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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의 예수 - 예수의 민중운동, 개정2판
안병무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 2020년 12월
평점 :
이 마당 처음에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사상의 핵을 이룬다면, 그의 삶 전체를 그 나라 도래를 위한 운동으로 보아야 정당하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함께 갈릴래아 민중에게로 간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예루살렘시를 향한 진격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 나라를위한 투쟁기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20
안병무(安炳茂, 1922 ~ 1996)의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와 그의 공동체를 민중(民衆)의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갈릴래아의 예수>안의 예수는 다른 예수 평전에 그려진 나자렛 목수 예수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결코 영광으로 가득한 승리의 왕(王)이 아니다. 예수는 민중 그 자체다.
우리는 이 두 면을 절대로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예수'와 '민중'이라고 일단 구별하여 논하나 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가 민중을 인도한 면이 있다면 예수는 민중에게 포위되어 저들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그의 운명까지도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체로 하고 민중을 객체로 보는 입장을 극복할 때 예수의 민중운동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3
저자 안병무는 예수를 바오로(Paul, 5 ~ 64)가 강조한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이라는 관념과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 ~ 1976)이 강조한 케리그마(Kerygma)와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로 바라보길 거부한다. 대신, 민중의 구체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망의 현실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상에서 일별한 예수 연구사에서 주목할 것은, 저들이 그리스도교의 도그마에서 예수를 해방시키려고 한 반면 저들에게는 사건보다 관념이 먼저라는 전제가 일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도 그리고 기적이야기도 관념의 산물이다. 불트만도 이 계보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다. 그에게는 관념의 자리에 케리그마가 대치된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52
이것은 하느님이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모세의 소명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민족의 비명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의 구원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응수했던 대답을 모세와 연결시킨다면, 예수는 모세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의 입장이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자로서의 소명은 정치·경제적인 맥락(context)에서만 이해될 수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90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저자는 예수운동을 투쟁적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는 갈릴래아의 비옥한 토지를 둘러싼 '부재지주-소작농', '도시-농촌',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로마와 유대협력자-민중'의 격렬한 대립형태 안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서 선 메시아로서 자리매김된다. 마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 ~ 1900)의 <행복한 왕자 The Happy Prince>에서 왕자 동상이 높은 곳에 서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것을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스스로 초라해져 갔듯이, 말씀(word)은 온전하게 인간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하강하고 거기에 머무른다.
갈릴래아 민중의 처지는 다음과 같은 네 겹의 억압 밑에 있었다. 첫째는 점령세력인 로마제국의 군사적 횡포와 경제적 착취, 둘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폭정, 셋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인들의 차별주의, 특히 성전제도에 의한 경제적 압박, 그리고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의한 토지독점과 그에 따른 노동력 착취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47
갈릴래아에 세워진 도시들은 애초부터 침략한 외세에 아첨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특히 로마시대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도시들은 노예노동에 의해서 팽배해진 그레꼬 로마적 사회인 데 반하여, 농촌은 고대 이스라엘 당시의 체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이른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이며 저들은 비옥한 토지,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민으로서 착취를 당하고, 그의 앞잡이인 헤로데 왕가에 의해 그리고 더 나아가 침략세력과 야합하여 생산품의 징수권을 가진 종교귀족들에 의해서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는 저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또한 예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144
아래에 내려온 말씀은 마치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같이 기존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파괴는 '우리 편을 남기고 적을 쳐 없애는' 구약의 실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뒤집어 없애는 파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는 그의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그의 적들은 단결했고, 그의 편들은 자신들을 챙기지 않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돌아섰으며 이로 인해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죽음의 순간 예수는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심지어는 신(神)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버림받은 어린 양(Agnus Dei). 그렇다면, 그의 비참한 죽음은 부활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02
<갈릴래아의 예수>는 예수의 부활을 예수의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인식전환으로 해석한다. 철저하게 버림받은 비참함에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그와 일체를 이루는 순간, 버림받은 그와 민중은 다시 하나로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발견한다.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패배요 약함이었다. 그러므로 실망하고 체념하여 도망한다. 그러나 그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고난을 보았고,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보는 순간 바로 예수와의 새로운 연대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죽음은 인식을 바꿀 수 있으며 예수는 메시아라는 그리스도론에까지 발전할 수 있다. _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p283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메시아 예수의 모습 대신 민중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민중의 열망을 담은 정신으로서의 예수. 개인적으로는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을 통해 기복 신앙(祈福信仰)을 넘어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초대 교회 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정신이 예수 운동의 대척점에 있던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면서 많은 부분이 다르게 변화되었지만. <갈릴래아의 예수>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부분과 회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짚어주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진] 전남 화순 운주사 와불 [출처 : 법보신문]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에는 누워있는 불상, 와불(臥佛)이 있다. 누워있던 불상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 담긴 운주사 불상. 아마 이 불상을 만들었던 어느 누군가의 마음이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갈릴래아 민중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