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말 기준, 전 세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415ppm을 넘어섰다. 불과 50년 만에 25%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런 증가는 인간의 활동 때문이다. 이 흐름을 되돌리고 우리 모두가 의존하는 기후를 지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10년 안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크게 줄여야 한다. 인간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요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네 가지는 석탄, 연소, 소, 그리고 콘크리트다. 이 네 요인이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 문제의 70%를 유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 집단 내에서 여러 구성원이 힘을 모으고, 세계 차원에서 여러 나라가 힘을 모으면 서로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장기적 관점을 따르는 행위자에게 보상을 하는 시장이 만들어질 때, 동참하는 개인과 조직이 늘어날 수 있다. 사회 규범의 확립, 실제 비용을 제도화하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개입이 조직과 국가의 행동 양식을 바꿀 수 있다.

1~2°C는 지구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변화지만 개인이 일상에서 이를 체감하기는 힘들다. 대신 기록적으로 더웠거나 많은 비가 내린 어떤 시기를 기억할 수 있다. 통통한 다람쥐가 기온 상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눈이 적게 내려서 다람쥐가 먹을 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아직 건물에 난방을 하고, 차를 몰고, 노트북을 충전해야 한다. 구조적인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개별적인 노력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 관련 정책에 주력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일은 탄소 배출을 대규모로 감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꼽힌다.

기술 혁신이 일어나면서 인간은 차량에 연료를 공급하고, 전기를 생산하고, 기계를 돌리기 위해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태웠다. 이로 인해 점차 많은 탄소가 배출되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탄소가 산소와 결합해 이산화탄소(CO2)가 만들어지고, 이는 지구의 대기에 열을 가둬서 기온을 상승시킨다. 우리는 이미 지난 세기에 진행된 기온 상승의 물리적, 정치적 영향을 체감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국민 한 명당 평균 1년에 14톤(벽돌 6300개 정도의 질량)이 조금 넘는 탄소를 배출한다. 2050년까지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탄소 배출량을 1인당 약 1톤(벽돌 440개 정도의 질량)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지금까지 각국 대표자들이 모여 합의한 목표는 2050년까지 넷제로 배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피해를 복구하려면 넷제로 이상으로, 즉 지구가 흡수할 수 있는 한계보다 탄소를 ‘적게’ 배출해야 한다. 탄소를 ‘완전히’ 배출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배출된 탄소를 나무 같은 천연 흡수원과 혁신적인 기술로 제거해 넷제로에 도달할 수는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포기하고 탄소를 제거하는 혁신적인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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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의 예수 - 예수의 민중운동, 개정2판
안병무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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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 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20


 안병무(安炳茂, 1922 ~ 1996)의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를 민중(民衆)의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갈릴래아의 예수>안의 예수는 다른 예수 평전에 그려진 나자렛 목수 예수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결코 영광으로 가득한 승리의 왕(王)이 아니다. 예수는 민중 그 자체다.


 우리는 이 두 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 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 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 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3


 저자 안병무는 예수를 바오로(Paul, 5 ~ 64)가 강조한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이라는 관념과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 ~ 1976)이 강조한 케리그마(Kerygma)와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로 바라보길 거부한다. 대신, 민중의 구체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망의 현실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상에서 일별한 예수 연구사에서 주목할 것은, 저들이 그리스도교의 도그마에서 예수를 해방시키려고 한 반면 저들에게는 사건보다 관념이 먼저라는 전제가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도 그리고 기적이야기도 관념의 산물이다. 불트만도 이 계보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다. 그에게는 관념의 자리에 케리그마가 대치된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52


 이것은 하느님이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모세의 소명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민족의 비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응수했던 대답을 모세와 연결시킨다면, 예수는 모세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의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자로서의 소명은 정치·경제적인 맥락(context)에서만 이해될 수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90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저자는 예수운동을 투쟁적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는 갈릴래아의 비옥한 토지를 둘러싼 '부재지주-소작농', '도시-농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로마와 유대협력자-민중'의 격렬한 대립형태 안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서 선 메시아로서 자리매김된다. 마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 ~ 1900)의 <행복한 왕자 The Happy Prince>에서 왕자 동상이 높은 곳에 서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것을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스스로 초라해져 갔듯이, 말씀(word)은 온전하게 인간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하강하고 거기에 머무른다.


 갈릴래아 민중의 처지는 다음과 같은 네 겹의 억압 밑에 있었다. 첫째는 점령세력인 로마제국의 군사적 횡포와 경제적 착취, 둘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폭정, 셋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인들의 차별주의, 특히 성전제도에 의한 경제적 압박, 그리고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의한 토지독점과 그에 따른 노동력 착취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47


 갈릴래아에 세워진 도시들은 애초부터 침략한 외세에 아첨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특히 로마시대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도시들은 노예노동에 의해서 팽배해진 그레꼬 로마적 사회인 데 반하여, 농촌은 고대 이스라엘 당시의 체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이른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이며 저들은 비옥한 토지,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민으로서 착취를 당하고, 그의 앞잡이인 헤로데 왕가에 의해 그리고 더 나아가 침략세력과 야합하여 생산품의 징수권을 가진 종교귀족들에 의해서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는 저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또한 예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4


  아래에 내려온 말씀은 마치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같이 기존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파괴는 '우리 편을 남기고 적을 쳐 없애는' 구약의 실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뒤집어 없애는 파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는 그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그의 적들은 단결했고, 그의 편들은 자신들을 챙기지 않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돌아섰으며 이로 인해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죽음의 순간 예수는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심지어는 신(神)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어린 양(Agnus Dei). 그렇다면, 그의 비참한 죽음은 부활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02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의 부활을 예수의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인식전환으로 해석한다. 철저하게 버림받은 비참함에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그와 일체를 이루는 순간, 버림받은 그와 민중은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발견한다.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패배요 약함이었다. 그러므로 실망하고 체념하여 도망한다. 그러나 그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고난을 보았고,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보는 순간 바로 예수와의 새로운 연대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죽음은 인식을 바꿀 수 있으며 예수는 메시아라는 그리스도론에까지 발전할 수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83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메시아 예수의 모습 대신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민중의 열망을 담은 정신으로서의 예수. 개인적으로는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을 통해 기복 신앙(祈福信仰)을 넘어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초대 교회 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정신이 예수 운동의 대척점에 있던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부분이 다르게 변화되었지만. <갈릴래아의 예수>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부분과 회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짚어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진] 전남 화순 운주사 와불 [출처 : 법보신문]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에는 누워있는 불상, 와불(臥佛)이 있다. 누워있던 불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담긴 운주사 불상. 아마 이 불상을 만들었던 어느 누군가의 마음이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갈릴래아 민중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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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2-08 0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먹는 일, 나누어 먹는 일을 빼고 생각된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이다. 민중의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의 나라가 왔으면 무엇하며, 온다고 저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나와같다면 2023-02-08 0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있는 형제의 수난을 외면하고 천국으로 향하는 직통로는 없다. 남이야 어떻든 내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 벌버둥치는 자들이 만일 종교인이라면 그건 종교적 이기주의자다. 이런 이기적인 자들이 수용되는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 곳에 예수가 있지 않을터이니까.

겨울호랑이 2023-02-08 08:02   좋아요 1 | URL
나와같다면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기독교가 보편종교, 세계종교가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을 넘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동감에 바탕을 둔 행위를 강조한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개인의 안녕만을 바라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일부의 모습은 분명 신앙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생각합니다...
 

특히 이 아버지들에 대한 니체의 표현들, "높은" "위풍당당한" "근엄한" "유능함" "존경" 같은 말은 니체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니체에게 더 큰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다. 만일 신이 없다면, 만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만일 성령과 계시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종교적 환상을 빼고 나면 어떤 실제적인 것이 남을 것인가? 신을 통해서 모든 것이 의미와 목적을 얻게 되는데, 만일 신이 사라진다면 자연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의미와 목적이 사라지고 만다.

<운명과 역사>로 돌아가면, 니체는 그 에세이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정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답한다. 삶을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을 상승시키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여기에 니체 정신의 본질적 성분이 드러나 있다. 니체 삶을 요약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투쟁일 것이다. 아니, 투쟁보다는 전쟁일 것이다. 병약한 지식인 니체는 평생 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사유의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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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가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로마 정책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철저히 반민중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 민중의 뜻을 고려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민의 뿌리가 없는 자들을 그들의 앞잡이로 골랐던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자들의 통치수단은 횡포밖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 - P53

이 무렵 맨처음의 복음서 마르코복음이 씌어진다. 마르코복음에는유다전쟁 특히 예루살렘의 운명이 반영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예수와 더불어 몰려다니는 그 민중이 바로 그 시대 이스라엘 민전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유다전쟁이 있기 전에 쓰여진 바울로의 편지들 (50-60년)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 P60

여기에서 엘리야의 기본 자세가 잘 표명되었다. 그는 권력자의 불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고, 눌린 자의 편에 서서 누르는 자에 대항했던 예언자였다. 엘리야에 대한 그러한 전승들은 이스라엘 민중이 엘리야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지니게 했는지를 잘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 운동을 엘리야와 연결시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많은 뜻을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령 예수의 변모설화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등장하는데, 그는예언자의 대표로서 나타난다. - P71

이것은 하느님이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모세의 소명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민족의 비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응수했던 대답을 모세와 연결시킨다면, 예수는 모세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의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자로서의 소명은 정치·경제적인 맥락(context)에서만 이해될 수있다. - P90

놀라운 것은 갈릴래아의 농촌과 그 주민들이 너무나도 이스라엘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외래 문화에 물들지 않았다. 그 농촌은 헬레니즘에 포위된 섬 같았다. 해안지대에는 모두 헬레니즘 도시가 서고 안티오쿠스 이래 특히 헤로데 시대에 세워진 도시들은 헬레니즘화되었다. 그러나 농촌은 전혀 그것에 물들지 않았다.  동시에 저들이 갈망하는것은 하느님의 주권만이 확립된 세상이었다. 그것은 젤롯당의 본거지가 갈릴래아였으며, 바로 저들이 그것을 위해 완전히 산화될 때까지 싸운 것을 회상하면 될 것이다.  - P94

묵시문학은 민중의 글이다. ‘에녹서‘, ‘모세의 묵시‘, ‘제4에즈라‘,
‘열두 족장의 유언‘ 등이 그렇다. 그것은 상징언어를 많이 쓰고, 그리고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이것은 바로 박해 중에 쓴 것이고 구전적 비어(語)의 성격을 띠는데, 이것이 민중언어의 특징이다. - P110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12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인들과 나누는 행위가 문제다. 배고픈 자들과의 나눔에서 민중의연대의식을 결속하며 그것을 그 나라 도래의 축제행위로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금식하는 당시의 습성을 거부하면서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마르 2,19/ 병행)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바로 더불어 나누어 먹는 새 시대를 이룰 민중운동의 일환이다. - P123

이런 관심은 역사의 예수를 좀더 가까이 알기 위해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추구와는 길을 달리한다. 현재까지 서구에서 주도된 신학은 예수가 그리스도(예배의 대상)로 된 것에 그 관심을 총집중했다. 그것은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 보는 전제와 이와 관련해서 이른바 케리그마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과 함수관계에 있다. 이른바 말씀이나 케리그마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이다. 사실 (사건)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고정화해 버리면 도그마가 되고 만다. - P126

우리는 이 두 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 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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