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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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초호에서 고기를 잡고 텃밭을 일구며 고향에 머물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심지어 더 넓은 섬에서도 사회적 삶의 근간이었다. 농경과 연관된 사회 구조는 상속과 토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출생 순서가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원해의 식민화를 추진한 원동력은 땅과 상속권에 대한 추구일지도 모른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50/188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1936 ~ )의 <인류의 대항해-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Beyond The Blue Horizon>에서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바다로 연결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두 발로 대지를 딛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바다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경작 가능한 토지'의 제약 때문이었다. 중세 봉건 귀족들의 봉토(封土)가 제한적이어서 장자에게만 상속되고, 둘째 이하의 자녀들은 성직자 등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고대 지중해, 인도양, 태평양의 항해자들은 바다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

고대 항해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겼던 것 중 하나는 인명 피해의 불가피성, 결코 귀환하지 못한 카누들, 현대의 유럽과 미국 어부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침몰과 좌초에 대한 거친 숙명론이었다. 모든 대양을 해독하는 작업은 오랜 경험과 냉정한 현실주의, 조심스러운 항해 그리고 깊은 바다 풍경과 얼마나 친숙한가의 문제였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9/188

항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도, 축적되지도 않은 시기 항해자들은 자신들이 바다에 갖는 지식의 깊이 이상의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하나의 섬이 사라지면 다음 섬이 보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연안 항해을 통해 그들은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거래하면서 보다 멀리까지 나아가며 교류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가르침, 온갖 종류의 날씨 속에서 힘겹게 쌓은 경험, 하루하루 힘들게 암기한 각종 항해 지침은 글로 쓰이지 않은 전문 지식을 대대로 전달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연안 항해는 짧았다. 모든 여정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여정, 순풍이 불기를 기다리거나 수지맞는 교역로 근처에 잠복해 있는 해적들을 피해 피난처에 몸을 숨기고 몇 주 씩 기다리는 항해였다. 처음 출발했을 때의 화물은 끊임없이 사고파는 과정을 거치며 여정의 끝에 가서 완전히 바뀌었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71/188

이렇게 바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길(道)이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 두 채의 민가가 있고, 과거 나그네들이 호텔과 같은 커다란 숙박업소와 식당 없이도 시골집의 후한 인심에 의지해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바다는 원주민의 생활공간이었음을 <인류의 대항해>는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했기에 이들의 관계는 상호평등적이었고,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 1884~1942)가 말한 '쿨라의 교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바다의 영토는 상상의 영역까지 이어진다. 육지 부족들 사이에 꿈 Dreaming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바다의 영역과 물길을 아우르는 바다 꿈 Sea Dreaming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하루의 실제 세계와 정신적 영역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 원주민의 삶 속에, 창의적이고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며 육지나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과 연계를 유지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속에 하나로 얽혀 있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26/188

이와 같은 교환 관계가 파괴된 것은 바다와의 협력관계가 깨지고, 바다를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로 인식된 근대 이후 부터다. '바다로 연결된 세계'가 아닌 '바다로 단절된 세계'로 바다를 타자화하는 관점이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이후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 ~ 1950)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의 연구가 오늘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에는 '단절에서 연결'이라는 공통된 인식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컨테이너선과 초대형 유조선의 세계에서 공식 항해 지침서는 훨씬 짧아졌고 레이더 목표물과 항만 규정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저자들은 이제 작은 정박지와 포구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데 유람선을 타고 다니는 선원들에게는 이제 그들만의 안내서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가 다시 우리로부터 멀어진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느낌은 원양 여객선이나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널 때 가장 분명해진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75/188

지중해와 마찬가지로 인도양에서도 그러한 연안 항해는 전쟁중인 지배자들과 국제 외교의 그늘에 가려 역사적 각광을 받지 않은 채 번성했다. 근해 운항은 수천은 아닐지라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채 오로지 예측 가능한 바람의 리듬으로만 이어진 여러 민족과 국가들 간의 연결을 촉진했다. 긴밀하게 상호 연관된 몬순 세계는 그렇게 생겨나 동아프리카 해안과 홍해에서부터 인도와 스리랑카, 그리고 멀리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뻗어 갔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78/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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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가 유럽에 보급되면서 몇몇 기물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기물을 만드는 기공들이 코끼리의 두 엄니를 주교 모자의 두 꼭지로 오해해 코끼리가 비숍(주교)으로 바뀐 것이 좋은 예다.

바이킹들도 폴리네시아인 탐험가들과 마찬가지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이 1000년에 굳이 새로운 지역들을 탐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의 탐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구조였다. 특히 전사 집단의 역동성이었다. 야심 찬 지도자들이 새로운 영토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세계 여행을 1492년 이전에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일어난 특정한 접촉의 한 순간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바이킹이 뉴펀들랜드에 도착한 1000년이 바로 특정한 접촉의 순간이다. 그곳을 기점으로 사료에 묘사된 길들을 따라가며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다른 길들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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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사이에 - 제12회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책마을 112
김화요 지음, 오윤화 그림 / 웅진주니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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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지갑이 없어졌단 말이야. 너희들이 우리 집에 왔다 간 바로 어제!" 주목이가 험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거칠게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이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8

김화요의 <내가 모르는 사이에>는 주목이의 생일 파티에서 엄마의 지갑이 사라져 버린 사건과 이 사건에 얽힌 아이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각자의 시선에서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은 사건이 가져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평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문제들이 사건을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결코 작은 일이라 볼 수 없는 사건이지만,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사건. 그리고, 친구들 간의 갈등과 심리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기에 아이들이 재밌게 읽는 것은 아닐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내별마을에 산다고 하면 바로 어색해지는 어른들의 표정, 아파트 단지 꼬마들이 거지 동네라고 생각 없이 부르는 곳. 그래도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길고 가파른 계단도,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도, 낡아서 바람이 세게 불면 신음 소리를 내는 우리 집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내별마을은 무지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조용히 나이 들어 묵묵해진 골목길이 있는 곳이었다. 갈 곳이 없어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서로에게 각별히 끈끈한 곳이었다.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15

<내가 모르는 사이에>를 읽으면서 아빠는 작품에 나오는 친구들의 장점에 대해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가난한 동네에 살지만, 그곳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곳만이 갖는 장점을 발견하는 효민이. 효민이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효민이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주먹이.

한 번도 고효민을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보다 가진 게 적은 것이 확실한데도 나보다 많이 가진 것 같아서 고효민을 볼 때마다 속이 배배 꼬였다... 그러나 고효민은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아이였다. 처음에는 단점이나 약점을 찾아낼까 싶어서 지켜봤으나 나중에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쳐다보게 되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냥 고효민이라는 인간 자체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나도 모르게 고효민이 신경 쓰이고, 그 애의 말에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가끔은 같이 어울리고도 싶었다. 어쩌면 나는 고효민과 친구가 되고 싶었나보다.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103

그리고, 지갑을 가져간 친구의 마음까지. 아빠는 이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멋진 친구들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갖는 좋은 점만 보고 자신의 것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마음, 자신이 피해를 볼 까봐 뒤로 숨는 마음 등. <내가 모르는 사이에>의 친구들은 어른들도 하기 힘든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어서 아빠도 많이 배우게 되었단다. 아니, 어쩌면 어른들이어서 갖기 힘든 마음일 수도 있겠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하지. 더 많은 것을 가지려 채우려 하거나 남을 이겨서 앞서 가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빠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로부터 배울 수 있어 좋았어. 연의는 책을 읽으면서 어떤 점이 좋았니? 이번 한 주는 부회장 선거로 바쁜 시간들을 보내겠구나. 아빠는 결과와 관계없이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의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 이번 한 주도 건강하게 잘 보내고 행복한 토요일을 맞이하자꾸나. 사랑하는 아빠가.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국 말해야 하는 것은 진실 뿐이었다.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월요일에 **이가 겪을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아마 내일도 나는 지금처럼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은 그런 것밖에는 없었다. 도망치는 것, 회피하는 것, 숨어 있는 것. _ 김화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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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의 세계는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를 시작한 1492년의 세계와 달랐다. 첫 번째로 다른 점은, 1492년의 유럽인들이 화기와 대포를 소지해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 거의 모두를 무력화할 수 있었던 반면에, 1000년의 여행자들은 과학기술적 수준이 비슷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1000년에는 교역의 주체도 1492년과 달랐다. 호황을 누린 곳은 중국이나 중동과 같은 세계의 일부 지역이었을 뿐 다른 지역, 특히 유럽은 뒤처져 있었다.

1000년 무렵에 각지의 사람들은 서로 간의 관계망을 수립했고 그것이 세계화의 다음 단계에 필요한 무대가 되어, 1500년대에 유럽인들은 기존의 네트워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개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세계화는 유럽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기존에 있던 것을 바꾸고 증대시킨 것뿐이었다. 세계화는 그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유럽인들은 그 많은 지역에 그토록 빨리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 인구가 2억 5000만 명에 달한 것은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본국을 떠나 이웃 나라 영토로 간 탐험가들이 인구가 적었던 이전 시기보다는 아무래도 사람들과 마주칠 개연성이 높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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