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소설 1 - 개정증보판 문지 스펙트럼 개정판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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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작용에서 일어나는 사건 즉 무의식을 자주 등장시킨다. 남자 여자, 사람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집요한 눈. 아주 짧은 길이의 소설, 손바닥소설, 장소설인데 긴 이야기가 숨어 있다. “톱과 출산” 과연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의 환영, 자신의 분신, 자신의 이중인격을 본 자는 죽는다."
제2의 내가 그녀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녀의 무기는 톱 모양이다. 나무꾼이 거목을 베어 쓰러뜨리는 폭 넓은 톱 같은 칼이다.
어느 틈엔가 나는 소변을 잊고, 제2의 나와 하나가 되어 그녀와 칼날을 맞부딪치고 있다. 그녀의 화려한 장식 같은 무기를 막아낼 때마다 나의 검이 그녀의 칼날에 쩡그렁 맞물린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톱 모양 검의 칼날이 들쭉날쭉 망가지고 말아, 완전히 진짜 톱이 되어 있다. 분명히 이런 말이 떠오른다.
"이로써 톱날이라 이름하노라."
즉 이 결투로 톱의 발명에 이르렀다니 우습다. 결투이건만 나는 멍하니 활동사진의 난투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칼부림하고 있다.
이윽고 나는 마당 한가운데에 벌렁 나자빠져 그녀의 톱을 두 발바닥으로 꽉 움켜잡은 채, 옴짝달싹 못하는 그녀를 희롱하고 있다.
"난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힘이 없어요."
과연! 그녀의 아랫배에 넉넉한 주름이 후줄근하니 늘어져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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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23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꿈 속 사건이라서 그런지 읽으면서도 기분이 묘해집니다...
부드러움의 출산과 공격적 날카로움의 톱. 대비. 무섭기도 하고요

프레이야 2022-05-23 12:01   좋아요 2 | URL
바기나 덴타타 생각나지 않으세요^^

페크pek0501 2022-05-24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환영, 자신의 분신, 자신의 이중인격을 본 자는 죽는다.˝- 본문 중.
자기와 닮은 사람이 세상에 있고 그 닮은 사람을 보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요?

저도 이 책을 갖고 있는데 표지가 다른 걸로 보아 개정판 나오기 전에 구매한 책 같아요.
아무리 짧은 소설이라도 수 백 편을 썼다는 작가들을 보면 너무 위대해 보입니다.
손바닥 소설, 프레이야 님도 파이팅!!!

프레이야 2022-05-24 17:14   좋아요 2 | URL
그런 말 있었나요? 무서워라 넵 페크님 이전 것 양장본 저도 갖고 있어요. 유숙자 번역 똑같은데 두 권으로 나눠 개정판이 나왔더군요. 목차는 좀 달라요. 작품도 있고 없고 좀 다른지 꼼꼼히 비교해보진 않았네요. 고맙습니다!

mini74 2022-05-2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톱과 검이라 우와 특이하고 묘하네요.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보게 되는 ㅠㅠ ㅎㅎ

프레이야 2022-05-25 10:28   좋아요 1 | URL
저도 배를요 ㅎㅎ 미니 님
날이 더워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2022-05-25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8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십 대 남자가 하는 말에 화들짝 놀라 분개했던 기억이 여러 번 있다. 그중 세 건은 화를 참지 못할 정도였다. 몇 년 전 뉴스에 났던 K가수의 지저분한 사건을 말하게 된 건 어딘가 바람쐬러 차를 타고 나가서였다. 노래를 잘하고 피아노도 잘치고 평소 유머러스하여 좋아했던 가수였다. 그 사건이 있기 전에는. 당시 그는 나이가 한참 연하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 사건에 대해 광분하니까 남자는 그런 장소에서 그런 일을 하는 여성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한 게 범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인 A와 P의 위력에 의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분통터지게 했다. 피해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철벽이었다. 가장 최근에 들은 말은 워딩이 대략 이렇다.(정치인 여성이 낀 식사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다.) "진보는 낭만주의에서 못 벗어나는 게 문제라고, 사랑이라 생각하고 한 일인데그렇게 안 받아들여졌다고......." 말이냐 말똥이냐 이게. 식탁에 마주앉아 밥을 먹다 더 들을 것도 없이 그대로 폭파하고 말았다. 이전에도 이 두 사건으로 여러번 광분하게 하더니 내 의견을 알면서 또. 공범자 수준이네,라고 말하려다 참고 상대를 착취하는 게 사랑이고 진보냐고 반사했더니 표정이 굳고 공기가 험악해져버렸다. 그 여자들이 우리 혈육이었어도 그런 소리를 할까.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그만 두고 나왔어야지,라는 말은 그 사건의 쟁점이 무엇인지 회피하고 피해자의 탓을 하는 이중가해이다. 화살은 가해남자를 향해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은 개소리.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가 그야말로 무식하거나 평소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 있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 준법정신 강하고 선량하다고 자타가 말하는 남자들 중 많은 남자가 이렇게 생각한다. 여성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 모든 양상은 가부장제 안에서 길들여진 남자다움이라는 당치않은 맨박스에 갇힌 남성에 의해서 자행된다. 반대로 우먼박스라는 게 있다면 그것도 맨박스와 나란히 탈출해야 할 것이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선언한 '뚫고 나가기'처럼. 이 책은 성차별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한다.


또 한 가지 오래전부터 내 안에서 들끓는 화가 있는데 본질적으로 그 원인도 맨박스에 있다는 걸 이 책을 보고 알았다. 성격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하는 말은 귀에 담지 않고 몇 번을 말해도 안 듣더니 같은 내용을 밖의 다른 남자가 말하면 귀담아 듣고 와선 이야기한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이러면 그때서야 아! 못 들은 척. 뭘 제대로 못해서 가르쳐주면 지적한다고 생각하고 안 들을려고 하고 짜증내면서 "내가 알아서 한다"고...  이 책은 분통터지는데 딱히 따지진 못하는 이런 사소한 사례를 적어두어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는 걸 지적한다. 그 뿌리를 알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 무장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바뀌어야 할 사람은 정작 남자다.


맨박스는 남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령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맨박스는 남자다움의 행동 강령에 맞춰 행동하는 이들을 추켜세우는 반면, 기준에 미달하는 행동을 한 이들을 가차 없이 처벌한다. ...... 선한 의도를 가진 대다수 남성들이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고쳐 나가려면 맨박스가 담고 있는 사회적 규범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41쪽)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는 TED강연 "A Call To Men(남성들에게 고함)"으로 유명하다. 책의 내용이 강연에 들어있어서 강연만 들어도 되겠다 싶지만 (중고로) 책을 사서 보았다. 잘한 것 같다. 이 책을 정작 읽어야할 사람은 남자들이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N번방 사건을 비롯해 가정폭력까지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남성들이 악행인 줄 알면서 자행하는 것이다. 알면서 그럴 수 있는 건 여성을 소유물로,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요약하면,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은 남성 중심주의에서 시작했다. 이것은 왜곡된 남자다움을 만든다. 오늘날 남자다움이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라는 시각이라는 세 축을 이룬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이다. 소년에게, 청소년에게 바람직한 남성성을 가르쳐야 하고 세상의(이웃의) 그런 범죄를 보면 나서서 일침을 놓아야 한다. 그들은 남성 이웃집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걸 못 참는다. 그 집단에서 배제된다고 생각하면 행동을 고칠 것이라는 말이다. 폭력과 차별은 종류와 관계없이 사라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성폭력을 없애는 데에는 남성들의 역할이 주가 되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와 의견과 경험을 들어야 한다. 종류가 무엇이든 학대를 멈추려면 피해자의 처지부터 이해야 한다. 여러 억압 행위에는 교차점이 존재한다. 여성폭력 문제를 뿌리 뽑기 위해선 억압 행위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작용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모든 남성들의 전방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저자는 웅변한다. 이웃 남자의 가정 폭력을 보고 직접 찾아가 부드럽지만 강하게 충고한 경험도 이야기했다. 학술적인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해 실제 대담자의 사례를 직접 들려준 대목은 우리 가정과 이웃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내담자 게리와의 대화 중 게리가 한 말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남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뭐냐면요. 여자에 대한 인식과 여자를 대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껏 몸에 깊게 밴 인식을 재정립해야 하는 거죠. 전 남자들이 어떤 이슈에서건 여자들의 의견과 생각, 제안, 충고를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남성만큼 존중할 때 우리는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성차별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덜 남자답게' 느끼는 게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남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 신경질이 난다 또는 여자들에게 화가 난다. 이렇게 반응하죠. 맨박스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반응해도 된다고 가르치거든요." (123-124쪽)


















예전에 사서 읽었던 책이다. <다크 챕터>는 <김지은입니다>에서 저자가 언급한 책이다. 여러 사례를 찾아 읽고 용기를 얻어 어둠의 장을 뚫고 나가려고 한 의지의 과정에서. <김지은입니다>를 남자에게 권했더니 별로 읽고 싶지 않다던 냉소 띤 표정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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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5-20 20: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웅...맨박스에 갖힌건 남성 뿐만이 아니란 사실도 답답해요. 어떤 여성들은 마치 애국자인듯이 남성들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지지하기도 하더라구요
진보의 반복되는 성추문에 기운빠집니다 <김지은입니다>저도 읽어봐야하는데 TED강연이랑 <맨박스> 일단 찜합니다^^

프레이야 2022-05-20 21:27   좋아요 3 | URL
그렇게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것 같아요 남녀 모두.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즘 육아하는 젊은 부부들 책임 막중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 저자도 그걸 강조해요.
여자들 좋은 세상 되었다고 하는 말도 ㅠ
진짜 여성이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어요.
미미 님 이 책은 휘리릭 읽힐겁니다. <김지은입니다>는 생각보다 더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2-05-20 2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를 들어주신것, 넘 공감해요.
적어도 백번은 말했는데 밖에 나갔다가 듣고 온 얘기에 더 열광하는 모습이라니요 ㅠㅠ
한번씩 이런 생각도 해봐요
생각이 갇혀있는 여자들도 많다는 사실을요. 피해자인 여성을 여성이 더 비판히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도 삶을 참 힘들게 만드는 요인같아요^^

프레이야 2022-05-20 20:54   좋아요 5 | URL
맞아요 페넬로페 님 백 번씩이나요 ㅎㅎ
친구들이나 지인들 만나 그런 문제 꺼내면 싸웁니다. 경악해요.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 할 문제 아닐까요.

mini74 2022-05-20 2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감과 분노를 하면서 앍었습니다 정말 여자란 2등 시민인가 그런 생각 들어요. 남성에겐 너무나 너그러운 용서 혹은 남자가 그럴수도 있지 ㅠㅠ 우리 아이들은 그러지 않길 바라는데 돈벌이에 눈 먼 어른들의 편가르기식 이상한 사이트나 유투브, 사상들 등에 의해 물드는 거 같아 그것도 걱정이에요

프레이야 2022-05-21 07:53   좋아요 2 | URL
주변 사람들 중에 가까이 그런 경우가 있으니 더 공분해요. 가까이에서부터 바꾸어나가면 좋겠어요. 가짜뉴스 늘 보내는 나이 드신 분이 있는데 난감합니다. 생각이 딱 굳어져 있어요 ㅠ

햇살과함께 2022-05-20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박스 저도 찜해 놓고 아직 못읽었네요^^
프레이야님의 분통과 분노가 들리는 듯 합니다~!
김지은입니다 책을 보고 저도 여전히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구나 많이 반성 많이 분노했네요.

프레이야 2022-05-21 08:07   좋아요 2 | URL
김지은입니다는 예상 그 이상이었어요. 그래도 아직 허튼소리 많이들 해요 주변에. 제가 너무 흥분했나요 햇살 님 ㅎㅎ 다크챕터 읽고 힘을 얻었다는 김지은 저자의 말에 읽었어요. 권해드려요.

꼬마요정 2022-05-21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우, 정말 이럴 때는 입에서 진짜 불이라도 나오면 좋겠어요. 리자몽처럼요(포켓몬 파이리가 진화한 모습이에요 멋진 용이랍니다). 머리카락이라도 다 태워주고 싶네요ㅜㅜ

제 동기 중에 동갑인 친구는 여자인데 저 상황에서 왜 뿌리치지 않았냐 했구요, 또 다른 동기인 40대 후반 오빠는 위력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아냐, 저 상황에서는 남자도 못 나온다. 당연히 이해된다 이러더라구요. 저 잠깐 그 오빠한테 반함요 ㅎㅎㅎ 제 친구도 그나마 조금씩 바뀌고 있구요. 많은 남자들이 맨박스에 갇혀 있지만 조금씩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 열불 터져도 조금씩 바뀌어가는 세상을 기대해 보아요 우리^^ 책 찜하고 갑니다!!

프레이야 2022-05-21 08:04   좋아요 2 | URL
기대해볼까요 우리 ^^
리자몽 빙의된 거 같아요 제가 ㅎㅎ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에게 집중되어야할 화살이 피해자에게로 몰리는 게 더 문제입니다. 피해자가 오히려 많은 걸 감수하고 죄인처럼요. 다크챕터 권해요 꼬마요정 님.

- 2022-05-21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의 여성혐오 가해 남성들은 심지어 서구식 맨박스조차 없다는 게 참담하네요... 진정 본인들이 역차별의 피해자라 믿으며 당당히 가해를 전시하고 prince적인 ‘남성다움‘ 같은 건 개나 줘버린 지 오래죠. 좋은 글이라 정독했어요.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22-05-22 09:52   좋아요 1 | URL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박스가 아닌가 합니다. 여성다움 남성다움 이런 말 자체에 폭력이 내재하는 게 아닐까 종종 언어가 무섭습니다. 역차별이든, 어떤 차별도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여혐은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죠. 욕망의 반증이구요. 다같이 잘살려면 현재 약자 소수자의 입장에 먼저 귀가 기울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보인 사례를 보면 그 맨박스라는 게 우리 실정과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희선 2022-05-22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나 여자가 그러다니 할 때가 많은 듯해요 그런 말부터 안 해야 할 텐데... 사람으로 지켜야 할 건 지키고 살아야죠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5-22 09:54   좋아요 1 | URL
네. 그런 말부터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쑥 튀어나오려고 하면 얼른 알아채고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언어를 교묘히 꾸밀 순 있겠지만 잠시죠. 결국 드러나게 마련 아닐까요. 작은 것부터 바꿔나가야 하겠습니다.

2022-05-2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2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2-05-24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크 챕터 읽어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두었다가 읽는 시간이 내내 힘들지 않을까 하여 미뤄두었거든요. 읽기에 어떤가요, 프레이야 님?

프레이야 2022-05-24 15:11   좋아요 1 | URL
마음 힘든 걸로는 김지은입니다,에 비할 순 없었어요. 위니 리가 자신의 경험이지만 가해자의 심리까지 생각해서 두 시점으로 서술하는데 꽤 흥미롭게 읽혔어요. 김지은 씨가 이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내용이 궁금했거든요. 그 상황에서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말하는 건 폭력의 피해자를 두세 번 죽이는 말 같아요. 위니 리도 그런 말을 들었겠죠. 벨파스트 숲길을 걷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락방님.

다락방 2022-05-24 15:15   좋아요 1 | URL
제가 다크 챕터를 보관함에 넣어두게 된 게 아마도 <김지은입니다> 를 읽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프레이야 님.
 

오늘도 쾌청. 이제 낮엔 조금 덥다. 안 좋은 날씨는 없다던 존 러스킨의 말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이러다 비나 한번 내렸으면 싶다. 아침에 눈 뜨면 옥상 올라가 늘 새로운 공기 들이마시고 식사 후 운동치료 받고 와 홍차 한 잔 하는데 글벗이 사진을 보내준다. 어제 이기대에서 만난 여러 야생화 중 괭이밥을 유리화병에 꽂고 그 옆엔 차 한 잔. 이 아침의 호사를 전송하며 함께하고픈 마음이 느껴져 마음 따뜻해진다.

내가 마시는 홍차는 어제 받은 책,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집 “차 한 잔”이랑 같이 온 티백. 노란(뭔지는 모르겠지만 금속 소재) 앤티크 티스푼이랑 출판사 선물로 왔다. 티스푼이 궁금했는데, 기분 좋아지는 선물이다. 티팟이 그려진 무광 책표지도 우아하고 순한 질감이 마음에 든다. 나는 책을 손으로 쥐고 만지고 냄새 맡는 버릇이 있다. 번역은 코호북스라는 독립출판사에서 기획과 번역을 맡고 있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는 구원 님.문장이 매끄럽다.

“버지니아 울프가 유일하게 질투한 글솜씨”를 보여주는 캐서린 맨스필드. 1888년 뉴질랜드 태생, 런던에서 작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간 맨스필드는 1916년 블룸즈버리 그룹과의 인연으로 버지니아 울프와 우정을 키워나갔다. 엮은이 구호의 문장에 의하면 둘은 상호 존경과 유대감 그리고 라이벌 의식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우정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맨스필드는 심하게 앓은 뒤 오른쪽 폐에서 결절이 발견되고 이듬해 2월 객혈을 하며 병세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의미있는 작품을 못 남기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쫓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이전 1915년에 각별했던 막냇동생의, 말 그대로 ‘산산조각’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프랑스 방돌에서 동생을 애도하며 다짐한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있던 아름다운 시절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쓰겠다고! 혼자가 아니라 모두 살아 있던 나날, 어느날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못할 거라는 자각과 함께 지금의 생을 얼마나 더 귀히 여기게 될까. 누구에게나 찾아올 그런날을 예민하게 만지며 생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엿보여 뭉클해진다. 이후 그는 “전쟁으로 인해 세상은 돌이킬 수 없게 달라졌으며 예술가들은 그 변화를 반드시 작품에 반영하고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는 표현법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287쪽)”고 한다.

1920년 겨울부터 1922년 여름까지 스무 개월 동안 스무 편의 단편을 썼고 특히 1921년 여름부터는 옥스퍼드대에서 1911년에 만나 동지이자 남편이 된 존 미들턴 머리와 스위스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걸작을 연달아 집필했다. 1923년 1월 요양소에서 세상을 뜨기까지 정열적인 집필도 그렇지만 문장으로 쓰지 않고 많은 말을 깔아둔 투명문장이 특별한 느낌을 불러준다. 아주 독특한 “이상함”이라는 느낌이라는 평을 받는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일상의 안팎이란 속속들이 말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느껴지는, 삼키기도 뱉기도 어정쩡한, 위선과 속물근성이 이성 아래 짓눌린, 이상한 것들 투성이지 않은가. 쉽게 빨려들어가는 문장.

<만에서>, <인형의 집> 등 뉴질랜드 작품을 특히 높이 평가한 윌라 캐더는 그 특별한 재능을 두고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지만 글자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암시는 인쇄기로 찍기에는 너무 삼세해서 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나타나며 이것을 발견한 독자는 저자가 글쓰기에서 가장 희귀하며 가장 소중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291쪽)”고 했다. 노회한 재능이며 필요한 재능이다.

목차에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연대순으로 16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차 한 잔”부터 읽으며 차 한 잔 마셨다. 꿀꺽 차 한 모금 생각없이 넘기다가 화들짝 사레들리는 기분! 욕망과 위선을 귀엽게 꼬집는다.

어스름 속에서 낯선 여자를 만나다니,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내용 아닌가. 이 여자를 집에 데려가면 어떨까. 책에서 읽고 연극에서 보는 그런 일을 실제로 해보면 어떨까. 흥미진진할 것이다. 나중에 놀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데려왔어. “ 이런 상상 속에서 로즈메리는 앞으로 한발짝 나가 옆에 있는 흐릿한 존재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차를 마셔요.” (245쪽) 

뒷쪽에 흑백 사진 몇 장과 자필을 볼 수 있는 사진이 있다. 자유분방하고 강단이 느껴지는 필체다. 물론 영어 필기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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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2-05-18 15: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늘 멋져요!^^ 트와이닝스의 잉블이 날개같은 사쉐에 담겨져 있네요. ㅎㅎㅎ

프레이야 2022-05-18 17:31   좋아요 4 | URL
잉블 호호~ 작은 것 하나로 만족감 상승요. 커피 중독되어 있다가 홍차 오랜만에 마시니 좋은걸요. 티백이라도 ㅎㅎ 사진 보내준 분은 티를 즐겨요 평소.

꼬마요정 2022-05-18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예술입니다!! 꽃과 홍차, 찻잔과 숟가락 너무 잘 어울려요. 거기다 책 제목 또한 얼마나 어울리는지...
캐서린 맨스필드는 <가든파티>랑 <죽은 대령의 딸들> 정말 좋았는데, 이 책도 살포시 담아 갑니다^^

프레이야 2022-05-18 16:58   좋아요 3 | URL
요정 님 그 두 작품은 여기 안 들어있으니 잘되었네요. ^^ 책 이쁘고요 선물도 굳이어요. 전 처음 읽는 작가라 알게 되어 기쁘답니다. 매력적이에요. 세상엔 읽을 게 너무나 많네요.

파이버 2022-05-18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출판사 선물도 찻잔도 모두 돋보이네요 사진 너무 예쁩니다. 책표지도 도자기느낌이 나는군요.

프레이야 2022-05-18 23:17   좋아요 2 | URL
파이버 님 티스푼도 이쁘장해요 ^^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어 기뻐요.

책읽는나무 2022-05-19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 맛이 절로 날 것 같은 풍경입니다.
책을 읽을수록 차를 계속 들이켜야할 것 같은?^^
프레이야님의 지인분도 프레이야님처럼 사진 예술가입니다. 오늘 아침은 자목련님의 작약사진과 프레이야님 올려주신 괭이밥꽃 사진과 홍차 사진으로 그야말로 눈 호사를 제대로 샤워중입니다ㅋㅋㅋ

프레이야 2022-05-19 08:33   좋아요 2 | URL
눈샤워 다하셨나요 ㅎㅎ
작약 보러 자목련 님네로 가봐야겠어요.
차 한 잔 하세요 책나무님^^

페크pek0501 2022-05-19 16: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차 한 잔, 이란 말이 참 좋네요. 그대와 차 한 잔, 이면 더 좋겠고요. 그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겠지요. 꽃이어도 좋고 구름이어도 좋고 바람이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람 부는 날에 바람과 함께 마시는 차 한 잔... 저처럼 건조한 사람이 이런 감성적인 댓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프레이야 님의 페이퍼 덕분입니다. 님의 글을 읽으면 제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 2022-05-19 17:15   좋아요 2 | URL
그대와 차 한 잔^^ 넘나 좋은걸요. 오늘도 바람 구름 햇살 모두 좋아요. 땀이 납니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문장이 부럽더군요. 수련이 필요할 듯요. 문장으로 쓰지 않았는데 분명 그 문장이 읽히는 이상한 문장요.
마법처럼.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랄지. 배워야겠어요 페크 님. 곧이곧대로 다 말하지 않는 문장이랄지요.

mini74 2022-05-19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첫번째 사진 넘 예쁩니다 ㅎㅎ 왠지 이 책엔 꼭 차 한잔이 필요할 거 같아요. 저 꽃이 괭이밥이군요 귀여워요 ~~ 프레이야님도 사진 참 잘 찍으십니다 👍

프레이야 2022-05-19 17:59   좋아요 2 | URL
노랑 애기똥풀인가 했어요. 괭이밥도 귀여워요. 노랑노랑. ㅎㅎ 차 한 잔할까요, 에 담긴 많은 뜻이 이 작품에선 또 날카로웠아요. 체호프 느낌도 나고요.

그레이스 2022-05-20 10:31   좋아요 1 | URL
애기똥풀은 꽃잎이 4개, 괭이밥은 꽃잎이 5개^^

프레이야 2022-05-20 10:41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 ^^ 확실히 입력요

희선 2022-05-20 0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가 질투한 글솜씨군요 두 사람은 친하게 지내기도 했네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 좋을 듯합니다 살아 있는 나날, 지금이 귀한데 그걸 잊고 사는군요 책 제목이 차 한 잔 이어서 찬 한 잔 하면서 책을 만나면 더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5-20 10:25   좋아요 3 | URL
네. 희선 님 좋은 작품을 좋은 책을 만나는 것도 삶의 큰 즐거움이에요. 오늘은 약간 흐린 듯한데 좋아요 이런 날씨도. 차 한 잔 마시며 하루 시작하세요 ^^

그레이스 2022-05-20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좋고 글도 좋아요!
프레이야님은 글을 예쁘게 쓰신다는 생각이!

프레이야 2022-05-20 13:5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님.
차 한 잔과 함께 눈 부신 오월 보내고 계신지요. ^^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20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 한잔 앞에 두고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저에겐 생소한 작가인데 낯선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차 한잔 마시는 상상(?) 이라니 너무 매력적인데요? :)

프레이야 2022-05-20 15:34   좋아요 2 | URL
좋은 작품 알게 되었어요^^ 차 한 잔하다 나중 뒤통수 한 대 밎는 기분이실거에요. 매력적입니다. 냥님 얼굴이 넘나 사랑스럽네요.

서니데이 2022-05-20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분홍색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건 홍차와 티스푼이었네요. 책이 옆에 있어서 북마크 종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매일 더워지는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프레이야 2022-05-20 19:44   좋아요 3 | URL
네. 이제 제법 덥고 땀이 나네요
해가 지니 좀 나아요. 어느새 주말이 성큼 ^^
티스푼이랑 깜찍한 선물이어요. 서니데이 님도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사둔 지 조금 된 책이다. 시인의 시를 아니 좀 어둡거나 무거울까 주저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지금의 내게 적절히 와닿는 문장이었다. 만우절에 퇴원 후 한 달 열흘을 집에서 보내고 어제 다시 재활의학과의원에 들어왔다. 집에서의 하루하루는 나쁘지 않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할까.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거라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가슴이 조였다. 나는 상대방이 주는 눈치에 민감한 편이라 상대는 아니라고 강변해도 내가 느끼는 부분은 진실하다. 어느 몇몇 날엔 고양이 모꾸가 햇살바라기 하는 걸 보며 책을 읽을 때 마음이 몹시도 평화로웠던 기억이 난다. 정말 행복했다. 그럴 땐 물리적으로 심장의 느낌이 다르다. 나머지 시간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침을 먹고 드립커피를 마시고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법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있다. 사람이 한때, 한동안 잘하기는 쉽다. 꾸준히 무던히 한결같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이라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한다. 아무튼 난 눈칫밥 먹기 싫어 병원에 왔다. ㅎㅎ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밥이다. 표 안 나게 눈물이 어리기도 했고 목이 메기도 했다. 고양이 밥 주듯 간식 주듯 그렇게 살갑게까진 아니었어도 된다. 잘했던 것까지 묻혀버려 안타깝지만, 이렇게 또 흘려보내야지. 괜찮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또 주절거리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많이 화나고 서운했다는 이야기다. 휠체어에 의지했던 내가 이제 두 발을 딛고 절뚝절뚝 걷게 되어 이게 어딘가 대견해 하고 있다. 많이 디뎌야한다고 해서 아픔을 참고 그러는 중이다. 조금만 더 참아줬으면 되는데 퇴원한 지 보름 지나 한판 하고 사십 일에 한판 하고... 짜증묻은 얼굴을 내가 자주 감수하고 방긋거리기엔 내 몸이 더 아팠다. 앞으로 살면서 내 몸 아프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다짐만 더 하게 된다. 기대심과 의존심을 버렸어야 하는데 또 실패다 싶은 순간, 이 책을 읽었다. 가방에 챙겨온 책들 중 첫번째다. 위에서 괜한 걱정이었다고 한 건, 시인의 오래전 문장을 읽고 나는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고 마음을 살펴 또 씩씩하게 사는 게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다. 특히 죽음에 대하여, 죽음을 죽인 후의 삶에 대하여 통찰한 문장이 새겨읽힌다. 좋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을 때의 사유라는 점은 지지고 볶아대는 이 나이를 부끄럽게 했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죽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죽음만이 아니라 절망, 고통, 기타 등등 행복의 감정이 아닌 것들을 포함한다. 육체의 죽음 이전에 마음의 죽음이 먼저 온다. 그렇다. 우리는 매일같이 작은 죽음의 무덤을 넘고 넘어 생을 쌓아가는 것이다. 어느 한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다. 좋아지는 것도 단계적, 나빠지는 것도 단계적이다. 그리고 '나'를 이루는 모든 걸 걸머지고 넘을 수도 없다. 어느 것은 내려놓아야 하고 또 어느 것은 짊어지고 가야한다. 증발시켜버릴 것은 그렇게, 흡수하고 갈 것은 그렇게, 소화를 잘 해내야 할 것은 또 그렇게!  지구력과 인내심을 길러야한다. 모든 죽음의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 근원을 시인은 '공포'로 보았다. 세계에 대한 공포!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고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 <악순환> 전문 (160쪽)


정면은 도시 뒷면엔 나무의 한시절과 자연을 마주한 베란다에 어느 날 테이블을 놓고 사는 일상 에피소드는 자연스럽고 어머니를 상실한 경험과 <양철북>에 대한 에피소드는 묵지근하다. 펭귄이야기는 또 재미있다. 펭귄은 섭취한 열량의 70%를 버티고 서 있는 데 소비한다고 한다. 두 발로 버티고 서는 일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아가가 처음 두 발로 서서 3초만 버텨도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난리법석을 떨지않았나. 우리는 모두 그런 단계를 거쳐 여기에 있다.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걸 잊지 말자.


마지막에 실린 산문은 2013년에 쓴 글이다. '신비주의적 꿈들'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최 시인은 서양 신비주의 공부에 들었다가 얻게된 정신분열증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문학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다짐했다. 서양 점성술, 카발라, 타로 등이 포함된 서양 신비 체계는 이런저런 이유로 개인 심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시인은 노자와 장자에 빠진 이야기를 하며 "노자가 아주 노련한 미스터리 시인이었다면 장자는 강직한 드라마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노자를 읽으면 배가 허해지고 장자를 읽으면 배가 볼록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장자는 사회인습론에 더욱 깊이 빠져 있는 데 비해 <노자>는 우주, 사회, 개인이라는 세 겹 미스터리 신비주의를 완벽하게 시적으로 소화, 전달했다는 것이다.(181쪽)" 15년간 계속된 환청 병에 걸려 있을 때 노자를 접하게 되었고 전대미문의 신비주의라는 감이 들어 의식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고 썼다. 


오늘아침 내 마음에 충고하듯 예전에 쓴 북플이 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글귀를 마음이 힘든 친구에게도 보내주었더니 슬기로운 병원생활을 응원한다며 시 하나를 보내 주었다. 정현우 시인의 '소라 일기'. 찾아보니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젊은 시인이다. 

















수초의 질감이 잠긴 하늘

해변에서 소라를 주웠다.

몇시간째 소라는 나올 수 없다.

기차역 차단기 앞에서 나는 놀라 뒷걸음치고

소라를 놓쳤다.

새들은

나만 빼고 어디로 다 데려가는지

처음부터 혼자는

그렇게 탄생했을지도.


슬픔은 오른쪽이야,

기억을 나사처럼 돌리다가

더이상 돌아가지 않는 오른쪽이야,


돌아갈 집이 없는

소라에게 속삭였다.



앗, 소라! 최승자 시인의 마지막 산문에 소라가 등장한다. 신비주의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유치한 색깔의 원색적인 짧은 꿈을 꾸곤 했고 심지어 원색 한복을 입은 여자 귀신들이 나타나 싱크대 위에 비닐봉지에 담긴 소라, 고둥 등을 놓고 갔다고 한다. 소라, 고둥은 카발라 상징체계에서는 맨 하급의 의식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카발라를 알기도 전에 꿈이 먼저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세계는 깊고 방대하다. 기억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 외롭고 무서운 소라를 친구가 슬며시 던져준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이지만, 우리는 평소 일주론을 이야기하며 감당해야할 운명의 한계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자는 쪽이라 그 마음을 이해했다. 위무가 되었길...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이다. 하지만 슬픔도 고요히 벗삼으면 때론 잔잔한 물결이 밀려온다. 친구와 내가 동의한 건 나쁜 기억도 기억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점. 남산에 핀 꽃 한 송이 보내주어 우리는 그러고 웃었다. 당신의 소라, 안녕한가요!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2010년 <쓸쓸해서 머나먼> 전문



전에 12일간 있었던 병실이라 침상 위치는 다르지만 친숙하다. 옥상정원에 올라가보니 역시 구름이 멋진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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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22-05-15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완쾌하시기를 기원하고요!

프레이야 2022-05-15 21:09   좋아요 2 | URL
치니 님 힘 주시는 말씀 고맙습니다 ^^

잘잘라 2022-05-15 20: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____________^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요. 서양 사람들 울음하고, 한국 사람, 그 중에서도 베이비붐 세대, 그 중에서도 여자 사람, 그 중에서도 딸, 그 중에서도 며느리, 그 중에서도 아내, 그 중에서도 엄마의 울음은, 너무도 달라요.
울음을 멈추라니, 기껏, 그 얼마나 참고 참은 울음을 멈추라니요.
끝까지 울고, 끝끝내 울고불고, 아랑곳 않고 울고불고, 지치도록 울고, 혼자 남아 울고 나서야 잠이 오고 잠을 자면서도 울고 꿈 속에서도 울고 나서야 그때서야 후련해서 숨통 트이는 사람도 있는 걸, 이제서 알았어요. 모르고 기다릴 땐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알고 기다리는 건, ...참을 만 합니다.

프레이야 2022-05-15 21:51   좋아요 2 | URL
잘잘라 님 잘잘라고 하는데 댓글 발견 ㅎㅎ 고맙습니다 ^^ 씨~익 크게 웃음요. 넵 말씀하신 거 모두 공감요. 암요.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가벼울 수 있는 것을 서로 상대를 먼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충분히 울었어요. 쪼끔 남았을까요. 법륜스님 말씀 듣고도 해답 얻었어요

얄라알라 2022-05-16 09:07   좋아요 1 | URL
잘잘라님, 이 댓글 후아!!! 무슨 의미인지 천천히 생각하며 읽다 보면 두 문단이지만 정말 많은 뜻을 담고 있다는 걸 깊이 느끼게 됩니다

기억의집 2022-05-15 2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뭐라고 위로를 해 드려야할지.. 서운할 것 같아요… 저도 아팠을 때 진짜 서운해서 한참 지난 후에 엄청 퍼부었는데…혼자 살아도 누군가에게 서운했을까 싶어요!!!

프레이야 2022-05-15 21:52   좋아요 2 | URL
좀 기대려고 했나 봐요. 지금은 내가 좀 약자라는 마음이 있었나본데 그러면 안 되겠다 싶어요. 하루만 더 참으면 입원인데 그새를 못 참고 아쉽지만 또 흘려보내면 그만이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님도 퍼부었다고 하시니 동지의 힘이!! ^^

보리마루 2022-05-15 2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버튼이 한 개밖에 없어서 아쉬운 글이에요. 리뷰만으로도 제가 위로받는 듯한 이 좋은 최승자 시인님의 책을 저는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었네요ㅠ
프레이야님 얼른 완쾌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22-05-16 08:14   좋아요 3 | URL
보리마루 님 감사합니다 ^^
페이퍼에 적진 않았지만 이 에세이집은 레너드 코언의 책 번역 불이행의 채무를 갚는 마음으로 발행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왜 번역을 못하겠던지 간략히 그 이유를 적어두었어요. 레너드 코언을 다시 찾아보게 되더군요. 책은 얇지만 깊이 읽어볼 사유가 담겨 있어요.
좋았습니다. 새로운 한 주 즐겁게 시작하세요.

거리의화가 2022-05-16 08: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플 때는 작은 것 하나에도 서운함이 커지는 법이죠ㅠㅠ
조급함이 든다는 것도 무슨 말씀인지 알겠구요. 저도 예전에 다리 다쳤을 때 뼈가 잘 안 붙으니까 자꾸 조급함만 생기고 옆에 사람한테 짜증만 내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ㅜㅜ 잘해준 점이 많아도 잘못한 점이 더 눈에 띄고요.
잘 먹고 쉬어서 완쾌하시길 기원합니다~!

프레이야 2022-05-16 12:33   좋아요 1 | URL
배려와 진심이 느껴지고 안 느껴지고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 여자의 말에는 귀를 덜 기울이는 게 문제고요. 힘주시는 말씀 고맙습니다 화가님 날이 참 좋습니다 ^^

얄라알라 2022-05-16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페이퍼는 글눈과 사진 눈, 두 가지 눈을 다 호강시켜줍니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의 저자는 뇌졸중으로 언어 영역(뇌능력)이 잠시 정지된 기간, 간호해주는 분들이 호전적인지 우호적인지를 비언어적 신호, 즉 감(?)으로 바로 감지하였고 그에 따라 본인의 회복력 회복상태에 영향 크게 받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프레이야님, 긴 기간 천천히 회복하시면서 많은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온라인 공간이지만 프레이야님께 응원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프레이야 2022-05-16 12:28   좋아요 2 | URL
뇌과학 책이군요. 뇌는 참 신비로운 미답의 영역이네요. 그럼요 입으로 하는 말만 말이 아니지요. 우리같이 가뜩이나 예민한 사람들이 말이죠. 많은 생각과 함께 시간도 술술 잘 흘러가네요. 좋은 계절 누리시길요. 저는 씩씩하게요! 감사합니다 얄라 님.

새파랑 2022-05-16 0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친구끼리 좋은 문장을 보내주는 모습이 멋지네요. 서로에게 힘이 될거 같아요. 책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으시고 빨리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프레이야 2022-05-16 12:29   좋아요 1 | URL
네. 좋은 친구에요. 은근히 힘을 준답니다. 책도 좋구요. 좋은 말씀과 위로 고맙습니다 새파랑 님.

mini74 2022-05-1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릉 두 다리 튼튼해지셔서, 푹 잠들어 가장 약한 그 순간에 냅다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세요 프레이야님 ~~ 프레이야님의 조심스런 마음이 조금은 서글픈 맘이 느껴져서 저도 맘이 아파요 ㅠㅠ 프레이야님 파이팅 !!!

프레이야 2022-05-16 18:09   좋아요 1 | URL
ㅋㅋ 울미니님 덕분에 잘잘라님 이후 또 와장창 웃겨가지고 불끈 힘이 납니다. 절대 바뀌지 않는 일주를 타고난 사람이라 바뀌어보려고 애쓰는 과정이 스트레스였겠거니 싶어요.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인 건 힘든 법. 밥 잘 먹고 동병상련 여성동지들이랑 평화롭게 지내고 있어요. 화이팅요!!

2022-05-16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6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05-17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죽음은 몸보다 마음에 먼저 올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 다 잘 살피면 좋겠지만,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안 좋아지는 듯합니다 마음이 안 좋으면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눈칫밥 먹기 안 좋죠 마음이 편하고 몸도 더 좋아지면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5-17 14:10   좋아요 2 | URL
네. 희선 님 마음이 먼저 죽지 않도록 잘 살펴야겠지요.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 햇살 바람 구름 모두 공짜로 잘 누립니다^^

yamoo 2022-05-18 0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병원에 계셨었군요. 그래도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알라딘에 간만에 복귀하고 보니 여러 알라디너 분들의 많은 변화가 감지되네요. 저처럼 잠수타신 분, 승진하신 분, 재취업 하신 분 등등..

항상 건강하시길 빌어요^^

프레이야 2022-05-18 10:17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야무님
그러고보니 야무님도 묵은지에 들어가네요
많은 변화들이 있죠. 복귀하신 거 반갑습니다^^ 좋은 미술품 또 올려주세요. 눈요기라두.

페크pek0501 2022-05-19 16: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몸과 마음의 미묘한 연결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각각 영역이 다른 것 같아도 몸이 아파 마음이 고장이 나기도 하고, 마음이 편치 않아 몸이 고장이 나기도 하고... 제가 내린 결론은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폭발할 때 하더라도 끝마무리는 잘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화롭게...
몸 빨리 회복되시길 빕니다.^^

프레이야 2022-05-19 17:56   좋아요 1 | URL
마무리 잘해야죠 ^^
규칙적인 하루가 또 저물어가네요. 지낼만해요 페크님 고맙습니다! 곳곳에 스승이 있어 이곳에서도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며 배웁니다. 미숙한 인간인지라. 매사 마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가면 몸은 따라가게 마련인데 마음이 없이 몸을 부리려면 스트레스겠죠.
오늘이 발명의 날이더군요 뜬금없이 생각이…
 
나는 네Nez입니다
김태형 지음 / 난다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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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현영 보는 게 즐겁다. 올리브영 신입 매장직원 연기 보다가 빵빵 터졌다. 핸드크림 사러온 여성에게 니치향 어쩌고 저쩌고 막 과하게 설명하다 니치향이 뭐냐는 손님의 질문에 말이 막혀 횡설수설하는 장면. 니치는 프랑스어 Niche(니슈). 


저자 김태형은 이 책의 후반 절반을 차지하는 A~Z에서 향수와 관련한 전문 용어와 장인들을 사전부록이 아니라 자신의 글로 설명하고 소개한다. 향을 배우러 그라스에서 베르사유, 이집카에 들어가 몸으로 느끼고 익힌 흔적들이다. 전반 절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고 절제된 스토리로 쓴 에세이 문장도 좋았지만 후반부 절반은 전문 사전처럼 간략하면서 유용하다. 여기 N장에서 Niche를 설명하는데,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던 용어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니슈는 조각상이 놓이도록 움푹 들어간 벽면의 부분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지만 마케팅적으로 사용될 때는 틈새시장을 의미한다. Parfum de Niche, 즉 영어의 니치 퍼퓸은 보통 매스 퍼퓸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매스 퍼퓸이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판매를 극대화시키고 최대한 많은 대중을 타겟으로 삼는 반면, 니치 퍼퓸은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그것에 끌리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겨냥한다. 많은 이가 니치 향수를 개인이 운영하는 브랜드의 향수나 값비싼 향수라고 생각한다. 특이한 컨셉을 실현하기 위해 소규모로 하거나 희귀한 자연 원료를 사용하여 가격이 높아지는 경우가 빈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브랜드가 니치 퍼퓸에 속하느냐는 '향수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예술성과 상업성 중 어느 쪽을 더 대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252쪽)


"조향사가 좋은 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본인의 색을 향에 입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과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이해하고 반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늘 조향사의 위치를 고민해온 흔적도 여럿 보인다. 저자는 이 점이 딜레마이기도 하다면서 지보당Givaudan의 조향사 필립 뒤랑의 문장을 떠올린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조향사는 아티스트Artiste, 예술가보다 아르티장Artisan, 장인에 더 가깝게 보인다."(71쪽)


저자 김태형의 외국 이름은 가브리엘이다. 부드러운 그 느낌이 좋아 정했다고 하면서 조향계의 여러 가브리엘 중에 자신도 기억에 남길 바란다. 가장 유명한 가브리엘이라면 우리가 다 알다시피 1909년 양장점 문을 열고 다양한 제품군을 가진 프랑스 기업의 모체를 키운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160쪽에서 적절히 소개하고 있다. 샤넬 향수회사가 세워진 건 샤넬이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와 함께 탄생시킨 넘버5(1921)와 넘버22(1922)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후다. 샤넬이 우아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흑과 백을 사용했듯 이 책은 흑과 백 두 가지 색상으로 디자인되었다. 초반에 그라스Grasse 이야기가 나와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좀 지나 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한꺼번에 몰아서 배치해두었다. 그라스역사 위 동그란 시계 사진부터 많지는 않고 몇 장 두어서 기분 전환 겸 분위기가 좋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섬세하고 사려깊은 결이 엿보이는 젊은 조향사 김태형은 태생으로 주어진 문학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냐 싶을 정도로 문학이거나 아무튼 예술의 길로 접어들 것 같은 예감을 숙명적으로 하며 자랐다. 글에도 여러 면으로 드러난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과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함정임 작가의 외아들. 두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닮고 분위기도 비슷한, 맑은 이미지다. 누구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는 자기삶이란 없다. 조향사 김태형은 후천적 환경에 의해 아노스미Anosmie가 되어 후각을 잃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자신이 조향사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던 때를 지나 이제는 "후각을 잃은 아버지의 안타까운 운명을 풀어낼 사명적 흐름"이라고 여긴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조향계의 베토벤이라 불리는 장 까를Jean Carles을 소개하는 대목이 인상깊다. 장 까를은 최초로 조향사 양성기관을 설립하고 향료 교육방식을 정립한 교육자이다. 그의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한 마 그리프와 미스 디오르(한때 나도 썼던 향수라 반갑다)가 아노스미 상태에서 동료 조향사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조향사들은 원료의 특색을 기억해내고 그들의 조합 효과를 어느 정도 예상해야 한단다. 그래서 조향을 공부하는 학생은 원료 학습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반복적이고 꾸준한 노력을 쏟는다고. 역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듯. 



마리보 탄생 300주년 기념우표



어머니의 문학도들과 같이 섬진강 문학기행에 가서 조향사가 되기까지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고백을 공개적으로 하고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이면 출시하는 보졸레누보를 어머니를 위해 사는 아들이 에트르라 대표 조향사 김태형이다. (나도 보졸레누보 엄청 좋아한다. 올해도 꼭 사도록!) 저자는 와인의 맛도 향으로 표현하고 섬진강 풍경도 향으로 그려내고 문학적 문체도 향으로 읽는다. 문학이 독자와 만나 작품이 되듯 향수도 시향자의 감각과 만나 작품이 된다. 향수가 출시되기까지 여러 중요한 과정을 거치는데 이름을 정하는 작업은 조향만큼이나 신중하게 진행된다고 한다. 저자가 지은 이름 중 마리보다주Marivaudage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사랑과 우연의 유희>, <이중의 변심>, <노예들의 섬>, <순진한 배우들> 등을 쓴 18세기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의 문체를 칭하는 마리보다주.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사랑이 시작되어 표출되는 상호간의 심리를 세밀하고 미묘하게 담아내는" 마리보의 대사(말투)를 이르는 말이다. (마리보의 저서 구매)


나는 향수와 꽃, 두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마리보다주를 발견했다. 꽃은 두 생물이 사랑을 나누게 해주는 매개체이자 무언의 흐름이 오가는 통로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섬세한 그들의 이야기를 인간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매개체인 향수로 풀어내고 싶었다. 불행히도 나를 자극했던 마리보다주는 향수의 최종 이름으로 선택되지 못하였다. 과거에 '마리보'의 문체는 경박스럽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는데 그러한 이미지가 향수에 덧붙여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이 항상 우아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경박하고 가끔은 촌스럽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이 이름에 무척이나 애착이 간다.(81쪽)


젊은 조향사는 사랑이 가끔 경박하고 촌스럽다고 했지만,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 게 사랑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을 땐 보이지 않는다 그 실체가. 이런 나의 생각은 경박하고 촌스러운 게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진짜 사랑은 그런 것에 더 가깝다. 맛있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안 먹고 배길 수 있다면 진짜 그 달달한 케이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입가에 생크림을 묻혀가며 안 먹고는 못 배긴다, 진짜 좋아하면.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늙어지면 그럴 수가 있다는 것, 그게 된다는 것이다. 당뇨라, 체면상, 살찔까봐, 등등 우아하게 참을 수 있는 이유가 많아진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가운데 빨간 모자 쓴 아이가 세 살 적 벤(샘)



영화 <사랑이 지나간 자리The Deep End of the Ocean>에는 세살 때 가족을 잃어버렸다가 열두 살이 되어 우연히 기적적으로 가족을 다시 만난 소년이 나온다. 샘(원래는 벤)은 석 달간 가족의 집에서 지내며 적응해보려고 애쓰지만 9년이라는 간극이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기억의 공백을 채워줄 어떤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샘은 친아들처럼 키워주신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어한다. 평범할 법한 이야기이지만 풀어가는 방식이 의외로 좋았다. 어느 날 밤 샘이 다시 집을 찾아온다. 형과 농구를 하며 엉킨 실타래를 아무렇지 않게 풀고 진심으로 가족이 되는 마지막 장면이 따뜻하다. 


샘의 이야기를 형은 눈을 반짝이며 듣는다. 샘이 와 있는 동안 하루는 엄마(미셸 파이퍼)가 - 물론 아줌마라고 부르지만- 향나무로 짠 상자에서 샘과 형이 어렸을 적에 입었던 조그마한 옷가지를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샘은 무슨 냄새가 난다며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집에 돌아온 그날밤은 바로 그 냄새를 기억해낸 밤이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기를 좋아했던 샘(어릴 적 이름은 벤)은 세 살 때 그 향나무로 짠 커다란 상자에 숨어 있었고 걸쇠가 밖에서 잠겨 나오지 못하자 형이 열어주어 나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때때로 동생을 돌보는 게 귀찮아 꽉 잡은 손을 놓고 싶어했고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진짜 손을 놓아버렸지만 항상 자기를 데리고 놀아주고 돌봐주었던 형을 생각해낸 것이다. 냄새로 기억하고 냄새로 떠올리는 시공간, 어떤 연결성과 소속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사랑. 샘은 자기 손을 놓아버린 어릴 적 형도 '그게 뭐 어때서'라며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향나무 냄새가 불러준 기억으로 다시 얻는다. 


조향사 김태형은 후각에 대해 이렇게 쓴다.


후각은 매우 중요하지만 은연중 우리가 당연시하여 잊고 있는 공기와 같은 감각이다. 후각은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뇌를 컴퓨터라고 하고 수많은 기억을 암호가 걸린 파일들이라고 할 때, 후각은 비밀번호가 빼곡히 적힌 암호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후각 세포는 5가지 감각 중에 가장 종류가 많아 제일 복합적이고 다양하게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다. (43쪽)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향기와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향기를 써둔 장이 재미있다. 자신을 시크하게 드러내보이는 방식이랄까. 한번 해보면 자기정체성을 좀 들여다볼 수 있을 듯.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무언가가 정체성을 더 잘 보여준다고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살내음을 좋아하는 저자는 씨벳 향을 싫어하네. Civette은 에티오피아가 본 서식지인 사향고양이의 사향샘에서 얻어낸 아니말 계열 원료로 동물이 죽어야만 얻을 수 있기에 인위적으로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뒤에 설명해두었다. 원료 자체는 무겁고 강한 냄새가 나지만 소량 사용하면 향수에 따스함과 관능적인 매력을 불어넣는다. 오리엔탈 향수와 잘 어울리며 겔랑의 향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원료라고 한다. 나도 겔랑 향수가 좀 부담스러웠던 이유를 알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향기는 뭘까. 얼른 떠오르는 게 생선 굽고 난 후 집안에 배는 비린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향만 써볼까. - 밥 짓는 냄새, 커피향 퍼지는 냄새, 빵 굽는 냄새, 버터 녹는 냄새, 고양이 털 냄새, 튜베로즈와 일랑일랑 향, 포구 비린내, 여름장맛비 냄새, 아기똥 냄새, 프리지아 향, 라벤더 향,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 냄새, 피톤치드 향, 베이비파우더 향, 연필 깎을 때 나는 향, 외할머니가 보글보글 끓여주셨던 된장찌개 냄새, 사랑하는 사람의 땀냄새 그리고 중고책 냄새와 새 책 냄새. 


그라스Grasse는 오래전 읽은 소설 <향수> 이후 알게 된 곳이지만 가보진 못했다. 그라스의 3대 향수박물관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찾았다는 일화로 유명한 몰리나르Molinard, 270년의 역사를 간직한 갈리마르Galimard 그리고 프라고나르Fragonard. 프라고나르는 전통적 방법을 고수해 생산하는 향제품뿐 아니라 패션 분야로 라인을 확장해가며 사랑 받고 있는 브랜드. 시간 맞춰 가면 무료로 공장 견학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라스 출신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이름에서 따왔다. 찾아보니 18세기 프랑스 풍속화가로 유명한 분이네. 상당한 암시를 군데군데 그림에 숨겨두고 세태를 풍자했다. 향수 좋아하는 나, 향수 뿌리길 한동안 잊고 있었네. 저자가 시향을 권하는대로 프라고나르 향수 하나 바로 주문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젊은 시절 자화상 


 프라고나르 작 1766경, 그네타기



Nez는 코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이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조향사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우리는 음악가를 귀에 비유하거나 축구선수를 다리에 비유하지 않는다. 나는 조향사에게만 허락된 이 재미있는 표현이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조향사를 꿈꾸는 독자가 있다면 '그랑 네Grand Nez', 즉 '왕코'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자.(252쪽)


역시 뒷부분 N장에서 적어두었다. Nez라고 부르는 데는 왠지 더 전문적인 느낌이 배어 있어 장인다운 별칭이다. 굳이 붙여보자면 화가는 '손', 아니면 '눈' 작가는 '심장'이어야 할까. 왕손, 왕눈, 왕심장. 괜한 생각이... 만듦새도 저자의 기운처럼 맑은 이 책을 서곡 님의 페이퍼로 알게 되어 기쁘다. 김소진, 함정임 작가의 책도 함께 주문. 



고 김소진 작가


김태형 조향사, 사진 샘터 기사에서 가져옴




조향사는 하나의 향을 그려낼 때 무언가를 공들여 담아낸다. 향수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그 무언가에 감동하고, 이어서 또다른 감동을 창출해내는 것에서 나온다. 내가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소통의 부재, 그리고 존중의 결여였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향수를 통해 더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었다. - P19

나의 집은 10번지였다. 10번지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곳이었는데, 건물 가운데에 뚫려 있는 작은 정원 같은 공간 속 별채였다. 그렇기에 건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후 다시 정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야지만 비로소 내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은 나에게 여전히 오묘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 나는 항상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한번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다른 문으로 나가야만 했으니 말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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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5-10 0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향수 이야기가 나온 책 읽는 걸 대충 들었는데, 이 책이었나 봅니다 냄새로도 어떤 때가 떠오르겠습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에 그런 게 나오는군요 어릴 때 기억인데 떠올라서 다행이네요 영화에 나오는 거지만... 실제로도 그런 일 있겠지요


희선

프레이야 2022-05-10 21:18   좋아요 1 | URL
네, 그랬군요. 책이 참하고 저자의 이미지처럼 맑아요.
만듦새도 이뻐서 마음에 들어요.
영화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동명의 다른 영화도 있어요.
원제가 다르구요.
이 영화 의외로 좋았어요. 마음 따뜻해집니다.
가족의 소중함도 새삼 느끼게 되구요.^^

mini74 2022-05-10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넘 재미있겠어요 프레이야님. 아이가 친구들이 향수 이야기하는데 뭐라는거냐며 하던데 같이 읽어봐야겠어요.*^^*
베리트 모리조의 엄마가 프리고나르 조카였다고 하더라고요. ~~ 찜합니다 *^^*

2022-05-10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22-05-12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소진 작가 아들이라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고 관심이 생기네요.

프레이야 2022-05-12 11:59   좋아요 0 | URL
그죠 문학작가 부모 사이에서 그 결을 닮은 것 같아요. 문장이 깔끔합니다.

2022-05-12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2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