수 없자, 소구(蕭?)에게 말하였다. "주상께서 파천(播遷)한 지 6년이고, 중원에 있는 장사(將士)들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백성들은 먹을 것을 제공하였는데, 싸우다 죽고 굶어 죽어서 열에 일고여덟이 줄고서 겨우 경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천하는 바야흐로 거가(車駕)가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데, 주상은 다시 근왕(勤王)한 공로를 바꾸어 칙사(?使)의 영광으로 삼아 대권(大權)을 위임하여 기강을 타락하게 하고 번진(藩鎭)을 시끄럽게 하여 화란(禍亂)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령자는 스스로 천하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추밀사 양복공을 천거하여 좌신책(左神策)중위·관군용사(觀軍容使)99로 삼고 스스로 서천(西川)감군사로 제수하여 가서 진경선에게 의지하였다.

태상박사 은영손(殷盈孫)이 논의하였다. "이온은 도적 같은 신하의 압박을 받았으니 바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죄가 되었을 뿐입니다. 《예(禮, 예기)》에는 ‘공족(公族)의 죄가 대벽(大?)에 해당하게 되면 군주는 그를 위하여 소복을 입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온은 이미 주살되었으니 의당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삼고, 있는 곳에서 그 머리를 장사 지내야 합니다. 그 괵(?)을 바치면서 축하하는 예라고 부르니, 청컨대 주매의 수급(首級)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서 시행하십시오." 이를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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