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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범선, 제국 - 1400~1700년,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9월
평점 :
14, 15세기에 대서양 유럽이 개발한, 대포로 무장한 배는 유럽의 영웅담을 가능케 한 발명품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선원이 전례 없이 막대한 양의 물리적 에너지를 이동과 파괴를 위헤 제어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경제적인 고안물이었다. 어느 순간 유럽이 극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65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는 <대포, 범선, 제국 Guns, Sails and Empires: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the Early Phases of European>에서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팽창이 가능했던 요인을 '대포'와 '범선'으로부터 찾는다. 서구 제국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력의 두 축인 대포와 범선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발전이 왜 서양에서만 일어났는가?',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점차 옮겨간다.
처음부터 알부케르케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있었다. 해군 기지의 역할을 하는 한편 대포로 무장한 함선에 의해 바다 쪽에서 방어가 가능한 전략적 거점을 많이 차지함으로써만 인도양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고아와 말라카, 호르무즈가 각각 1510년, 1511년, 1515년에 정복되었고,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우위를 확립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70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럽에서 이러한 혁신이 가능했던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여러 면에서 부족했던 사회, 문화, 자연 환경 덕분(?)이었다. 오랜 기간 유럽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후진 문명이었고, 다른 지역으로 수출할만한 품목도, 자원도 부족했다. 다만, 그들에게 컸던 것은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결국 이들은 '군사력'을 통해 자신들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중세 유럽의 만성적 취약성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선 유럽의 인구가 많지 않았다. (결코 1억 명 이상을 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자기 민족의 피, 같은 기독교도의 피로 제 손을 더럽히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각국의 군대가 모여 연합군을 형성하면, 결과는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
지중해식 항해술과 북방식 항해술 사이의 더 긴밀한 연계, 나침반의 사용과 대서양 지역에서 원양 항해술의 발전, 14세기 중반 이후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역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유럽 인구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갤리선의 노잡이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현실, 15세기를 지나면서 교역의 확대 등 이러한 요인들이 총체적으로 선반 건조술, 특히 범선 건조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87
유럽의 팽창 과정을 기술할 때 군비에서 유럽의 우월성은 일반적으로 정적인 현상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사실, 15세기 첫 팽창의 물결 이후 유럽의 군비 생산 능력은 질적인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나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로 인해 비유럽권의 사람들은 유럽의 팽창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극도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영토 방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게 된다. 특히 대포 제작에서 유럽의 진보는 전함의 건조와 해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략과 기술의 주목할 만한 발전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85
그렇다면, 왜 서양이 아닌 다른 지역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는가? 사실, 당대 중국, 인도, 이슬람 문명은 결코 서양에 비해 뒤떨어진 기술(機術 technoloogy)을 보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분야에서 그들은 앞선 사회 제도와 인프라를 갖고 있었고 매우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치폴라에 따르면 문제는 바로 '큰 문제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일례로 '흑사병' 등 질병과 '30년 전쟁'과 같은 전쟁이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에 이들은 '자본'에 의존하기보다 '노동'에 더 집중했다. 그것은 비록 '효율적'이지는 못했겠지만,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했기에 서구와 같은 변혁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이슬람의 패배는 해전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과 전략에서 주로 기인한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적인 베네치아와 몰타기사단 세력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투르크는 대서양 세력이 거둔 해상 혁명의 함의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근대가 이미 시작되었얼 때도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인력에 크게 의존했다. 충각으로 들이박고 적선에 올라타 싸우는 구식 전술을 고수했고 전력의 핵심은 언제나 갤리선이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21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술적 지원과 풍부한 원자재, 중국인들 자신의 재주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만족스러운 수준의 대포를 생산하지 못한 원인은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다. 중국인들이 왜 우수한 대포를 만들어내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중국이 왜 산업화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과 문화적 자부심, 제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40
기동전에서 야포의 역할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기 위해서 맘루크 왕조는 기병대의 봉건적 특권과 역할,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와 지배 계급으로서의 위신을 희생해야만 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봉건적 사회 구조의 해체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전제하지만 맘루크 왕조는 여기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기에 앞서 "세계관이 전면적 변화, 낮은 수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겪어야 했다. 강력한 사회, 문화적 요인들이 서양의 기술을 흡수하고 전파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6
안정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기득권들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들에게 바람직한 개혁의 임계점(臨界點, Critical point)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하되,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선'이 된다. 그런 면에서 가진 것이 없었던 유럽의 기사들이 자신들의 롱소드(Longsword)를 내려놓는 것은 풍요로웠던 이슬람 전사들이 샴쉬르(Shamshir)를 놓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쉬웠으리라.
르네상스 초기 유럽의 기사들은 화기에 대해 맘루크의 기마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품었으나 1500년에 이르자 유럽의 현안들은 점차 화려함보다는 조직화를, 용맹성보다는 효율성을 선호하는 새로운 사회 집단이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들은 기계와 야금술에 관심을 보이며 그 수가 증가하고 있던 무수한 장인 계급예 의존할 수 있었다. 신기술 개발에 유리한 초기 요인들이 지속적으로 작용하여 후속 발전을 강력하게 추동했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6
저자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서양의 전투 무기들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지만, 이를 운용하는 전술(戰術)의 변화까지는 가져오지 못함을 지적한다. 19세기 중국의 정치가는 아편전쟁(鴉片戰爭 Opium Wars, 1839 ~ 1842)에서 패배에서 드러난 서구와의 차이를 하부구조에서 찾지만,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내세운 '양무 운동(洋務運動)'의 실패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반증이 되었다.
19세기 펑구이펀 馮桂芬은 이렇게 썼다. "천지가 생겨난 이래 가장 크나큰 분노가 뜼이 있고 기개가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끓어오르고 있다. 그들의 머리칼이 곤두서 모자가 들려 올라갔다. 이것은 오늘날 지상에서 가장 큰 나라, 수천, 수만 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나라가 한줌의 야만인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들은 수가 적지만 강한가? 어째서 우리는 수가 많지만 약한가?... 우리가 이 야만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단 하나, 튼튼한 배와 효과적인 대포다."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0
장즈둥 張之洞을 비판하며 옌푸 嚴復가 지적한 대로 "중국의 학문은 그 나름대로의 근본과 기능이 있고, 서양의 학문도 그 나름대로의 근본과 기능이 있다." 기술은 과학에 뿌리를 두고 과학은 철학에 뿌리를 둔다. 자신들의 철학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중군인들은 결코 서양의 과학을 배울 수 없었다.(Mu, Hundred Flowers, p94)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30
<대포, 범선, 제국>의 저자 치폴라 역시 이러한 주장을 펼친다. 소프트웨어(software)를 갖추지 못한 하드웨어(hardware)의 변혁은 단순한 모방에 불과하며, 제국주의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화(西區化)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자, 비극이라는 것이 저자의 맺음말이다.
이 책의 역사적 분석이 틀리지 않다면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민족은 "문명화" 정도와 상관없이 우위를 점하게 되어 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시대"는 이제 갑작스레 끝이 났다. 서양의 우위에 들고일어난 "저발전" 세계는 서양 기술 습득의 중요성을 온전히 강조하는 듯하다. 서양의 지배는 우월한 기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는 이해할 만하지만 그 역시 비극적 함의를 띠고 있다. 서양의 테크닉을 획득하기 위해 비유럽 민족은 더 심오하고 전반적인 "서양화" 과정을 거쳐야 했거나 거쳐야 한다. 실로 역설적이게도 서양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그들은 서양식 사고와 행동 방식을 흡수해야만 한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77
사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보다 소프트웨어에 가까운 '시계'에서 다루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자의 다른 저작인 <시계와 문명>의 리뷰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의 한 가지만 챙기고 리뷰를 갈무리하자. 그것은 '서구와 같은 발전'이 결코 절대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남겨진 수많은 문명의 자취 속에서 최근 이뤄낸 서구 문명의 성취를 다른 문명과의 본원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초창기 야포에 대한 투르크 인들의 태도나 초창기 갤리언선에 대한 베네치아 인들의 태도는 일반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 증거로 쉽사리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혁신 기술은 처음 선을 보일 때, 실질적 이점보다는 미래의 발전 잠재력 때문에 가치가 있으며 후자의 요소를 평가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노릇이다. _ 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p157
G. F. 허드슨이 표현한 대로 "유목 세력이 몰락한 것은 그들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응 능력 이상으로 전쟁 기술이 진화한 데 기인한다. 17, 18세기 타타르 족은 아틸라와 바이안,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군대에 그토록 엄청난 위명을 안겨준 특징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화승총과 대포가 전쟁에서 점점 더 자주, 또 널리 사용되는 것은 기마병에 의존하고 새로운 장비를 갖출 경제적 자원이 없는 세력에게는 치명적이었다." - P174
유럽의 해상 확장은 산업 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은 여러 주변 여건 가운데 하나이다... 반대로 산업 혁명이 유럽의 팽창에 탄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산업 혁명은 유럽 인들의 인구수를 절대적 의미에서 또 비유럽의 인구와 비교하여 상대적 의미에서 모두 증대시켰다. 그리고 유럽 인들에게 더 강력한 무기와 인간에게 불리한 자연력을 통제할 수 있는 효율적 기술을 제공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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