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최선의 수단이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를 좀먹는 대표적인 신화입니다. 이런 문화에서 근대적 개인이 자리잡을 공간은 너무나 협소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마시지만, 은근히 즐기기도 하는 게 술입니다. 술 이후에 혹시 마련될지도 모르는 어떤 자리, 이른바 ‘2차’에 대한 욕망이 일부 남성 판검사들을 술자리로 끌고 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술문화만 바로잡아도 법원 검찰에서 문제되는 비리의 절반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돈을 받든, 청탁을 받든, 사건에 영향을 주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우리 법원과 검찰을 오랜 세월 지배해온 특별한 믿음입니다. 돈을 받아서 먹고 마시는 데 쓴 것과 그 돈을 통째로 주머니에 넣은 것을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나눠 "먹은 것"은 죄가 아니지만, 나눠 "가진 것"은 죄가 될 수 있다는 얘긴데, 이는 판검사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폭넓게 공유되는 기준으로 보입니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이 되려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좁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일단 이 관문을 통과하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청탁이 ‘순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성가족의 모습을 우리는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검찰도 검찰 나름의 신성가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러 청탁 중에서도 신성가족 구성원들의 청탁이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른바 ‘관선 변론’이지요.
처음 만난 사람의 신뢰도가 4.0이므로, 우리 법원, 검찰은 고작 낯선 사람 수준의 신뢰를 얻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불신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법원, 검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피해자는 바로 시민들 자신입니다. 법원, 검찰에 대한 ‘불신’은 누군가 불공정하게 재판에 개입하고 있다는 ‘불안’으로 이어지고 그 불안은 내쪽에서도 뭔가 손을 써야 한다는 강박을 낳습니다. 공격적으로 자기 이익을 구하는 청탁이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서도 청탁이 필요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동창회, 종교단체, 종친회 등 전통적 사회관계망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다는 KDI의 조사결과 역시, "전화 한통"에 목마른 사람들의 절박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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