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스에 필요한 건 분명 구조조정과 재정규율, 그리고 경제성장이었다. 그렇지만 현재 위기에 처한 건 바로 유로존의 금융안정성이었다. 그리스의 공공 부문 채무는 유럽 전체의 금융시스템 안에서 보면 일부분에 불과했다.

당시 그리스 위기에 대한 처리를 놓고 이어졌던 미국과 유럽간의 팽팽한 입장 차이, 이것이 바로 그리스가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을 최초로 선택하게 된 상황이다. 유럽이 비상사태 체제로 빠져든 것은 단일한 주권 창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할 당국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위기감을 느끼고 그리스 문제를 논의하면서도 유로존 전체를 위한 포괄적인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는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유럽중앙은행 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유럽 국가들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는 지금 어떻게 유럽의 중앙은행이 저렇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는가?

그리스의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재조정하는 대신에 모든 공공 부문과 비틀거리는 경제 분야 전체를 구조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 개선이라는 대담한 제안은 IMF가 실제로 그리스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지원계획에 포함한 내용들이다.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금융위기가 과도한 채무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경기회복을 위해 세계가 독일에 기대하는 역할은 자금을 푸는 것이 아니라 긴축경제의 모범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글로벌 경쟁력 측면에서 각국 정부는 지출과 채무를 반드시 적절하게 통제해야 했다. 유럽의 인구 문제는 상황을 더 급박하게 만들었다. 노동시장과 실업 문제에 대해서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하르츠 IV 개혁 정책의 교훈을 배워야 했다. 케인스학파가 국내수요를 염려하고 있을 때 독일이 내놓은 해답은 바로 수출이었다. 노령인구가 늘고 있는 유럽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출을 늘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시장국가들에 대해 채권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해야 했다.

2010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유럽 은행들에 대한 CDS 스프레드, 즉 은행 채권의 부도 위험에 대한 보험금이 두 차례 뛰어올라 미국 은행들에 대한 보험비용을 웃돌았다. 그 첫 번째 시발점은 그리스였고 두 번째는 아일랜드였다. 유럽의 금융위기는 너무나 규모가 크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해당 국가들이 각자 해결할 수 없었다.

양적완화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금융시장을 통해서 전해진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다량 매입하면 채권 시장금리가 떨어지고 자산관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수익률 높은 다른 자산을 찾는다. 그렇게 채권에서 주식으로 관심을 돌리면 주식시장이 호황을 누리며 포트폴리오의 자산가치가 증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나선다. 최소한 이렇게 하면 경제를 자극하는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방법은 되는 것이다.

양적완화는 의회에서 재정정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미연준이 채택하는 긴급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지만 연준 자체 역시 미국 정계의 갈등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정치가들은 결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금융위기는 정치위기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2011년 봄에 터져 나왔던 국민들의 저항은 현 정부를 바꿔놓지 못했다. 정부의 정책을 바꾼 건 열정과 상상력만 있는 저항이 아니라 2010년의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이라는 전략, 그리고 대충 꿰맞춘 "해결책"이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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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극장 1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1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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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는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올바른 물음은 첫째, 물어지고 있는 것(das Gefrgte), 둘째, 물음이 걸려 있는 것, 다시 말해 물을 때 겨냥하는 것(das Befragte), 셋째, 물음이 밝히려 하는 것(das Erfragte)을 지니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첫째, 물어지고 있는 것은 물음의 대상 곧 '존재'다. 둘째,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은 그 존재를 해명할 때 본보기가 되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것이 바로 인간, 하이데거가 쓰는 용어로 하면 '현존재'다. 셋째, 물음이 밝히려는 것은 바로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존재 물음의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요컨대 '현존재'를 분석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2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에는 전기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사상과 이 시기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중에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와의 사랑도, 카시러(Ernst Cassirer, 1874 ~ 1945)와 치룬 다보스 결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하이데거 극장 1>에서 하이라이트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먼저 존재, 존재자,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며 <존재와 시간>의 큰 틀을 설명한다.


 존재는 존재자를 떠나 따로 있지 않고, 존재자도 존재를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인간의 존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은 우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존재 물음이 밝히려는 것이 바로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가리키는 바'를 뜻한다. 하이데거의 논의를 미리 앞당겨 이야기하자면, 존재의 의미는 '시간'이다.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의 존재는 곧 시간을 사는 것을 뜻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3


 존재자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 존재자의 존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인간은 현존재로 지칭된다.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 인간이라는 현존재라면,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진정한 현상 곧 현상학적 현상은 칸트의 선험철학 지평 안에서 보면 '공간과 시간' 같은 직관의 형식을 가리킨다. 공간과 시간이 드러나 있어야 거기에서 존재자들이 존재자로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자들을 직관하는 이 감성적 형식은 곧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상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과 시간이 바로 현상학적 현상 곧 존재자의 존재인 셈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31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가리켜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p314)... 하이데거가 다자인을 인간을 규정하는 말로 가져다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바로 '존재(Sein)의 거기(Da)'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존재의 장소라는 뜻이다. 인간이란 정신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고 주관도 아니고,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곧 현-존재(Da Sein)인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5 


 은폐되어 있던 존재는 존재자의 말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게 되고, 현존재의 독특한 있음 - '실존'(Existenz) - 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게 되지만, 각기 다른 현존재가 모두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디서나 각자 자기로 있다. 각기 다른 현존재는 다른 어떤 인간으로도 대체될 수 없지만, 이러한 실존은 세인에 의해 은폐되고, 비실존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하이데거는 '공동존재에 몰입'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삶이 모두 실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가 존재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독립된 모나드와 같이 폐쇄된 개체가 아니라 세인(世人, das Man)과의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로고스는 사태를 밝히는 말이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로써 드러냄이기 때문에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여기서 참, 진실, 진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알레테이아(aletheia)다. 알레테이아의 본래적 의미는 '사태 자체의 드러나 있음'이다. 동사형인 알레테우에인(aletheuein)은 '참말로써 사태를 드러냄'을 뜻한다. 그러므로 알레테우에인으로서 로고스는 '말을 통해 존재자를 은닉돼 있는 것을 말함을 통해 드러냄이다. 알레테이아는 '사태 자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남'을 가리킨다. 그것이 진리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발언함 곧 판단함'에서 입증되는 진리는 이차적인 진리일 뿐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33


 현존재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 공동존재에 몰입해 있는데, 그렇게 몰입해 있기 때문에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사태다. 각각의 현존재는 공동존재 안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자기 자신이 아닌 자'를 하이데거는 세인(das Man)이라고 부른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61


 세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현존재. 비실존적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다. 존재자에게 근원적인 불안을 안겨주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세인은 '모호한 확실성'을 통해 진리를 은폐하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다. 알레테이아는 은폐되었다. 세인은 존재자의 유한성을 은폐하고, 존재자에게 비실존적 삶을 강요한다.


 세인은 말한다. "죽음은 확실히 온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이 '하지만'이라는 말로써 세인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빼버린다. '당장은 아니다'라는 이 해석을 통해 세인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죽음은 '나중에 언젠가'로 미루어진다. 이렇게 죽음이 들이닥치는 그 '언제'를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의 '무규정성'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함으로써 세인은 죽음의 확실성을 은폐하고 만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1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존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현존재의 결단을 말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죽음을 피하지 않고 직면했을 때, 존재자를 유한하게 만드는 시간의 한계성은 극복되고, 존재자를 통해 존재의 진리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단성이란 양심의 부름에 따라 살겠다는 결의/결심을 뜻함과 동시에 그런 결단 속에 현존재 자신과 세계가 새롭게 개시됨, 새롭게 열려 밝혀짐을 뜻한다. 이 새로운 개시성(Erschlossenheit, 개시돼 있음, 열려 밝혀져 있음)이 바로 결단성이다. 개시성이라는 말이 닫힌 것을 열어 밝힌다는 뜻을 품고 있듯이, 결단성이라는 말도 닫힌 것을 열어젖힘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개시성(열려 밝혀져 잇음)을 바로 '근원적인 진리'라고 부른다. 개시성이 근원적인 진리인 것은 진리 곧 알레테이아가 비은폐성 곧 '은폐에서 벗어나 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29


 결단이 진정으로 본래적인 결단이 되려면, 죽음으로 앞질러 달려가봄이라는 시험과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봄은 모든 우연적이고 비본래적인 것들을 모조리 떨쳐내버리는 극한의 시험이고 시련이다. 이 시련과 시험을 통과한 결단성만이 진정한 결단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결단을 통해서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33


 현존재는 회피하는 방식으로든 마주보는 방식으로든 자신의 죽음과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 죽음과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에서 현존재의 전체성을 확보할 가능성도 생겨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07


 <하이데거 극장 1>에서 언급된 <존재와 시간>의 내용을 거칠게 정리했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빠져 있어 리뷰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는 논리적 비약이 있는 듯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한계점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뼈대 위에 <존재와 시간>에 대한 다른 해설서로 살을 입히면서 이해를 깊게 한다면, <존재와 시간>의 어려움도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글을 마치기 전에, 어제 있었던 이태원 할로윈 참사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154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 참사를 접하면서 우리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주변의 지인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음이 당장 우리에게 닥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의 일처럼 방관해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인이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침묵하고, 애도할 때라고 강요할 때라도 우리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죽음을 당할 수 있었음에 대해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을 넘어 공동존재로서 그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직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실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방송에 수많은 승객들이 죽음을 당했고, 애도할 때라는 말에 애도만 하다가 불과 몇 년만에 '지겹다'와 '시체팔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 우리에게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면, 우리에게 커다란 슬픔에 대한 직면을 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현존재의 실존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현존재의 존재를 실존으로 이해할 때, 그 실존을 규정하는 범주들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특별히 ‘실존범주‘(Existenzialien)이라고 부른다. 실존범주는 일반 범주(Kategorie)에 맞서 현존재의 실존적 특성을 규정하는 개념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실존 양상을 규정하는 범주를 따로 적시해 실존범주라고 지칭한다. 또 이런 실존범주에 따라 인간의 실존을 분석해 들어가는 것을 ‘실존론적 분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존재의 의미‘는 결국 ‘시간성‘(Zeitlichkeit)으로 드러나게 된다. 시간성이란 ‘장래를 향해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고 이 가능성의 빛 아래서 과거를 반복하고 재해석하면서 현재를 열어 밝힌다‘는 현존재의 시간적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 P322

현존재는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열어 밝히고 그 세계 안에 세계 내부 존재자들을 품고 있다.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현존재와 분리된 세계가 따로 있고, 인간이 그 세계라는 공간 안에 주관이나 의식으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열면서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세계 안에 있음‘은 주관과 객관의 분리 이전의 사태다. 인간이 세계 안에 있다는 이 원초적 사태에 근거를 두고서 그 위에서 주관과 객관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안에 있다‘는 말로 요약한다. - P345

‘세인‘은 ‘일상적인 현존재‘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는 사람이지만, 그 세인은 아무도 아닌 자다. 그렇게 아무도 아닌 자에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를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아닌 자인 세인이 일상성의 실질적인 주체로, 주인으로 드러난다. 세인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현존재는 비자립적이고 비본래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다. 현존재가 본래적인 자기를 찾으려면 이 세인-자기를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본래적인 세인-자기를 극복해 본래적인 자기를 찾는 것, 이것이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현존재의 과제다. - P365

‘실존‘이 ‘자기를 앞질러 있음‘ 곧 ‘자기의 가능성을 기투함‘을 가리킨다면, ‘현사실성‘은 ‘이미 안에 있음‘ 곧 ‘던져져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계 내부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에서는 ‘퇴락‘이 표현돼 있다. 하이데거는 이 세 가지 구조 계기를 죽음의 현상에서 그려본다. - P407

하이데거는 선택의 ‘비성‘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아낸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들을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자유란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짋어짐을 뜻한다. "자유는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을 견뎌내는 데 있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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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심심할 때 읽는 EPL 영국 축구(프리미어리그) 이야기
이문익 / 유페이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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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새벽 운동을 가기 위해 일어나던 중 충격적인 사건에 정신이 들었다.

참 가슴아픈 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수도 서울 한복판 번화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탄식이 절로 난다. 2014년 10월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사고에서처럼 문화행사에 많은 사람이 몰려 발생한 사건이지만, 피해 규모는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에 비통한 마음이 크다.

위령의 날(Day of the Dead, 11월 2일)에 젊은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더 이상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힐즈버러 참사 (Hillsborough disaster)

 1989년 4월 15일 잉글랜드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96명의 팬이 사망하게 된 사건이다. 당시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리스트 FC간의 FA컵 준결승전이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약 25,000여명의 리버풀 팬들이 찾아왔지만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 킥오프 이후 96명이 압사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모든 스타디움에는 기존의 입석 형태가 아닌 좌석 형태의 좌석을 갖추게 되었고, 보호 철망은 모두 철거하게 되었다. _ 이문익, <EPL 영국축구(프리미어)이야기> , p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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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02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희생자들이 훌리건으로 매도당해서 그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한 소송과 승소까지 20년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결국 과실치사로 보상을 받았지만, 길고 긴 법정싸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압니다. ㅠ

겨울호랑이 2022-11-02 21:28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책임질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 진실을 은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되겠지요...
 



 민화(民畵)들은 18세기 이후 농업생산의 증대, 수공업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확대 등 경제의 성장에 따른 서민대중 사이에서 생겨난 회화에 대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흔히 제작되었다. 민화는 18세기 이후에 성장한 서민문화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미의식, 조형상의 특성, 색채감각 등을 보다 진솔하고 직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_ 김원룡, 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 , p545


 지난 주말 전남 강진에 있는 한국민화뮤지엄에 다녀왔다. <화조도>, <연화도>, <심장생도>, <책거리> 등 여러 주제의 민화들을 보면서 민화 소재들의 의미, 그림에 담긴 소망 들을 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당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염원하는 의미가 민화에 담겨있다면, 우리 시대 민화의 가장 인기있는 그림은 <부동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민화 속에 녹아 있는 정신적인 배경도 그와 같다. 민화는 한점 한점 모두가 인간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아름다운 소망이 담긴 그림이다. 이러한 기복 신앙의 민화는 대체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오래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 많이 받고자 하는 것이다. 장수와 복의 상징이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표상이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부터이다(p14)... 기복 신앙은 한편으로 기복을 방해하는 잡귀나 악귀들을 쫓는 벽사 신앙과 연결되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모든 사물에는 음양陰陽이 있으며 삶의 본질에는 선악善惡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림이 지닌 주술적인 힘이 여러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며 영적인 힘을 가진 동물 그림을 집에 둠으로써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_ 윤열수, <민화1> , p16


 많은 민화에 담긴 의미가 장수(長壽)와 행복(幸福)이지만, 기록화와 같이 사실에 기반한 그림도 민화의 한 장르임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와 함께 박정혜의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는 양반들의 사가기록화를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대학 大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일생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양반들의 욕망이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사가기록화는 민화의 일부일수도, 그렇지만 다수 민중들과는 다른 계급의 그림이었다는 점에서는 민화가 아닐수도 있는 애매한 위치의 그림이 사가기록화라 생각된다.


 기록화는 <삼국지>의 내용이나 전쟁, 임금의 행차 및 궁궐의 의식 등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그림은 마치 사진과도 같이 풍속/의식/관제/건축 양식/복식 등의 생생한 내용을 담고 있어 민속적인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기록화는 대개 등축도법을 이용하여 원근을 묘사하고 있는데 비교적 정확한 작도법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대부분의 기록화는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은 도화서의 화원들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_ 윤열수, <민화2> , p706 


 사가기록화 私家記錄畵란 개인이 속한 집안 행사나 의례, 혹은 개인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 등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그림을 의미한다. 대개 사가기록화는 행사 주인공의 자취를 기념하거나 조상의 업적을 선양하며 나아가 집안의 우수성을 알리고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p11)...  사가기록화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장수, 높은 관직, 가문의 번성 등 크게 세 가지로 함축되는데, 이는 사가기록화를 분류하는 기준이 된다. 양반 관료들은 조선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했던 유교적 가치를 사가기록화라는 매체를 통해 나타내려 했다. 유교 사회에서는 어느 장소에서나 관작, 나이, 덕망[三達尊]이 존중되었으며 사람들은 '큰 덕德을 지니면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으며 명성을 얻고 수명을 누린다'는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겼다. _ 박정혜,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 p15/570


 사가기록화는 유교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한 본인과 조상의 자취를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후손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제작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시대 양반 관료들이 평새 이루려고 노력했던 세속적 욕망이 투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_ 박정혜,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 p24/570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에는 사서기록화와 함께 짝이 되는 <평생도>가 소개된다. 사서기록화가 현실화된 업적을 보여주는 그림이라면, 평생도는 양반들이 추구했던 삶을 소재로 한다. 양반들에게 평생도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미래/가능태라면, 사서기록화는 현재/현실태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인생의 황혼기에 평생도와 사서기록화가 담긴 병풍을 양쪽에 펼쳐놓고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양반들은 지난간 세월에 후회가 없었다는 답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도는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이 추구하였던 이상적인 삶을 여러 장면에 나누어 그린 일종의 풍속화로 18세기 말 무렵에 제작되기 시작했다. 가장 이상적인 단계로 설정된 사대부의 일생을 시각화한 일련의 구성은 동아시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평생도에는 높은 관작, 연치, 학덕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였던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의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사가기록화의 제작 목적이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_ 박정혜,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 p424/570 


 평생도는 사가기록화의 범주에서 논의되는 여러 종류의 행사와 의례를 내용 면에서 공유하고 있으며, 부귀공명이라는 현세적인 목적 역시 그림 안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평생도와 사가기록화의 관계성을 분석하면 사가기록화 제작이 조선 후기 화단에 미친 영향과 의미의 짐작이 가능하다. _ 박정혜,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 p11/570 


  죽음을 눈 앞에 둔 한 노인이 어떤 답을 내렸을지도 궁금하지만, 평생도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사가기록화를 통해 자신의 삶이 역사에 남겨질 것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지향점이 주어지고, 그 지향점을 실천하는 과정이 정신세계에서는 감성과 지성 그리고 공통된 뿌리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관념의 실현이라는.


 "아마도 '공통적인 그러나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뿌리'로부터 발원하는 인간 인식의 두 줄기가 있다. 즉 감성과 지성이다. 감성을 통해서는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지성을 통해서는 대상들이 사유된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이 발언에서 감성과 지성이라는 두 줄기의 '공통된 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p610)... 하이데거는 칸트가 규명하지 않고 놔둔 그 뿌리가 바로 '상상력'(Einbildungskraft)이라고 말한다. 감성의 직관과 지성의 사유의 중간에 놓여 이 둘을 종합하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1>, p611


 개인적 차원에서는 '풍속화-사서기록화'가 하나의 쌍이 되어 이상-현실의 관계를 구축한다면, 조선 후기 사회적 측면에서 조선 전기 <몽유도원도>와 같은 관념적인 그림 대신 현실적인 진경산수화가 등장한 것도 역사에서의 커다란 이상-현실의 cycle은 아닐까. 이것과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를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의미있는 생각이 될 듯하다. 진리에 대립하는 예술의 의미를 주장한 니체와 그런 니체를 분석한 하이데거를 

생각한다면, 미술작품 안에서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를 찾는 것도 그렇게 엉뚱하지만은 아닐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데거 극장> 리뷰에서 더 자세히 정리하도록 하자...


하이데거는 <권력의지>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 니체 사상을 해석해 들어간다. 이 메모들에서 니체 자신이 논구한 가장 중요한 사사잉 '권력의지'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사상이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라고 해석하낟. 다시말해 권력의지가 존재자 전체의 존재 성격이라면 영원회귀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석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2>, p246


 페이퍼가 산으로 올라가버렸지만, 민화 안에는 분명 그 시대 사람들의 강렬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소재의 이름과 특성에 담긴 여러 형태의 건강, 부귀의 의미는 이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망이 추상적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던 것은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에 반해 '평생도-사서기록화'는 자신의 뜻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상상력이 가문의 전통이라는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희망했고, 그것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조선 전기 성리학적 유교세계를 관념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동아시아 유일의 소중화(小中華)로서의 자부심이 '진경산수화'로 표현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조선전기 북종화-평생도'와 '진경산수-사서기록화'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관념-현실의 이러한 순환관계 속에서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와도 같은 욕망을 생각하게 된다. 많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책을 읽다보면 정리되겠지...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차지했다 해도 중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야만 풍속인 변발호목(?髮胡服)을 한민족(漢民族)에게 강요하여 중화문화 전체를 야만적으로 변질시켜 놓았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문화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중화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자성리학의 적통(嫡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 조선이 중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p22)... 이로 말미암아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조선사회 전반에 점차 팽배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장을 떳떳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조선 고유문화를 꽃피워내는 데 조금이라도 주저할 리가 있었겠는가. _ 오주석, 최완수, <진경시대1>, p23 


 이 시기(정조 대) 풍속화의 유행은 사(士)의식과 사인적 생활을 공유하는 사계층이 확산되면서 사로서의 소속감을 가졌던 화원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풍속화에는 그들의 자아의식과 생활경험이 투영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속태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색태를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점차 풍속화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풍속화의 새로운 면모는 순조대 이후 조선의 주자학적 질서가 전면적으로 동요하는 가운데 더욱 심화되었다. _ 오주석, 최완수, <진경시대2>,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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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29 1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진에 민화뮤지엄이 있었군요. 저는 강진 하면 정약용 선생님이 자동으로 떠오릅니다ㅎㅎ
민화의 주제는 참으로 다양한데 부동산도를 말씀하셔서 오늘날과도 연결할 수 있겠다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네요^^ 그렇죠 내가 사는 지역과 공간, 생태계는 중요할 수 밖에 없을듯합니다. <조선의 사가기록화~>는 담아둔 책이었는데 망설이고 있었어요. 소개해주신 글을 보니 읽어볼만하다 싶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9 12:00   좋아요 3 | URL
네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강진은 다산관련 유적이 유명한 곳입니다. 그외에도 영랑생가, 월출산 무위사등도 좋습니다. 좋은 가을 주말이네요. 거리의화가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레삭매냐 2022-10-29 1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1년 전에 강진 우두봉에
죽을 고생을 하며 오른 기억
이 납니다.

앞에 흐르는 강이 탐진강
이었더군요. 그 시절에 참
좋았었는데 -

다시 강진에 갈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9 21:56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아직 우두봉에 못 올라가봤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는 곳이라 매년 가는데 다음번에는 레삭매냐님의 추억이 어린 우두봉도 방문 후보지에 올려봐야겠습니다. 레삭매냐님 좋은 주말 되세요! ^^:)

서니데이 2022-11-09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1-09 20:4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

거리의화가 2022-11-09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2관왕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11-09 20:48   좋아요 1 | URL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이번에 운이 좋았네요 ^^:)
 

음이온 광풍을 몰고 왔던 음이온 공기청정기는 사실 공기를 통해서 흐르는 전류의 코로나 방전을 이용한 오존발생기ozonizer였다. 공기 중에서 번개가 칠 때 공기 중의 산소가 깨지면서 오존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당 발생량이 아니라 실내에 누적되는 오존의 농도다. 시간당 발생량이 아무리 적다고 하더라도 좁은 실내에서 음이온 기능을 장시간 작동시키면 오존의 농도는 위험 수준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으므로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는 특별하지 않다. 이는 ‘코페르니쿠스 원리Copernican principle’ 또는 ‘평범의 원리principle of mediocrity’라 불린다. 여기서 평범이란 특별할 것이 없다는 의미다.

도덕률이 신의 명령이라는 주장은 정말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다. 명확한 이유가 없다면 신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겠는가? 그러할 이유가 정말 있다면 우리의 행동을 옳고 그르게 하는 것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신은 도덕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저 도덕의 중개인이나 집행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개인은 건너뛰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 그 판단의 근거들을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위와 같은 과정에 인간의 이해가 개입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많은 사람이 도덕은 결국 주관적이라고 결론 내린다. 분명 상기의 서술에 따르면 도덕 규칙은 주관적인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 계약이나 사회적 관습이 관련된다는 것도 물론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도덕 규칙이 근본적으로 임의성을 띌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사회적 맥락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도덕 규칙은 우리가 서로 어떻게 대하고, 우리가 개인, 가족, 종족으로서 어떻게 번영하고,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떻게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도덕적 직관은 종종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장악되곤 한다. 종교적 이념뿐 아니라 세속적 이념은 일촉즉발의 도덕적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이념은 잔인함을 거부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을 무장해제 시켜 평소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린치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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