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K68A1)

 [데모크리토스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것들은 필연(ananke)에 따라 생겨난다. 회오리가 모든것들의 생성의 원인(aitia)이기 때문인데, 그는 그것을 필연(必然)이라고 부른다.(p555)...  심플리키오스(DK68B167) 데모크리토스가 온갖 형태(원자)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왔다(apokrithenai)고 말할 때, 그는 저절로(t'automaton)와 우연(偶然)(tyche)으로부터 그것을 산출해 내는 것 같다. _ 김인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 p559


 우연과 필연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 ? ~ 380 ? ) 원자론의 두 주제다. 그리고, <토지>에서도 우연과 필연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토지 2>와 <토지 3>에서는 최치수와 윤씨 부인의 잇달은 죽음이 서희를 낯선 간도로 몰았다면, <토지 8>에서는 '간도댁' 월선의 죽음 이후 서희는 진주로 이주한다. 다만, 앞선 사건이 서희의 간도 이주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후자는 우연적 사건일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에게 모든 물리적 변화는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연'은 무엇일까.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에 의하면 '우연'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虛狀)에 불과하다. 인간에 의해 우연으로 간주되는 모든 일 안에는 법칙성이 있다는 마르크스의 해석을 따라간다면, 월선의 죽음 역시 단순히 우연적 사태로만은 볼 수 없지 않을까.


 데모크리토스는 현실에 대한 반성 형식으로 필연성을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가 모든 것을 필연성에 돌렸다고 말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자의 소용돌이(Wirbel)를 데모크리토스적 필연성이라고 적고 있다.(p42)... 인간은 스스로 우연이라는 허상(Scheinbild)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 이것은 그들 자신의 혼돈(Ratlosigkeit)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연(Zufall)은 건강한 사유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_ 칼 마르크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p43 


 월선의 죽음은 이 용과 이 홍, 두 부자(父子)와 홍이 어머니 임이네를 갈라놓는 직접인 계기가 된다. 그리고, 월선 아지매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져 있던 길상은 구천(김환)과의 만남을 통해 서희와 이별하고 간도에 남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길상의 결정이 결국 <토지> 완결에 이르기까지 차갑게 식어버린 부부 사이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월선의 죽음은 단순한 한 인물의 퇴장이 아니라, <토지>에서 '간도 시대'의 종결이라 생각된다. (연장성산에서 '평산리 시대'의 종결은 최치수의 죽음이 아닌 윤씨 부인의 죽음이라 여겨진다. 서희는 '최치수의 딸'이기보다는 '윤씨 부인의 손녀'이기에.). 그런 점에서 '월선의 죽음'은 <토지>에 있어 하나의 필연이 아닐까.


 길상은 김환의 외침으로 오히려 자신이 굳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그것은 생명의 유한(有限)이다. 죄(罪)에 얽매인 것 아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이 없는 유한, 역설이라면 기막힌 역설이겠으나. 어느 시기까지 유지될 안정(安定)일지는 모르지만 길상은 서희와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담백한 상태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죽 끓듯 하는 환의 그 반역의 피조차 돌연 잠들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리 고요한가. 고요하게 고요하게 네 개의 발은 내디뎌지고 있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8> , p454/510


 "전 여기 있을 테예요! 아버지 오시면 함께 간단 말입니다."

 "아버진 볼일 보시고 뒤따라 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인 것 저는 알아요, 아버지만 내버려두고 가는 거 아닙니까!"

 서희의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된다.

  '오냐! 나 당신 용서하지 않을 테요! 저 어린 것 가슴을 멍들인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요! 결코, 결코!' _ 박경리, <토지 8> , p492/510


 간도 시대의 종결은 한 인물의 죽음과 함께 한 가족의 헤어짐으로 성징된다. 서희와 길상의 이별이 그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고, 다시 둘로 돌려놓았는가. 그 전에 먼저 <토지인물사전>을 통해 길상과 서희의 삶을 다시 바라본다. 


 

김길상(金吉祥)... 서희의 절대적인 조력자가 된 후, 하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 윤씨부인이 준 정에 대한 보답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 철저하게 물들어가는 서희에 대한 안타까움과 회의를 가지게 된다... 젋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면서는 서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주종관계에 의한 갈등, 봉순에 대한 그리움과 죄의식에 괴로워한다... 마차사고를 계기로 결국 서희의 결혼 제의를 수락하여 환국과 윤국 두 아들을 둔다. 그러나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을 가졌던 서희가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로만 느껴질 정도로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결국 서희의 귀향에 동행하지 않고 간도에 남아 그곳의 독립운동 조직에 합류하여 신분적 이질감을 극복하려 애쓴다.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명분보다는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선택하려는 그의 의지는 계속적인 갈등으로 남는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p40/214


 최서희(崔西姬)... 조준구에게 복수하고 평사리의 땅을 되찾기 위해, 윤씨부인에게 비밀리에 받은 금괴와 은괴를 자본으로 토지 매입과 장사를 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은다. 이 과정에서 매점매석과 친일도 서슴지 않으며, 이상현의 연모를 거절하고 길상과 신분을 넘어선 결혼을 하여 환국과 윤국 두 아들을 얻어 대를 잇는다. 공노인과 임역관의 중개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진주에 정착하지만 복수의 허무함에 빠진다... 만주에 남은 남편의 길상의 뜻을 받아들여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등 은밀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를 엄폐하기 위해 최씨 일문의 기반을 다지며 진주지역의 유지로서 일본인들과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막대한 재력과 미모, 천성적인 위엄, 능란한 일본어 실력과 독서로 다져진 지식, 더욱이 근화방직의 사장 황태수와 사돈이 됨으로써 이런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놓는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p188 /214


 마차 전복 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함께 넘어갈 뻔 했던 이들은 이를 계기로 결혼한다. 다만, 길상이 꾼 귀마동(歸馬洞) 꿈은 이들의 결혼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토지 6> 꿈속의 귀마동) 미루어 생각해 보면, 길상은 어려 고아가 된 서희에 대한 연민을 '마차 사고' 를 통해 죽음(死)과 삶(生)'을 겪으면서, 서희와의 결혼을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지. 길상은 '우연'적 상황'을 '인생의 정해진 길/법칙'으로 생각하고 결혼했지만, 자신 안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로 걸어들어간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길상-서희' 결혼을 순간적인 감정이 가져온 우연의 비극으로 볼 수도 있겠다.


 적어도 길상에게 서희라는 인물과의 결혼은 안정된 지위와 부를 가져다 주긴 했지만, 그가 감당하기 무거운 짐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반면, 서희에게 길상과의 결혼도 같은 의미였을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하인과 결혼할 정도로 기존 질서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가문(家)을 위해 나라(國)에 대한 마음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 서희임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잘 드러나지 않는 속내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해봐야겠다.


 결혼은 여성에게 안정된 지위와 남편의 보호를 보장해 줄 것이다. 최상의 경우라면 재정적인 후원자 겸 다정한 동반자를 얻을 것이다. 한 신심 깊은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동료"가 될 것이다.(p189)... 이 시기(셰익스피어 시대) 영국인들의 결혼관이 유럽 다른 나라들의 결혼관과 달랐던 점은 최선의 결혼이란 동반자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_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 p190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영국에서 여성 문제는 정점에 도달했다.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소설과 희곡들, 공적인 연설과 사적인 대화들은 신여성(New Woman)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었다. 신여성의 특징은 높은 교육 수준과 독립성, 가족의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남성과 여성이 지켜야 할 관습적인 영역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는 성향이다. _ 매릴린 옐롬, <아내의 역사> , p403


 여지까지 읽으면서 길상과 서희 모두 전형적인 인물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문장에 담긴 신(身), 가(家), 국(國)에 대한 길상과 서희의 생각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자신의 길을 결정한 길상이 '신(身)'을 선택했다면, 서희는 '가(家)'를 더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길상은 개인주의자, 서희는 공동체주의자의 면을 보인다. 반면, 독립운동을 하는 길상과 가문을 위해 친일도 서슴지 않지만, 독립운동도 후원하는 서희를 통해 애국지사와 무정부주의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달랐기에 그들의 삶은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런 면에서 그들의 별거는 필연적인 결과로 생각된다.


 길상은 담배를 붙여 서희를 바라본다. 강한 눈길이었다. 서희는 이같이 강한 길상의 눈을 본 일이 없다. 아니 강한 사나이의 그러한 눈길을 본 일이 없다.

 '나는 너를 소유했지만 넌 나를 소유하지 못할 게야.'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눈 같기도 했었다. 그 강한 눈을 서희는 강하게 받는다. 미동하지 않고 받는다. 그러자 길상의 눈에는 말할 수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밀려왔고, 희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비로소 서희는 그 눈에서 자신의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희는 싸움이라 생각했었지만 그쪽은 그것이 아니었다. _ 박경리, <토지 8> , p475/510


 '월선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가져온 크고 작은 여파는 간도에서 자리잡던 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풍파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풍파 속에서 <토지>안의 또다른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생각하며 '우연과 필연'으로 한 주간의 <토지>독서를 갈무리한다...


PS. '우연'과 '필연'에 대한 해석은 에피쿠로스 해석은 데모크리토스와 정확하게 대척점에 있다. 즉,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것은 우연적으로 생겨나고, 자의에 의존한다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들여다 보면 '적대적 공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길상과 서희는 서로 사랑했기에, 이러한 '애증(愛憎)'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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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30 14: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토지의 문장, 역시 정말 좋으네요.
전집 읽기 내년엔 시도할까 합니다 ^^
아내의 역사, 는 전부터 담아 두곤 미뤘는데 호랑이님 페이퍼로 다시 보네요. 찜!

겨울호랑이 2021-10-30 14:38   좋아요 3 | URL
대가의 작품이라, 때로는 굵은 붓으로 시대를 담아내는 호방함도, 때로는 가는 붓으로 인물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묘사하는 섬세함도 <토지> 안에 함께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프레이야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