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모순은 니체 사상의 특징이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니체의 어떤 판단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판단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모든 것에 관해서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니체로부터 마음껏 인용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니체는 권력의지를 바그너를 통해서 처음 직접 관찰했으며, 거기서 얻은 인식을 물리학적·우주론적 세계 일반으로 넓혀 체계적으로 이해해보려 분투했다. 1880년대의 유고들은 그런 분투의 흔적이다. 그러나 결국 니체는 권력의지를 보편적 체계로, 일종의 형이상학적 체계로 세우는 데 실패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었다. 니체의 무시무시한 언어들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동굴 속 불 뿜는 용을 거꾸러뜨리고, 우리 안의 신화적인 힘에 호소력을 발휘해 그 힘을 밖으로 불러낸다. 니체의 언어를 통해 디오니소스의 귀환과 부활은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이 된다.
그리고 이 귀환과 부활의 반복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힘들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삶을 이끌어가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다.

요약하자면, 니체의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백승영에게 이르러 ‘생성의 영원회귀’로 나타난다. 동일한 것을 생성, 즉 영원한 변화와 변전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들뢰즈가 주장한 ‘차이의 영원회귀’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자서전에서 《선악의 저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근대 학문, 근대 예술, 심지어는 근대 정치마저도 제외하지 않으며, 그 밖에 근대의 반대 유형인 고귀한 긍정의 유형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이 후자의 의미로 보자면 이 책은 ‘고귀한 자들’을 위한 학교다."

니체의 핵심 사유인 권력의지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그의 민주주의 비판은 분명한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 민주주의는 확실히 약자들의 반란을 통해 성립한 제도이며, 약자들을 주인으로 만들어내는 제도이다. 니체는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지배해야 하며 강자를 약자로부터 보호하고 키워내야만 초인의 창출과 진정한 창조 활동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약자의 세상을 만든 민주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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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남쪽의 평양(平壤)으로 옮긴 뒤로는 한반도 세력의 성격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이후 고구려를 포함하여 한국인이 형성되었을 때, 그들에게 고구려의 유산은 필수 불가결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한국의 영어식 명칭인 코리아(Korea)가 바로 고구려(Kogury)의 축약형인 고려 (Kory)에서 비롯된 것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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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은 나비처럼,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이 대지 위를 춤추며 다니는 존재다. 바로 그런 초인을 지향하는 차라투스트라 니체의 가장 큰 적이 바로 그의 실존을 아래로 잡아당겨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중력’이다.

그토록 위험한 텍스트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는가? 그 위태로운 발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우리 내부의 어떤 원시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거의 야성적인 힘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무기력증을 깨뜨려 내면 저 깊은 곳의 생명력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력, 그 야성적인 힘을 제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그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니체의 텍스트는 파괴의 교과서가 된다

니체는 보통 선거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관철되는 평등한 자들의 지배를 초인의 탄생을 근원적으로 말살하는 사태로 인식한다. 바로 이 평등한 대중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평등주의 시대야말로 최후의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를 혁파하지 않으면 초인은 창출될 수 없다. 초인은 오직 평범함의 대척점에 있는, 대중과 평등의 불구대천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삶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다. 니체는 삶이 자기를 극복하는 데에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가치들이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삶 자체를 구렁에 빠뜨린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자기 극복의 최대의 적은 이 평등화한 대중 사회라는 니체의 진단이 문제인 것이다. 니체는 이 진단을 그냥 한 번 하고 만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므로 니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반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쉽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니체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삶의 자기 극복과 초인의 탄생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민주주의·평등주의 이념과 가치들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반민주주의도 반평등주의도 니체에게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른다.

권력의지는 날것 그대로 관찰하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패배시켜 지배자로 군림함으로써 이웃 민족들에게 두려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다시 말해 만물의 척도이자 의미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설명을 따르면,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관찰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분출과 충돌 때문에 이 세계에 평화가 없고 갈등과 혼란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지 자체를 없앰으로써 불교적 열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했다. 반면에 니체는 권력의지를 삶을 창조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어서는 안 되고 또 부정될 수도 없는 삶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모든 것의 비밀을 파헤쳐 그 본질, 그 실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욕망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이 진리 의지란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생각을 통해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의지, 다시 말해 나의 이해 능력으로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임을 폭로한다. 그렇게 사유 능력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을 내 의지 아래 굴복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 의지는 그러므로 지배 의지이고, 권력의지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언제나 생명체 안에서, 혹은 생명체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주 전체의 본질로서 제시된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로 투사한 발상이다. 반면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식 우주 이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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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주역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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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복 괘에 대한 정이천의 해설.

아직 (지뢰)복이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산지)박이 끝나지 않은 듯하다. 더 내려갈 곳이 없는 듯한데 극에 이르지 않았다면 과연 어디까지 가야하나 싶기도 하지만.

극점이 변곡점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사물에 박진(박탈되어 사라진다)의 이치는 없다. 박이 극에 달하면 복이 오고, 음이 지극하면 양이 생겨나게 되어있다. 양이 위에서 극한까지 견디다 박탈당하게 되면 그것은 다시 아래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서괘전」에서 위에서 궁하면 아래로 돌아온다(반하)라고 말한 바의 것이다. 그래서 복괘가 박괘 다음에 오게 된것이다. 괘의 모양을 한번 살펴보자! 일양이 오음의 아래에서 생겨나고 있으니 이것은 음이 극하면 양이 되돌아온다는 이치이다. 10월에 음이 성하여 극한에 달했다가, 다음 달 11월 동지冬至가 되면 일양이 땅속에서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 복이라고 한 것이다. 양은 군자의 도이다. 양의 사라짐이 극한에 달하다가 다시 양이 돌아오는 것은, 군자의 도는 사라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괘는 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된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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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3-31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위로가 되는 말씀이네요

겨울호랑이 2023-03-31 16:19   좋아요 1 | URL
네 어려울 때는 위로가, 잘될 때는 경계가 되는 경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위로가 되네요...

2023-03-31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KT가 ‘외풍‘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KT는 민영화 뒤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번과 비슷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어김없이 대표이사와 대표이사 선임에 관여하는 사내외 이사들을 정권 코드에 맞춰 선임해왔다. 최근엔 대표이사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고, 지배구조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적받아온 제도상 허점을 고치지 않고 유지해왔다는 뜻이된다. - P19

이 기괴한 상황의 근본 원인은 소유분산 기업들의 지배구조 결함이 맞다. 지분의 80~90%가 셀 수 없이많은소액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다. 소액주주들은 대체로 경영권엔 큰 관심이 없다. 의사를 결집하기도 힘들다. 주인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주인이 없는‘ 상태다. 정치·관료 ‘엘리트‘들에겐,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 사적 이익을 탐닉할 인센티브가 발생한다. 그들의 무기는 정부의 인허가권과 감독권이다. 소유분산 기업들은 금융·통신·철강 등 공공성이 강한 업종에 종사한다. 인허가권 및 감독권의 잠재적 행사 가능성만으로도 이들을 떨게 만들 수 있다. - P21

스튜어드십 코드가 정치인과 관료에게 ‘거대 기업 대표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이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가 될 것이다. 국민연금은과거에서 배워야 한다. 청와대 지시로 삼성물산의 합병 주총에 의결권을 행사한후과가 어떠했던가. 수년 뒤 특검이 국민연금 최고위 간부들을 배임 혐의 등으로기소해 유죄판결을 받게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당시 특검팀에서 파견검사로 일했던 사람이다. - P21

그게 뭐라고 보나?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닌가생각된다. 반일-친일의 구도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식민사관의 요체는 사회진화론이다. 암암리에 이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강한 사람 앞에서는 일단 스스로 접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약자였던 적도 없고, 약자의 편에서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가진 사고다. 이런 행태는 이미 국내 정치에서 많이 보여줬다. 장애인, 노동자, 여성 등을 대하는 태도다. 총체적 인권 무시의 연장선에 대일 외교가 있다.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해줄 수 없는 정부가 바깥에 나가서 어떻게 존중받을 생각을 하나? - P24

이민은 저출생 대책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이민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일자리와 복지뿐아니라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하는 문화도 필요하다. ‘자국민에게 더 투자해 아이를 낳도록 하지 왜 외국인에게 좋은 일을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 P40

SVB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 불안이 가중되면서 이번 사태의 원인을 연준의 잇따른 금리인상에서 찾는 분석이 많다. 연준은 1년에 여덟 차례 금리를 정하는데지난해 인플레를 잡기 위해 무려 일곱 차례나 금리를 올렸다. 그 때문에 2022년1월에 불과 0.25%였던 금리가 연말엔 4.50%까지 치솟았다. 문제는 은행들이 저금리 시절에 고객예치금으로 국채 및 주택저당채권을 대거 매입해놓은 점이다. 금리가 오르면서 채권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실제 미국 금융업체들이 투자한 국채와 주택저당채권의 미실현 손실액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62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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