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의 정치학
앤서니 기든스 지음, 홍욱희 옮김 / 에코리브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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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 급진주의 radicalism of the centre'라는 개념은 기후변화와 에너지 정책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중도 급진주의'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급진적인 조치를 위한 대중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후변화 대응에 긴요한 조건인 혁신과 장기적인 사고의 결합을 위해서 그런 지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국가의 개혁을 수반하기도 한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안보는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다.(p168)... 기후변화 문제는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169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 ~ )가 <기후변화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Climate Change>에서 주장하는 바는 사실 간단하다. '기후변화'라는 인류의 장기 과제에서 지속적인 대중의 관심을 기반으로 시민으로부터 국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것은 일상생활의 문제와 기후변화의 문제가 분리된 것으로 바라보기에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연계시킬 필요가 있음도 함께 강조한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이란 내가 주장하는 이른바 '기든스의 역설 Gidden's paradox'에 빠져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역설이란, 지구온난화의 위험은 직접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거의 감지할 수 없기에, 아무리 무시무시한 위험이 다가온다 한들 우리 대부분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중요한 대응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위기가 눈앞에 닥친다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11


 이러한 그의 주장은 얼핏 들으면, 녹색 NGO 활동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지만, 본문에서 그는 기존의 녹색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일반적인 것으로 호도하고 이를 광고하면서 일종의 '공포팔이'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활동을 '선(善)'에 위치시키고, 동참하지 않는 이들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극단적인 흐름으로 이어지기에 결코 대중의 공감을 오랜 기간 받을 수 없음을 비판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 자신과 자연 세계를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렸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고자 한다면 그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녹색운동의 핵심주장 가운데 하나인 사전예방  원칙, 즉 '자연에 관여하지 말라'는 구호를 거부한다. 더 나아가 기후변화를 막아보고자 하는 과정에서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짖더라도 우리는 결코 '지구를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지구는 우리가 어찌하든 간에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구에서 인류가 질 높은 삶을 유지하는 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삶의 질을 더욱 높이는 일이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16


 최악의 시나리오에 초점을 맞춘 정책은 리스크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안이 될 수 없다. 설령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해도 말이다. 그런 정책은 자칫 과잉 대응으로 이어져, 정책 추진을 촉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책 자체를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55


 캐스 선스타인 Cass Sunstein은 강한 PP(Precautionary Principle) 정의가 스스로의 비일관성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즉 오직 최악의 가능성에만 집중하다가 현 상태를 고착시키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반작용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어떤 리스크 상황에서든 사전예방 조치는 거의 항상 그 반대 결과를 낳곤 한다. 이 점은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는 논지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91


 기든스는 이러한 추상적인 디스토피아(dystopia) 시나리오 대신 보다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현실적으로 최고의 정치기구인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는 대신 이를 활용하는 대안,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무성장의 논리 대신 현재 국가의 관심사안을 기후 문제와 연관시키는 방안이 그것이다. 결국, 기든스가 <기후변화의 정치학>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기후변화 억제'라는 목표를 세우고 '백캐스팅(Backcasting)' 방식을 통해 사회 주체들의 관심 사안을 기후변화와 연계시키는 안을 찾고 이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며, 구체적인 방법론은 '넛지(nudge)'가 될 것이다.


 이제 다시 국가 개입의 시대가 돌아왔다. 규제 철폐가 실패로 돌아간 탓이었다. 그런 실패는 지나친 '단기 성과주의'와 공공기관의 무능, 그리고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리스크에 대한 통제력 결여 등이 겹쳐서 생긴 결과였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는 모험심과 기업가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규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시점이다. 그렇게 해서 경제가 살아야만 적절한 기후변화 대응책도 만들어질 수 있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142


 경제적 통합은 지구온난화에 대응하여 발전한 경제적, 기술적 혁신들이 기존의 기술들에 비해서 얼마나 경쟁우위를 가지느냐의 문제다... 경제적 통합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기후변화 억제에 성공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현재 정치적, 경제적 통합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기후변화와 에너지 안보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에너지 안보 문제를 잘 다루어야 기후변화 문제 역시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20


 전체적으로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기든스의 유명한 '제3의 길 Third Way'의 개념을  국제적으로 확대한 개념으로 이를 국제정치의 주요 이슈인 환경 문제와 연결한 책으로 여겨진다.  원자력에 대한 관점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크게 바뀌었지만, 2009년에 나온 이 책에는 반영되지 못했던 것처럼 책에서는 다른 여러 수치들이 인용되었지만, 리뷰 작성 시점은 2021년에는 이미 10년도 지난 수치이니만큼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원자력발전으로의 전환에 대해서 꺼리는 편인데, 적어도 몇몇 선진산업국과 개발도상국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원자력을 대신할 만한 다른 대안은 전혀 없는 형편이며, 현재 사용 중인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중지한다고 할 때 그로부터 안게 되는 리스크가 너무 큰 것도 사실이다. _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p1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지 않고 접근하는 큰 틀에서의 접근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책이 나온 2009년의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370 ppm수준에서 2019년 현재 420 ppm에 이르도록 (이상기후를 초래하지 않는 안전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350 ppm)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과 같은 애매모호한 슬로건 또는 '환경보존의 필요성' 대신 우리가 가야할 길(way) 중 하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실천적인 환경운동 서적이라 여겨진다...


ps.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마침 어느 환경운동단체로부터 메일이 와서 그 사진을 첨부한다. 사진을 보고 느끼는 개인의 생각은 다를테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든스의 주장에 보다 깊게 공감한다...



[사진] 2030년의 인천국제공항을 시뮬레이션한 모습(출처 : 어느 환경보호단체에서 보내온 메일 中)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정치적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는 새로운 개념이 요구된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문제를 폭넓게 다루려 한다. 그런 아이디어의 하나가 바로 ‘책임국가 ensuring state‘다. 기후변화 문제에 관한 한 국가는 일을 촉진하는 자 faciliator이자 가능성을 열어주는 자 enabler로서 활동해야만 한다. 국가의 역할은 거기에 그쳐서도 안 된다. 분명한 성과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성과는 탄소 배출의 점진적 감축이다... 또 다른 기본 개념 두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통합 political and economic convergence‘이다. 정치적 통합은 기후변화 정책이 다른 가치나 정치적 목표들과 긍정적인 방향에서 얼마나 융화되느냐의 문제다. 이런 정치적 통합은 기후변화 정책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역동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일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 P19

우리는 탄소 배출을 적게 하는 더 적극적인 미래 사회의 모델을 생각해내야 하는데, 동시에 우리가 현재 누리는 일상생활과도 밀접하게 이어져야 한다. 아직은 그런 모델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그런 모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 모델이 반드시 녹색 비전으로 치장될 필요는 없지만,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고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상과 현실의 결합이 필요하다. - P23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관점은 녹색사상의 기본 관심사의 하나인 ‘지속가능성‘을 이끌어 낸다. 이는 미래 세대의 이익에 관심을 두는 개념이다. 많은 녹색운동가들은 지나치게 자연에 위해를 가한다는 점에서 경제성장을 거부하며 ‘성장 없는 사회‘를 염원한다. 가치는 스스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는 이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하는 수단, 즉 ‘어떻게‘와 연결되어야만 한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녹색운동가들은 권력과 국가를 불신한다.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희구는 거의 모든 녹색당의 강령에서 발견된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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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건대 죽은 사람은 뼈와 살은 흙에 묻히고, 정갈한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대의 은혜를 입어서 속히 땔감을 더하고 불을 붙여서 나에게 올라가서 천제(天帝)에게 호소하게 하여 준다면 만족하겠습니다.(19/104) - P19

진실로 잃을 것을 걱정하면 못하는 것이 없는데,
혹 풍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시끄러움을 일으킬 수 있다면 한꺼번에 무너지고 흩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명성과 실제를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사직의 일도 끝나고 맙니다.(29/104) - P29

허물을 끌어다가 자기에게 책임을 돌리고 다시 좋은 정치를 하고, 부역을 줄여주며 백성들과 함께 다시 시작하면 대체로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위급함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40/104)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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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장원은 프랑스의 장원보다 훨씬 더 늦게 성립했다. 그때문에 확실히 프랑스보다 더 철저한 장원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영국의 장원은 프랑스보다 더 오랫동안 농민 보유지의 분할불가 원칙을 고수했으며, 이런 분할불가 원칙은 결국 프랑스보다 더 가난한 다수의 농민계급과 농촌 프톨레타리아를 낳게 되었다. 이런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와 영국 특유의 경제사정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영주는 토지의 소작료에 대한 의존도가 프랑스의 영주보다 더 낮았다. - P218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처럼 자본가적 정신이 나타났다. 자본가적 정신에서 토지에 투자해서 그로부터 모든 소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영주계급 내에서 대두하였던 것이다. 그 대신 장원제적으로 경영는 토지재산은 줄었다. 그러나 첫째 이런 자본가적 영주는 관직으로 진출했고, 둘째 그들의 상공업 활동이 요컨대 영국에 비해 저조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지주들과는 달랐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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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범선, 제국 - 1400~1700년,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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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5세기에 대서양 유럽이 개발한, 대포로 무장한 배는 유럽의 영웅담을 가능케 한 발명품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선원이 전례 없이 막대한 양의 물리적 에너지를 이동과 파괴를 위헤 제어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경제적인 고안물이었다. 어느 순간 유럽이 극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65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는 <대포, 범선, 제국 Guns, Sails and Empires: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the Early Phases of European>에서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팽창이 가능했던 요인을 '대포'와 '범선'으로부터 찾는다. 서구 제국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력의 두 축인 대포와 범선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발전이 왜 서양에서만 일어났는가?',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점차 옮겨간다. 


 처음부터 알부케르케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있었다. 해군 기지의 역할을 하는 한편 대포로 무장한 함선에 의해 바다 쪽에서 방어가 가능한 전략적 거점을 많이 차지함으로써만 인도양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고아와 말라카, 호르무즈가 각각 1510년, 1511년, 1515년에 정복되었고,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우위를 확립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70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럽에서 이러한 혁신이 가능했던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여러 면에서 부족했던 사회, 문화, 자연 환경 덕분(?)이었다. 오랜 기간 유럽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후진 문명이었고, 다른 지역으로 수출할만한 품목도, 자원도 부족했다. 다만, 그들에게 컸던 것은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결국 이들은 '군사력'을 통해 자신들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중세 유럽의 만성적 취약성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선 유럽의 인구가 많지 않았다. (결코 1억 명 이상을 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자기 민족의 피, 같은 기독교도의 피로 제 손을 더럽히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각국의 군대가 모여 연합군을 형성하면, 결과는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


 지중해식 항해술과 북방식 항해술 사이의 더 긴밀한 연계, 나침반의 사용과 대서양 지역에서 원양 항해술의 발전, 14세기 중반 이후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역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유럽 인구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갤리선의 노잡이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현실, 15세기를 지나면서 교역의 확대 등 이러한 요인들이 총체적으로 선반 건조술, 특히 범선 건조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87


 유럽의 팽창 과정을 기술할 때 군비에서 유럽의 우월성은 일반적으로 정적인 현상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사실, 15세기 첫 팽창의 물결 이후 유럽의 군비 생산 능력은 질적인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나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로 인해 비유럽권의 사람들은 유럽의 팽창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극도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영토 방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게 된다. 특히 대포 제작에서 유럽의 진보는 전함의 건조와 해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략과 기술의 주목할 만한 발전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85


 그렇다면, 왜 서양이 아닌 다른 지역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는가? 사실, 당대 중국, 인도, 이슬람 문명은 결코 서양에 비해 뒤떨어진 기술(機術 technoloogy)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분야에서 그들은 앞선 사회 제도와 인프라를 갖고 있었고 매우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치폴라에 따르면 문제는 바로 '큰 문제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일례로 '흑사병' 등 질병과 '30년 전쟁'과 같은 전쟁이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에 이들은 '자본'에 의존하기보다 '노동'에 더 집중했다. 그것은 비록 '효율적'이지는 못했겠지만,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했기에 서구와 같은 변혁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이슬람의 패배는 해전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과 전략에서 주로 기인한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적인 베네치아와 몰타기사단 세력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투르크는 대서양 세력이 거둔 해상 혁명의 함의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근대가 이미 시작되었얼 때도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인력에 크게 의존했다. 충각으로 들이박고 적선에 올라타 싸우는 구식 전술을 고수했고 전력의 핵심은 언제나 갤리선이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21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술적 지원과 풍부한 원자재, 중국인들 자신의 재주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만족스러운 수준의 대포를 생산하지 못한 원인은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다. 중국인들이 왜 우수한 대포를 만들어내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중국이 왜 산업화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과 문화적 자부심, 제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40


 기동전에서 야포의 역할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기 위해서 맘루크 왕조는 기병대의 봉건적 특권과 역할,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와 지배 계급으로서의 위신을 희생해야만 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봉건적 사회 구조의 해체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전제하지만 맘루크 왕조는 여기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기에 앞서 "세계관이 전면적 변화, 낮은 수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겪어야 했다. 강력한 사회, 문화적 요인들이 서양의 기술을 흡수하고 전파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6


 안정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기득권들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들에게 바람직한 개혁의 임계점(臨界點, Critical point)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하되,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선'이 된다. 그런 면에서 가진 것이 없었던 유럽의 기사들이 자신들의 롱소드(Longsword)를 내려놓는 것은 풍요로웠던 이슬람 전사들이 샴쉬르(Shamshir)를 놓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쉬웠으리라.


 르네상스 초기 유럽의 기사들은 화기에 대해 맘루크의 기마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품었으나 1500년에 이르자 유럽의 현안들은 점차 화려함보다는 조직화를, 용맹성보다는 효율성을 선호하는 새로운 사회 집단이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들은 기계와 야금술에 관심을 보이며 그 수가 증가하고 있던 무수한 장인 계급예 의존할 수 있었다. 신기술 개발에 유리한 초기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작용하여 후속 발전을 강력하게 추동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6


 저자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서양의 전투 무기들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지만, 이를 운용하는 전술(戰術)의 변화까지는 가져오지 못함을 지적한다. 19세기 중국의 정치가는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 1839 ~ 1842)에서 패배에서 드러난 서구와의 차이를 하부구조에서 찾지만,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내세운 '양무 운동(洋務運動)'의 실패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반증이 되었다. 


 19세기 펑구이펀 馮桂芬은 이렇게 썼다. "천지가 생겨난 이래 가장 크나큰 분노가 뜼이 있고 기개가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끓어오르고 있다. 그들의 머리칼이 곤두서 모자가 들려 올라갔다. 이것은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큰 나라, 수천, 수만 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나라가 한줌의 야만인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들은 수가 적지만 강한가? 어째서 우리는 수가 많지만 약한가?... 우리가 이 야만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단 하나, 튼튼한 배와 효과적인 대포다."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0


 장즈둥 張之洞을 비판하며 옌푸 嚴復가 지적한 대로 "중국의 학문은 그 나름대로의 근본과 기능이 있고, 서양의 학문도 그 나름대로의 근본과 기능이 있다." 기술은 과학에 뿌리를 두고 과학은 철학에 뿌리를 둔다. 자신들의 철학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중군인들은 결코 서양의 과학을 배울 수 없었다.(Mu, Hundred Flowers, p94)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30


 <대포, 범선, 제국>의 저자 치폴라 역시 이러한 주장을 펼친다. 소프트웨어(software)를 갖추지 못한 하드웨어(hardware)의 변혁은 단순한 모방에 불과하며, 제국주의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화(西區化)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자, 비극이라는 것이 저자의 맺음말이다. 


 이 책의 역사적 분석이 틀리지 않다면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민족은 "문명화" 정도와 상관없이 우위를 점하게 되어 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시대"는 이제 갑작스레 끝이 났다. 서양의 우위에 들고일어난 "저발전" 세계는 서양 기술 습득의 중요성을 온전히 강조하는 듯하다. 서양의 지배는 우월한 기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는  이해할 만하지만 그 역시 비극적 함의를 띠고 있다. 서양의 테크닉을 획득하기 위해 비유럽 민족은 더 심오하고 전반적인 "서양화" 과정을 거쳐야 했거나 거쳐야 한다. 실로 역설적이게도 서양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그들은 서양식 사고와 행동 방식을 흡수해야만 한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77


 사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보다 소프트웨어에 가까운 '시계'에서 다루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자의 다른 저작인 <시계와 문명>의 리뷰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의 한 가지만 챙기고 리뷰를 갈무리하자. 그것은 '서구와 같은 발전'이 결코 절대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남겨진 수많은 문명의 자취 속에서 최근 이뤄낸 서구 문명의 성취를 다른 문명과의 본원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초창기 야포에 대한 투르크 인들의 태도나 초창기 갤리언선에 대한 베네치아 인들의 태도는 일반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 증거로 쉽사리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혁신 기술은 처음 선을 보일 때, 실질적 이점보다는 미래의 발전 잠재력 때문에 가치가 있으며 후자의 요소를 평가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노릇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7

G. F. 허드슨이 표현한 대로 "유목 세력이 몰락한 것은 그들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응 능력 이상으로 전쟁 기술이 진화한 데 기인한다. 17, 18세기 타타르 족은 아틸라와 바이안,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군대에 그토록 엄청난 위명을 안겨준 특징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화승총과 대포가 전쟁에서 점점 더 자주, 또 널리 사용되는 것은 기마병에 의존하고 새로운 장비를 갖출 경제적 자원이 없는 세력에게는 치명적이었다." - P174

유럽의 해상 확장은 산업 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은 여러 주변 여건 가운데 하나이다... 반대로 산업 혁명이 유럽의 팽창에 탄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산업 혁명은 유럽 인들의 인구수를 절대적 의미에서 또 비유럽의 인구와 비교하여 상대적 의미에서 모두 증대시켰다. 그리고 유럽 인들에게 더 강력한 무기와 인간에게 불리한 자연력을 통제할 수 있는 효율적 기술을 제공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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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하늘의 뜻에 순종하여 때를 타서 어려움 속에서 많은 생명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으뜸가는 성인과 영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덕과 힘을 헤아려볼 만하지도 않은 것이오."(33/91) - P33

무릇 지금은 상란(喪亂)의 시대이지만 이적은 마침내 의(義)를 세워서 자기 집을 버릴 수 있었으니, 정절(情節)을 중히 여긴 것이 비록 옛날의 열사라도 그보다 지나친 사람은 없을 터인데, 마침내 그를 시기하고 혐의를 가지고 해치려고 하여서 연과 조(燕·趙, 하북성)의 병사들이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바로 서로 모여 도적이 될 것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오.(45/91) - P45

"사물은 극도에 이르면 되돌려지는 것이며 지극한 곳에 이르면 위험해 집니다."(51/91)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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