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타이완을 원조한 배경에는 타이완을 반공反共 동맹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타이완이 문화, 교육, 일상생활에서 미국식 삶의 가치를 받아들여 모든 영역에서 미국을 추종하고 미국이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의 상황을 변화시켰다. 미국은 원래 중국의 국공 분쟁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지만, 한국전쟁이 벌어진 틈을 타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제7함대로 타이완해협을 봉쇄했다. 미국이 중화민국(타이완)에 대한 원조를 재개함으로써 국민당은 오늘날까지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컨대 타이완 경제 발전의 핵심 요인은 미국, 일본, 타이완의 트라이앵글 무역 순환 네트워크를 통해 외자를 유치하고 세계 시장을 개방한 것입니다. 사실 타이완 내의 수많은 중소 수출기업은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과 보호를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공기업이나 대기업보다 유연한 경쟁력과 조직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수출 위주의 대외 무역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K68A1)

 [데모크리토스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것들은 필연(ananke)에 따라 생겨난다. 회오리가 모든것들의 생성의 원인(aitia)이기 때문인데, 그는 그것을 필연(必然)이라고 부른다.(p555)...  심플리키오스(DK68B167) 데모크리토스가 온갖 형태(원자)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왔다(apokrithenai)고 말할 때, 그는 저절로(t'automaton)와 우연(偶然)(tyche)으로부터 그것을 산출해 내는 것 같다. _ 김인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 p559


 우연과 필연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 ? ~ 380 ? ) 원자론의 두 주제다. 그리고, <토지>에서도 우연과 필연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토지 2>와 <토지 3>에서는 최치수와 윤씨 부인의 잇달은 죽음이 서희를 낯선 간도로 몰았다면, <토지 8>에서는 '간도댁' 월선의 죽음 이후 서희는 진주로 이주한다. 다만, 앞선 사건이 서희의 간도 이주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후자는 우연적 사건일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에게 모든 물리적 변화는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연'은 무엇일까.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에 의하면 '우연'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虛狀)에 불과하다. 인간에 의해 우연으로 간주되는 모든 일 안에는 법칙성이 있다는 마르크스의 해석을 따라간다면, 월선의 죽음 역시 단순히 우연적 사태로만은 볼 수 없지 않을까.


 데모크리토스는 현실에 대한 반성 형식으로 필연성을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가 모든 것을 필연성에 돌렸다고 말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자의 소용돌이(Wirbel)를 데모크리토스적 필연성이라고 적고 있다.(p42)... 인간은 스스로 우연이라는 허상(Scheinbild)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 이것은 그들 자신의 혼돈(Ratlosigkeit)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연(Zufall)은 건강한 사유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_ 칼 마르크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p43 


 월선의 죽음은 이 용과 이 홍, 두 부자(父子)와 홍이 어머니 임이네를 갈라놓는 직접인 계기가 된다. 그리고, 월선 아지매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져 있던 길상은 구천(김환)과의 만남을 통해 서희와 이별하고 간도에 남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길상의 결정이 결국 <토지> 완결에 이르기까지 차갑게 식어버린 부부 사이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월선의 죽음은 단순한 한 인물의 퇴장이 아니라, <토지>에서 '간도 시대'의 종결이라 생각된다. (연장성산에서 '평산리 시대'의 종결은 최치수의 죽음이 아닌 윤씨 부인의 죽음이라 여겨진다. 서희는 '최치수의 딸'이기보다는 '윤씨 부인의 손녀'이기에.). 그런 점에서 '월선의 죽음'은 <토지>에 있어 하나의 필연이 아닐까.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그것은 생명의 유한(有限)이다. 죄(罪)에 얽매인 것 아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이 없는 유한, 역설이라면 기막힌 역설이겠으나. 어느 시기까지 유지될 안정(安定)일지는 모르지만 길상은 서희와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담백한 상태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죽 끓듯 하는 환의 그 반역의 피조차 돌연 잠들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리 고요한가. 고요하게 고요하게 네 개의 발은 내디뎌지고 있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8> , p454/510


 "전 여기 있을 테예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간단 말입니다."

 "아버진 볼일 보시고 뒤따라 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인 것 저는 알아요, 아버지만 내버려두고 가는 거 아닙니까!"

 서희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된다.

  '오냐! 나 당신 용서하지 않을 테요! 저 어린 것 가슴을 멍들인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요! 결코, 결코!' _ 박경리, <토지 8> , p492/510


 간도 시대의 종결은 한 인물의 죽음과 함께 한 가족의 헤어짐으로 성징된다. 서희와 길상의 이별이 그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고, 다시 둘로 돌려놓았는가. 그 전에 먼저 <토지인물사전>을 통해 길상과 서희의 삶을 다시 바라본다. 


 

김길상(金吉祥)... 서희의 절대적인 조력자가 된 후, 하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 윤씨부인이 준 정에 대한 보답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 철저하게 물들어가는 서희에 대한 안타까움과 회의를 가지게 된다... 젋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면서는 서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주종관계에 의한 갈등, 봉순에 대한 그리움과 죄의식에 괴로워한다... 마차사고를 계기로 결국 서희의 결혼 제의를 수락하여 환국과 윤국 두 아들을 둔다. 그러나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을 가졌던 서희가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로만 느껴질 정도로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결국 서희의 귀향에 동행하지 않고 간도에 남아 그곳의 독립운동 조직에 합류하여 신분적 이질감을 극복하려 애쓴다.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명분보다는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선택하려는 그의 의지는 계속적인 갈등으로 남는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p40/214


 최서희(崔西姬)... 조준구에게 복수하고 평사리의 땅을 되찾기 위해, 윤씨부인에게 비밀리에 받은 금괴와 은괴를 자본으로 토지 매입과 장사를 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은다. 이 과정에서 매점매석과 친일도 서슴지 않으며, 이상현의 연모를 거절하고 길상과 신분을 넘어선 결혼을 하여 환국과 윤국 두 아들을 얻어 대를 잇는다. 공노인과 임역관의 중개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진주에 정착하지만 복수의 허무함에 빠진다... 만주에 남은 남편의 길상의 뜻을 받아들여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은밀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를 엄폐하기 위해 최씨 일문의 기반을 다지며 진주지역의 유지로서 일본인들과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막대한 재력과 미모, 천성적인 위엄, 능란한 일본어 실력과 독서로 다져진 지식, 더욱이 근화방직의 사장 황태수와 사돈이 됨으로써 이런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놓는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p188 /214


 마차 전복 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함께 넘어갈 뻔 했던 이들은 이를 계기로 결혼한다. 다만, 길상이 꾼 귀마동(歸馬洞) 꿈은 이들의 결혼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토지 6> 꿈속의 귀마동) 미루어 생각해 보면, 길상은 어려 고아가 된 서희에 대한 연민을 '마차 사고' 를 통해 죽음(死)과 삶(生)'을 겪으면서, 서희와의 결혼을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지. 길상은 '우연'적 상황'을 '인생의 정해진 길/법칙'으로 생각하고 결혼했지만, 자신 안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걸어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길상-서희' 결혼을 순간적인 감정이 가져온 우연의 비극으로 볼 수도 있겠다.


 적어도 길상에게 서희라는 인물과의 결혼은 안정된 지위와 부를 가져다 주긴 했지만, 그가 감당하기 무거운 짐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반면, 서희에게 길상과의 결혼도 같은 의미였을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하인과 결혼할 정도로 기존 질서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가문(家)을 위해 나라(國)에 대한 마음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 서희임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잘 드러나지 않는 속내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해봐야겠다.


 결혼은 여성에게 안정된 지위와 남편의 보호를 보장해 줄 것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재정적인 후원자 겸 다정한 동반자를 얻을 것이다. 한 신심 깊은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동료"가 될 것이다.(p189)... 이 시기(셰익스피어 시대) 영국인들의 결혼관이 유럽 다른 나라들의 결혼관과 달랐던 점은 최선의 결혼이란 동반자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_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 p190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영국에서 여성 문제는 정점에 도달했다.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소설과 희곡들, 공적인 연설과 사적인 대화들은 신여성(New Woman)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었다. 신여성의 특징은 높은 교육 수준과 독립성,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남성과 여성이 지켜야 할 관습적인 영역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는 성향이다. _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 p403


 여지까지 읽으면서 길상과 서희 모두 전형적인 인물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문장에 담긴 신(身), 가(家), 국(國)에 대한 길상과 서희의 생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자신의 길을 결정한 길상이 '신(身)'을 선택했다면, 서희는 '가(家)'를 더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길상은 개인주의자, 서희는 공동체주의자의 면을 보인다. 반면, 독립운동을 하는 길상과 가문을 위해 친일도 서슴지 않지만, 독립운동도 후원하는 서희를 통해 애국지사와 무정부주의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달랐기에 그들의 삶은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런 면에서 그들의 별거는 필연적인 결과로 생각된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 서희를 바라본다. 강한 눈길이었다. 서희는 이같이 강한 길상의 눈을 본 일이 없다. 아니 강한 사나이의 그러한 눈길을 본 일이 없다.

 '나는 너를 소유했지만 넌 나를 소유하지 못할 게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눈 같기도 했었다. 그 강한 눈을 서희는 강하게 받는다. 미동하지 않고 받는다. 그러자 길상의 눈에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밀려왔고, 희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비로소 서희는 그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희는 싸움이라 생각했었지만 그쪽은 그것이 아니었다. _ 박경리, <토지 8> , p475/510


 '월선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가져온 크고 작은 여파는 간도에서 자리잡던 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풍파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풍파 속에서 <토지>안의 또다른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생각하며 '우연과 필연'으로 한 주간의 <토지>독서를 갈무리한다...


PS. '우연'과 '필연'에 대한 해석은 에피쿠로스 해석은 데모크리토스와 정확하게 대척점에 있다. 즉,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것은 우연적으로 생겨나고, 자의에 의존한다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들여다 보면 '적대적 공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길상과 서희는 서로 사랑했기에, 이러한 '애증(愛憎)'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1-10-30 14: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토지의 문장, 역시 정말 좋으네요.
전집 읽기 내년엔 시도할까 합니다 ^^
아내의 역사, 는 전부터 담아 두곤 미뤘는데 호랑이님 페이퍼로 다시 보네요. 찜!

겨울호랑이 2021-10-30 14:38   좋아요 3 | URL
대가의 작품이라, 때로는 굵은 붓으로 시대를 담아내는 호방함도, 때로는 가는 붓으로 인물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묘사하는 섬세함도 <토지> 안에 함께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프레이야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
 

당시 여러 신하들은 대부분 형주 사람들이어서 모두 말하였다. "주홍정 등은 동쪽 출신이라서 속마음으로 동쪽으로 내려가길 원하지만 아마도 좋은 계책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주홍정이 마주대고 그 말을 자르면서 말하였다. "동인(東人)이 동쪽으로 가길 권하는 것이 훌륭한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 서인(西人)이 서쪽으로 가려고 하면 어찌 훌륭한 책략이 된다는 것이오?"
황상은 웃었다.

황상 또한 천문에 밝아서 초(楚)에 재앙이 있을 것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화(禍)와 복이 하늘에 있거늘, 그것을 피한들 무엇이 이익이 되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육법화가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과실을 얻으려면 의당 익을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흔들지 않아도 스스로 떨어진다."

태자는 정신이 맑고 단정하여 후경의 무리들에게 일찍이 뜻을 굽힌 적이 없었는데, 가까이하는 사람이 그것을 가만히 물어보자 태자가 말하였다.
"도적이 만약 일에서 올바르게 한다면 반드시 나를 죽일 필요는 없겠고, 내가 비록 업신여기고 꾸짖어도 끝내 감히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죽임을 당할 때가 온다면 비록 하루에 백 번 절을 해도 또한 이득 될 것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동의 종말 - 개정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기적인 세계적 경기 침체 없이 제3차 산업혁명은 계속 진행될 것이고 생산성을 증진시키며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신기술로 인한 과잉 노동력의 일부에게 약간의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세계 시장 역시 계속 팽창할 것이다. 그러나 과잉 생산을 충분하게 흡수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팽창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적 실업의 증가와 구매력의 감소는 계속 세계 경제를 괴롭힐 것이고 정부가 자국 문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침해할 것이다. _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 p367/440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 )이 1995년에 전망한 미래를 2021년 현실에 비추어 보면 장기적인 세계적 경기 침체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0년 주기로 닥치는 경제공황이 오히려 그의 전망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예언대로 미래가 진행되고 있다고 느껴지기에 새삼스레 리프킨의 혜안이 놀랍게 느껴진다.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는 시대, 노동가치설이 무력화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제3차 산업혁명과 거의 노동력이 필요 없는 세계로의 역사적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실리콘에 기초한 새로운 문명화로의 길을 열어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과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이로부터 소외될 것이고, 이들 앞에는 과연 어떤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_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 p365/440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이 필요 없어진 사회‘에서 경제 체제의 재구축을 말한다. ‘제조‘를 기반으로 하는 ‘사(私)적 경제‘ 대신 ‘서비스‘를 바탕으로 하는 ‘공(公)적 경제‘로의 노동력의 재배치. 리프킨은 새로운 사회에서 정부의 역할을 ‘제3부문의 변혁‘으로 분명히 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리프킨의 주장은 비정규직 철폐, 공공일자리 확대 등과도 연계시켜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재원(財原)이다. 공공부문 강화를 위해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사회적 합의없이 조달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리프킨의 ‘제3부문의 변혁‘이 이루어지기 쉽지 않아 보인다.

비효율적인 공공부문의 강화 대신 효율적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 사회주의 논란 등으로 정책 실현이 늦춰지는 사이에도 자동화는 꾸준히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불평등은 심화되고, 정치적으로 극우화되는 성향은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닌지. 노동의 종말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정부를 만들기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다가오는 하이테크 시대에 정부는 상업적 경제의 이해보다는 사회적 경제의 이해에 부합되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를 재구축하기 위한 정부와 제3부문과의 새로운 파트너십의 강화는 모든 국가에 있어서 시민적 생활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향후 가장 긴급한 과제들은 빈민 구호, 기초 의료 서비스 제공, 청소년 교육, 임대 주택의 건설, 환경 보호이다. _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 p327/440

공장이 노동자들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동안, 거대한 제3부문은 새로운 고용의 가능성을 제공해 왔다. 이것은 교사와 변호사, 간호사와 의사, 가정부와 보모, 정부 공무원과 교통 경찰, 사무원, 타이피스트, 수위, 판매원 등 서비스 고용 영역의 확대를 의미한다. _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 p6/440

<노동의 종말>에서 우리는 탈(脫)노동 사회를 바라본다면, <소유의 종말>에서 우리는 탈(脫)소비 사회를 확인하게 된다. 기존 사회에서 우리가 소비를 통해 갑(甲)의 입장에 서고, 노동을 통해 을(乙)의 위치에 놓인 관계를 유지해왔다면, ‘소비-노동‘의 종말은 개인이 사회와 맺고 있던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받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위에 ‘종말적 사태‘를 바라봤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위기 안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의 종말은 문면화에 사형 선고를 내릴 수도 있다. 동시에 노동의 종말은 새로운 사회 변혁과 인간 정신의 재탄생의 신호일 수도 있다.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 p371/4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