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천명을 도운 공훈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띠풀을 나누어 토지로 보답하였습니다. 나라의 초기에 공신 중에서 식읍으로 책봉 받은 사람은 20~30가호(家戶)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은덕으로 식읍을 책봉 받은 사람이 마침내 100여를 넘는데, 국가의 조부(租賦)는 태반이 사사로운 가문에 있고, 사사로운 가문에서는 남는 것이 있어서 다만 사치를 늘리지만, 공가(公家, 관부)에서 쓸 것이 부족하여 앉아서 근심과 위태로움을 불러일으키니 나라를 통제하는 방도를 어찌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총애를 받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다만 부유하게 될 수 있는 금과 비단 그리고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이는데 그칠 뿐이지 공기(公器, 공적 그릇 즉 관직)를 사사로운 용도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늘어놓은 지위가 이미 넓고 쓸데없는 인원이 두 배로 되었으나 구하고 찾는데 만족하지 않고 날과 달로 수를 늘리며, 폐하께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은덕을 내리시고, 가까운 친척들은 끝이 없이 그것을 요청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를 이롭게 하며 법을 팔아 사사로운 것을 따릅니다.

유유구가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재앙을 없애는 사람은 응당 천하의 복을 향유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평왕은 사직의 위태로움을 건지고 주군과 부모의 어려운 일을 구원하였으니, 공로을 평가한다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덕망을 말하여도 가장 어지시니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군주란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것인데, 근본이 굳으면 나라가 평안하며 나라가 평안하면 폐하의 부부(夫婦)와 모자(母子)는 오랫동안 서로 보전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12-30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30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대왕을 뵙고 운 것은 대왕께서 장차 사형을 받아 죽는 것과 멸족(滅族)될 것을 서러워한 것입니다. 뒤에 마침내 크게 웃은 것은 대왕께서 저 정음을 얻은 것을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비록 천자의 마음을 얻었지만 저들 다섯 명이 모두 장군과 재상의 권력을 점거하고 있고 담력과 지략이 보통사람들을 넘어서 태후 폐하기를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대왕께서 스스로 보시기에 권세와 지위가 태후와 더불어 누가 무겁겠습니까?

강호(江湖)의 넉넉함은 낳고 키우는데 끝이 없지만, 부고(府庫)의 비용은 지급하고 공급받는 것이 쉽게 다합니다. 비용이 만약에 적으면, 구제하는 것을 어찌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용하는 금액이 가령 많이 하면 늘 지출하는 것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사물을 구해주는 것이 어찌 사람을 걱정해 주는 것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또 산 것<물고기>을 팔아서 살아가는 무리들은 오로지 이득이 보이고 전도(錢刀)가 날마다 이르니 물고기 잡는 그물을 해마다 늘려서, 이것을 시행하는 날은 하루이지만 이를 운영하는 것은 백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아직은 죄를 용서 받으려고 사용하는 돈이나 물건을 돌이키시고, 가난하고 없는 백성들에게 요역(?役)과 부세(賦稅)를 줄여서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만 같지 아니하니, 그 복(福)이 저것보다 더 낫습니다."?

"《시경(詩經)》은 300편이지만 한마디로 그것을 덮어서 말하면 ‘사무사(思無邪)’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신선(神仙)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곧 진 시황과 한 무제가 그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부처가 사람들에게 복과 이로움을 줄 수 있다면 양 무제(梁 武帝)가 그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요(堯)와 순(舜)이 제왕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은 역시 사람들의 일을 닦으며 다스린 것뿐입니다. 이런 무리들을 높여 주시고 총애하시는 것이 어찌 나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날의 가람(伽藍, 불교 절)은 만든 것이 궁궐을 뛰어넘습니다. 공력에서는 귀신을 부릴 수 없으면서 오직 사람을 부려먹는데 있으며, 사물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끝내는 반드시 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백성들에게서 덜어내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서 구하겠습니까!"

정치를 하는 사람이 진실로 월령(月令)에 따르고, 예경(禮經)에 합하면 저절로 사물은 그 생명을 키우고, 사람은 그 본성을 얻을 것입니다.

신라왕 김리홍(金理洪, 32대 孝昭王)이 사망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그의 동생인 김숭기(金崇基, 33대 聖德王)를 왕으로 세웠다.

소안항(蘇安?) 역시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혁명(革命)하신 처음에는 사람들이 폐하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주군(主君)으로 여겼지만, 나이가 드신 이래로 사람들은 폐하를 아첨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주군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위원충을 감옥에 가두고부터 마을의 거리가 어수선합니다."

이는 마침내 간악한 신하의 속이는 계책인데 만약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신다면 누가 형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일이 이미 다시 일어났는데도 폐하께서 모두 풀어주고 묻지 않으신다면 장창종으로 하여금 더욱 스스로 계책이 이루어졌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며, 천하에서는 또 천명(天命)을 받은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여기도록 하는 것이니, 이는 마침내 폐하께서 그가 난을 일으키도록 키우고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적질을 한 신하를 주살하지 않으시면 사직은 망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라에는 일정한 법이 있는데 짐이 어찌 감히 어기겠는가! 중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까 의심하여 가까운 신하로 하여금 감옥으로 가서 바른대로 묻도록 하였는데, 그들이 손으로 쓴 상황을 얻어 보면 모두 스스로 승복(承服)하였으니, 짐(朕)이 의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묵철(??)이 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헤아리며 말하였다.
"우리에게 삶은 곡식의 종자를 주어서 이를 심었으나 싹이 트지 않았으니 첫 번째이다.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은 모두 거리에 넘쳐나는 것이어서 진귀한 물건이 아니니 두 번째이다. 내가 사신에게 준 붉은 자색의 의복을 모두 빼앗았으니 세 번째이다. 명주와 비단은 모두 거칠고 나쁘니 네 번째이다. 나 가한(可汗)의 딸은 마땅히 천자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야하며, 무씨(武氏)는 작은 성(姓)이어서 집안으로서 짝이 아닌데도 속이고 무릅쓰면서 혼인하려 하였으니 다섯째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병사를 일으켜서 하북(河北, 황하 북쪽)을 빼앗고자 할 뿐이다."

태후가 명하여 그를 앉게 하고 묻자, 길욱이 말하였다.
"물과 흙을 섞으면 진흙이 되었다고 하여 다툼이 있겠습니까?"
태후가 대답하였다. "없다."
또 말하였다. "나누어 반은 부처로 하고, 반은 천존(天尊)으로 하면 다툼이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다툼이 있다."
길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종실과 외척은 각각 그 분수를 맡게 된다면 천하가 편안합니다. 지금 태자가 이미 세워졌는데도 외척(外戚)을 오히려 왕으로 삼으셨으니, 이는 폐하께서 그들을 몰아서 훗날에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며, 둘 다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충격적인 공포다. 앞으로 십 년이라니, 죽음이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방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공포, 새까만 죽음의 심연, 죽음이라는 것, 악취 때문에 염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이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결부되어 되살아난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홍씨의 악령 때문에 무서웠지만 지금은 자신의 죽음 자체와 밀착되어 몸이 떨려오는 것이다. 조준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가슴이 뛰고 끈적끈적한 땀이 전신에 흐른다. _ 박경리, <토지 12> , p338/590


 지난 7월1일부터 시작했던 토지독서챌린지. 연말이면 전체 일정의 60% 정도 지나게 된다. 토지 3부 4권(12권)을 마무리지으며 가장 인상 깊은 장면/대목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삶에의 의지', '생명(生命)의 약동'이라 여겨진다. 12권 이전에는 '삶'에 대비되는 '죽음' 이 인물의 퇴장 - 월선, 최치수 등 - 과 한 인물의 의지를 보여주는 도구 - 구천, 금녀 등 - 로 비장하게 묘사되었던 반면, 삶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설사 그려졌다 해도 임이네의 억척스러운 면으로 나타났기에 '죽음'에 비해 '삶'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렇지만, 3부 4권에서는 산 자들의 고뇌와 처절한 몸부림이 잘 묘사되면서 '죽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삶의 아름다움'이 표현된다. 조준구, 홍이, 명희가 각자 직면한 현실과 이를 넘기 위한 이들의 노력. 이러한 묘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의 엘랑 비탈(elan vital 생명의 약동)을 떠올리게 된다.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당기지 아니했던가.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_ 박경리, <토지 12> , p346/590


 아우성이다. 부서지는 파도다. 격렬한 감정이 출구를 찾듯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상현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조용하에 대한 증오도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 생명의 불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기나긴 숨결, 부패의 늪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2> , p420/590


 삶을 이어가려는 자신의 본능과는 달리 자신을 조여오는 주위 환경. 자신을 위협하며 조여오는 자연/사회의 위협에 대응하여 살기 위해 생명체들은 힘(에너지)를 쌓고 마치 연어가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상류로 올라가듯 흐름에 역행한다. 열역학 법칙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며 살아있음을 존재하는 연어의 움직임은 <토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악인(惡人) 조준구의 행동도 그의 독백을 통해 우리에게 개연성있는 행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생명의 약동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약동은 요컨대 창조의 요구로 이루어진다. 그 약동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창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을, 즉 자신과 반대되는 운동을 목전에서 만나기 때문이다.(p375)...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 전체는 그 본질적인 점에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다음에는 그것을 유연하고 변형가능한 관(管) 속에 풀어 놓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 관들의 끝에서 생명은 무한히 다양한 일들을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약동(엘랑 비탈)이 물질을 관통하면서 단번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p379)... 종 種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로부터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무수한 투쟁이 유래한다. 또한 놀랍고도 충격적인 부조화도 거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생명 원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_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 p380


  주변 환경과 인물들간의 갈등. 그리고 이로부터 드러나는 생명의 모습.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다소 대립되는 입장에 서 있는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와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의 내용을 거칠게나마 조합해보자면 인물들 주위환경은 엔트로피(entropy)법칙과 같은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반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이와 무관하게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토지>안에서는 최참판 댁의 자산을 탐하는 조준구의 욕망도,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기대했던 명희의 속내도 이러한 갈등의 결과가 아니었을런지.  


 

 현재의 모든 사건에서 그러한 것처럼 태초로부터 모든 작용력들이 여러 힘으로 분해되어 영속적으로 더욱 복잡성을 창출한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복잡성의 증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틀림없다. 진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고,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유익한 필수과정이다._ 허버트 스펜서, <진보의 법칙과 원인>, p90


 엄청나게 다양한 본성들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 사이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타고난 욕망을 지닌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안녕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모든 인간은 외부 자연 상태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인 '생명의 욕구', 즉 끝없이 만족을 갈구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경향이 사회 내부에서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는 그 사회를 파괴하는 확실한 동인이 된다. _ 토마스 헉슬리, <진화와 윤리> , P 40/173


 스펜서와 헉슬리의 이러한 일부 가정들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대략적으로 합류(合流)되는 느낌을 받는다. 생명 진화 자체는 법칙으로 작용하지만, 생명체는 우연성이 작용한다는 베르그송의 논리를 통해 일제하 식민시대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저마다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생명의 약동을 <토지>의 인물들을 통해확인하며 2021년 토지 독서 챌리지 마지막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단일성과 다수성은 무기물질의 범주들이며 생명의 약동은 순수한 단일성도 다수성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생명의 약동이 물질에 전달되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게 되어도 그 선택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리라는 것이다. 약동은 전자에서 후자로 무한히 도약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성과 연합이라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 생명의 진화는 전혀 우연적인 요인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생명의 본질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P388)... 사실상 생명체는 행동의 중심이다. 그것은 세계 안에 도입되는 일정량의 우연성 contingence, 즉 일정량의 가능적 행동이다. 그 양은 개체들에 따라 특히 종들에 따라 변화 가능하다. _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 P390


ps. 개인적으로 '엘랑비탈'을 느낄 때는 아침에 휴대폰 알람 소리를 들을 때가 아닐까 싶다. 침대에서 더 늦게까지 자고 싶어지는 마음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 눈을 뜨는 행동은 이에 반(反)하는 생명의 약동이라 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