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은 나비처럼,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이 대지 위를 춤추며 다니는 존재다. 바로 그런 초인을 지향하는 차라투스트라 니체의 가장 큰 적이 바로 그의 실존을 아래로 잡아당겨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중력’이다.

그토록 위험한 텍스트가 왜 그토록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는가? 그 위태로운 발언들이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우리 내부의 어떤 원시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거의 야성적인 힘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들여진 무기력증을 깨뜨려 내면 저 깊은 곳의 생명력을 들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력, 그 야성적인 힘을 제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된다. 그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니체의 텍스트는 파괴의 교과서가 된다

니체는 보통 선거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관철되는 평등한 자들의 지배를 초인의 탄생을 근원적으로 말살하는 사태로 인식한다. 바로 이 평등한 대중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평등주의 시대야말로 최후의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를 혁파하지 않으면 초인은 창출될 수 없다. 초인은 오직 평범함의 대척점에 있는, 대중과 평등의 불구대천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삶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다. 니체는 삶이 자기를 극복하는 데에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가치들이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삶 자체를 구렁에 빠뜨린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자기 극복의 최대의 적은 이 평등화한 대중 사회라는 니체의 진단이 문제인 것이다. 니체는 이 진단을 그냥 한 번 하고 만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므로 니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반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쉽다.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니체의 목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삶의 자기 극복과 초인의 탄생을 목적으로 삼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민주주의·평등주의 이념과 가치들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반민주주의도 반평등주의도 니체에게는 수단의 지위에 머무른다.

권력의지는 날것 그대로 관찰하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패배시켜 지배자로 군림함으로써 이웃 민족들에게 두려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다시 말해 만물의 척도이자 의미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니체의 설명을 따르면,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타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관찰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분출과 충돌 때문에 이 세계에 평화가 없고 갈등과 혼란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지 자체를 없앰으로써 불교적 열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제시했다. 반면에 니체는 권력의지를 삶을 창조하고 전진시키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어서는 안 되고 또 부정될 수도 없는 삶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불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모든 것의 비밀을 파헤쳐 그 본질, 그 실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자체로 선한 욕망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이 진리 의지란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생각을 통해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의지, 다시 말해 나의 이해 능력으로 장악하고자 하는 의지임을 폭로한다. 그렇게 사유 능력으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을 내 의지 아래 굴복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리 의지는 그러므로 지배 의지이고, 권력의지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언제나 생명체 안에서, 혹은 생명체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주 전체의 본질로서 제시된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로 투사한 발상이다. 반면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식 우주 이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원한 자기 창조와 영원한 자기 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이중적 관능이라는 이러한 비밀의 세계, 이러한 나의 선악의 저편의 세계, 이는 순환의 행복 속에 목적이 없다면 목적이 없으며, 원환 고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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