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소설 속에 잠시 등장할 수 있다면 소설 속 인물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토지 5>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주어진 주말 미션은 소설 속의 인물에게 조언을 하는 과제다.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하나. 그보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 역시 한 명의 인물로 육화(肉化)될 필요가 있었기에,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가 중요했다. '행인3' 역할로는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소설 시간 밖의 존재가 소설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일. 그것을 먼저 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한 사례의 한 인물을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마니피캇(Magnificat).



[그림] 마니피캇(출처 : 위키백과)

 

 천사는 마리아에게로 가서 "기뻐하소서, 은총을 받은 이여. 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며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그는 크게 되어 지극히 높은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_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루카복음> (1:26 ~ 32), p284


 <교부들의 성경주해>에서 수도승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 '시간 밖의 존재가 시간 안으로 들어온 신비'라고 말하는데, 소설 밖의 독자가 소설 안으로 진입하는 사건 역시 이러한 신비에 부합하지 않을까. 기꺼이 천사 가브리엘(Gabrielus)의 캐릭터를 가져온다. 인물과 역할을 선정했으니, 이제는 두 개의 과제가 남는다. 누구한테 나타날 것인가와 무슨 예언을 할 것인가.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p20)....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_ 박경리, <토지 6>, P21/620


 소설 내용 상 길상과 서희가 이제 곧 맺어지는 시점에 이르렀기에 처음에는 길상 또는 서희에게 조언을 생각했었다.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결혼을 만류하는 조언.  구체적으로 나중에 너희 둘이 결혼해서 둘이 경영하는 길서상회가 돈을 많이 벌게 되지만, 서희는 간도에서 진주로 내려가고 길상은 독립운동하면서 틈이 생길 예정이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또, 길상에게는 너는 나중에 관음탱화(觀音幀畵)를 그려야 하고, 독립운동도 할 사람이 처자식을 어찌 돌볼 것인가라는 조언을, 서희에게는 너는 결혼보다는 조씨 가문에 대한 복수가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느냐, 결혼을 수단으로 생각하면 배우자가 불행해진다. 그럼 서로 겉돌게 되니 잘 생각해라... 이런 조언을 하려다 보니 가브리엘이 아니라, 맥베스의 세 노파/세 유령 이 되버린 듯 한다. 불행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 괜히 서희를 자극해서 더 폭주할 수 도 있을 듯하고,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주 길상과 서희는 다른 챌린저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을 것 같아서 이들에게 조언하는 마음은 거둔다.


맥베스 [마녀들에게] 말해라. 너희는 누구인가?

마녀1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성주 만세!

마녀2 맥베스 만세! 코더의 성주 만세!

마녀3 맥베스 만세! 훗날 왕이 되리라. _ 세익스피어, <맥베스>, 1막 3장, 645


유령1 맥베스, 맥베스, 맥베스, 맥더프를 조심하라. 파이프를 조심하라. 이상이다.

유령2 잔인하고 용감하고 담대하라. 인간의 힘을 우습게 알라. 여자 몸이 낳은 자는 맥베스를 해하지 못하리라.

유령3 사자의 용기를 지키고 오만하며, 누가 안달하는지 누가 속이 상하는지 반역자가 어디 있는지 걱정을 마라. 맥베스는 절대로 패하지 않으리라. 울창한 버넘 숲이 던시네인 산으로 그에게 맞서 오기 전엔. _ 세익스피어, <맥베스>, 4막 1장, 665


 다음으로 마음에 끌리는 인물은 월선이다. <토지> 전체에서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안쓰러운 여인.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주는 이가 있기에 결코 불행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여인. <토지> 전체에서 마니피캇과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월선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월선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월선이 이곳으로 옮긴 것은 병이 무거워지면서 국밥장사를 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월선은 자기 병이 그렇게 중병이 아니며 장사 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것이 다 홍이 때문이라는 것은 뻔한 일.(p156)... 영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도 여러 번 보내었고 월선이 치명적 병을 앓고 있으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_ 박경리, <토지 8>, p158/654


 의사가 왔어도 병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진통제를 쓰는 것, 보혈주사를 놓아주는 것이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순 없었지만 의사가 다녀간 후면 월선은 반드시 홍이를 찾았다. 고통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용이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었다. _ 박경리, <토지 8>, p372/654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 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임자,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p378)...  시신이 놓인 방에서 물러 나려다 홍이 뒤쫓아왔다. "옴마!" 가슴 위에 모아놓은 뼈뿐인 손을 잡고 다시. "옴마!" 홍이 계속하여 옴마! 옴마! 부르며 방에서 뛰쳐나간다. _ 박경리, <토지 8>, p379/654


 아무래도 머지 않아 월선은 손을 쓸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죽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수태고지(Annunciation)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예언하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예언한다는 것이 사뭇 마음에 걸리지만 수태고지 이후 시메온/한나 예언자의 고통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월선에게는 평안한 죽음을 약속하며 마음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듯하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아기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말했다. "두고 보시오. 이 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며 또 그는 배척당하는 표징이 됩니다. 당신의 영혼을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심중의 생각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_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루카복음> (2:34 ~ 36), p293


 비록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려 고생하지만, 주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투병 생활을 하고 곁엔 마음으로 따르는 아들 홍이가 지켜주며, 임종 순간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용이가 돌아와 곁에서 삶을 마무리 한다는 이야기. 결코 죽음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월선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월선의 모습은 내게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복음사가는 예수 탄생 예고의 장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등장시키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천사는 또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뜻모를 말로 정숙한 마리아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암브로시우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이 기적적인 출생에 대해 마리아가 아니라 가브리엘이 마리아 앞에서 두려워해야 마땅하다(테오파네스) _ 아서 A. 저스트2세, <교부들의 성경주해> <루카복음서>, p68


 독서챌린지 과제로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새삼스럽게 월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 참 가슴아프면서도 곁을 지켜주고 싶은 인물. 이제 얼마 뒤면 월선의 죽음이라는 정해진 소설 속의 시간은 다가오겠지. 책을 몇 번을 읽더라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순간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행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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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9-12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겨울호랑이님 토지가 재독이세요?? 줄거리 다 아시네용~ㅎㅎ
저도 길상이와 서희 결혼은 반대입니다. 부부로서 행복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제 맘 속 최고 인물도 월선이에요~!!^^

겨울호랑이 2021-09-12 06:58   좋아요 1 | URL
이번에 토지 독서 챌린지 신청하고 급하게 선행학습을 했어요 ㅋ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하고 챌린지 기간 중 세세히 문장을 들여다 보는 중입니다. 붕붕툐툐님 말씀을 들으니 제 조언이 지지를 받는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장대가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길, ‘한 마음으로 1백 명의 주군을 섬길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정치를 행하면서 단정하고 공평하게 했으며, 상대를 대하면서 예로써 하니, 후회하거나 인색하다고 여길 일은 이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총명함과 어리석음, 장점과 단점이란 또한 재주이니 쓰임새가 많고 적은 것일 뿐입니다."(p15/90) - P15

"유가·법가는 같은 가지지만 파(派)가 나뉜 것이고, 명가(名家)·묵가(墨家)는 조목(條目)에서 나뉘었으니, 부모를 받들고 황상을 높이는 것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차이가 없습니다."(p40/90) - P40

무릇 부처는 겸손하고 낮춤으로써 스스로 기르고 충성과 경건함을 정도(正道)로 삼는 것인데, 어찌 사배(四輩)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부모를 예우함이 소홀하고 이마를 땅에 대고, 기랍(耆臘, 나이 많은 승려)에게 절을 하면서 만승에게 몸을 곧게 합니까!(p40/90)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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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디킨스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 경험이 녹아든 인물 올리버.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 어두운 구빈원에 버려졌으나, 타고난 순수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올리버와 같은 동아줄을 타지 못한 같은 시대 수많은 고통들이 함께 소멸되지는 못했기에, 소설을 읽으며 올리버 개인의 행복이 아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또다른 올리버, 낸시가 멍크스와 페이긴과 공존하는 시대의 어두움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만의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도 의미있게 다가온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점인데, 바로 가난한 사람들은 구빈원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빈원은 공공오락을 제공하고 공짜 술집이자 1년 내내 아침, 점심, 저녁, 차를 얻어먹는 곳이니, 놀고먹기만 하고 일하지는 않는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은 낙원과도 같았다.(p48/1060)
- P48

그래서 이사회의 신사들은 가난한 시람들이 구빈원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든가 아니면 바깥에서 빠르게 굶어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규칙을 세웠다.(p48/1060) - P48

비록 이와 같은 법정에서 재판을 주재하는 주재자가 우리 여왕 폐하의 백성, 특히 가난한 하층민들에 대해 자유와 명예, 인격, 심지어 목숨에 이르기까지 독단적으로 즉결하는 권력을 행사하지만, 그리고 비록 이렇게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공간 안에서 천사들마저 눈물로 앞을 가릴 만한 아주 환상적인 속임수들이 날마다 행해지지만, 이 모든 상황은 대중들에게 가려져 있어서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려지지 않았다.(p209/1060)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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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한 사람이 그 몸을 구제하는 길은 세상이 어지럽지 않으면 말미암을 수 없는 것이다. 노상은 세상을 어지럽히려는 마음을 가지고 평안한 날에 이를 실행하였으니, 그 실패를 맞게 되는 것 또한 마땅하다."(p30/153) - P30

"옛날에는 덕스러움과 의로움은 존경받을 수 있어서 지고 다니며 파는 것도 가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마땅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세족(世族)이라 하여 쓸 수가 있겠는가! "(p85/153) - P85

어리석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수전(二銖錢)을 주조하면 제멋대로 새로운 작은 동전을 만들어서 관에서는 궁핍함을 해결할 수가 없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간사하고 교활함이 크게 일어나 천하의 화폐는 거의 없어질 때까지 부서지고 깨질 것입니다. 헛되이 엄하게 금지하지만 이익이 많기 때문에 근절시키기가 어려우니 1~2년이 지나지 않아 그 폐단을 다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큰 동전이 바뀌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아울러서 최근에 새롭게 금지한 것도 두려워하고 있으니, 시정(市井)에서는 반드시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p60/153)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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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의로움을 가지고 은정을 잘라내시고 작은 것을 차마 못하는 마음을 덜어내시는데, 이같이 아니하면 마땅히 처음에 품고 있었던 것 같이 대우하시고 번거롭게 의심하는 말을 하지 마시옵소서. 일은 기민한 것이어서 비록 비밀에 부치지만 널리 알려지기 쉬운 것이니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겨서 천년(千年)의 웃음거리를 얻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p15/81) - P15

원숙이 말하였다.
"머무르는 곳이 의심할 수 없는 땅인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는 걱정을 하겠습니까! 다만 아마도 성공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늘과 땅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며 커다란 재앙이 또한 뒤쫓아 돌아올 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p20/81) - P20

무릇 법 가운데 옛날에 바꾸었으나 사람들의 마음에 각박하다면 곧 순순히 따를 수는 없는데, 예에서 실패하기에 이르러서 몸에 편안하면 반드시 급히 받들었을 것입니다.(p45/81)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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