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벼락처럼 찾아왔다.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들에게는 대규모 판검사 임용이라는 엄청난 기회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모두가 그 기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좌익이나 중도성향의 변호사들에게 그 문은 유난히 빨리 닫혔다. 문이 열렸다는 기억을 간직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적산(敵産)은 점령지대 안에 소재하는 적국 소유 또는 적국국민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승전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은 모두 미국 것이었다. 승전국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귀속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적산’은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탈한 우리 재산이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1945년 9월 25일의 군정법령 제2호는 조선 내 일본의 국공유 재산, 일본군 소속 재산을 군정당국 또는 미국이 접수할 것을 규정했다. 적산의 매매·취득·양도는 금지되었고, 일본인들은 귀국 시 현금 1000원만을 들고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사유재산은 ‘정당한 수속’을 밟아 매매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기 재산을 조선인에게 헐값으로라도 처분해서 현금화하려고 했다. 한동안 적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적산 처리는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리는 첫 분기점이었다. 정치적 힘이 곧장 경제적 힘으로 연결된 계기이기도 했다.

법원과 검찰의 실권은 빠른 속도로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빨랐다. 문제는 일본인 판검사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해 조선인 법률가의 숫자였다. 이런 공급부족 상황에서도 고위직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경쟁에서 밀려난 법률가들, 정치를 비롯해 다른 진로를 꿈꾸는 법률가들 틈새에서 사회주의에 기반한 아예 다른 세상을 꿈꾸는 법률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일본식 법률가 양성 시스템을 통하지 않은 미국식 통역권력도 등장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법률가들은 ‘사다리 걷어차기’에 좌절하면서도 조금씩 입지를 넓혀나갔다. 혼돈이지만 아직 서로를 잡아먹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은 법조 생태계였다.

장도영과 오제도는 평북 출신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영락교회에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오제도는 1948년 영락교회 청년면려회 지육부장을 지냈고, 평북 선천의 오래된 기독교 가문 출신인 장도영도 월남 후부터 계속 영락교회를 다녔다. 평북 의주, 용천, 선천 출신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영락교회는 1955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교인 중 평북 출신이 3000명, 평남 출신이 1000명, 황해도 출신이 300명이었다. 서울 출신은 400명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중 오제도가 횡령혐의로 위기에 처했을 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구명성명서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오제도는 그런 인연들이 엮어낸 과장된 ‘반혁명’ 사건의 창피스러운 조연이었다. 이번에도 오제도는 도피를 선택했다. 그의 도피를 도운 것도 영락교회 동료들이었다.

일제시대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법원에서 내쫓는다고 해서 일제유산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법조계만큼 해방전후 구분이 의미없는 분야도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경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몇차례 운을 띄운 이법회 문제다. 이법회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말하는 ‘열패고’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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