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李正己, 본명은 李懷玉, 平盧절도사)가 군사를 파견하여 서주(徐州, 강소성 서주시)의 용교(甬橋, 안휘성 숙주시)·와구(渦口, 안휘성 회원현)를 막았고,
양숭의는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막으니 운송로는 다 끊어졌고 인심은 떨고 두려워하였다. 강·회(江·淮)의 진봉선(進奉船) 천여 척이 와구(渦口)에 정박하였으나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근래에는 큰 것에 힘을 쓰고 싸움을 즐기면서 성공과 실패를 돌아보지 않아서 집안이 멸망하고 몸이 도륙된 사람은 안록산과 사사명, 이들입니다.

12월 정축일(29일)에 이희열은 스스로 천하도원수(天下都元帥)·태위·건흥왕(建興王)을 칭하였다. 이때에 주도 등은 관군과 서로 대치하기를 몇 개월을 계속하여 관군은 탁지(度支)가 식량을 제공하고 여러 도(道)가 군사를 늘려주었으나 주도와 왕무준은 고립된 군대로 깊이 들어가 오로지 전열에게 공급해주기를 바라보니 주객(主客)이 날로 더욱 곤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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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작품(오징어 게임)에서  집중한 것은,  간결한  게임에서 오는 재미와 인물들의 의상이나  공간의  현란한 색상의 배치였다. 그리고 관객들은 정확히 이 지점을 관통하며 작품을 즐겼다. 그들은 작품에 등장한 게임을 직접 해보기 위해 게임의 룰을 찾고 달고나를 만들었으며, 작품 속 등장인물과 동일한 의상을 입고 즐거워했다. 이것이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현상이었고, 인기의 실체였다. 그렇다면 이 유례없는 인기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유희로 소비되기에  매우 유용한, 그러니까 남녀노소, 인종과 문화를 가리지 않고 특별한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배치했으며, 그것이 관객에게 마치 작품 내부에 속하는 것 같은 희열을 주기 적합했다는 결론일 것이다. 이 작품은 서사적 해석을 넘어 유희로서 작품을 즐길 수 있는 매우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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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25 0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놀이들이라 추억소환정도였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저런 유희로서 작품을 즐긴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겠군요.

겨울호랑이 2022-01-25 08:26   좋아요 0 | URL
^^:) 오징어게임 속의 게임을 즐기던 세대에게 그것은 게임이자 생활이었고, 자신의 삶의 일부이기에 그것을 객관화하기 어려움을 스스로 느낍니다. 반면, 그것을 처음 접하는 세대와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문화로 비춰지겠지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해당 기사는 이런 문화에 대한 비평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같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기사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되어 밑줄을 긋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지만,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킨 결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초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자유무역지대(FTA)‘였다.
- P222

630년 동돌궐의 붕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 상황은 태종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기존의 중원 왕조들처럼 장성 이내의 내지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반으로 유목 세력들을 통제해 대외적으로도 안정적 질서를 확보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았다. - P330

추장들은 당조의 관직을 제수 받고 이를 세습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위상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기미부주에 편제된 추장이 이 무렵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조의 대외 확장에 중요한 행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점이다.(p392)... 번장은 태종이 처음에 투항한 이민족 추장들을 모두 숙위의 장군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을 지방 군사령관인 도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이 무렵 당조의 대외 확장은 상당 부분이 번장이 이끄는 번부락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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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지고 이루도록 일을 내려주며 맡기면 누가 감히 힘써 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이와 같이 하면 어진 사람은 권하지 않아도 자연히 벼슬이 올라가고 불초한 사람은 억누르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가게 되어 많은 인재들을 모두 자리를 얻게 되어 관에서는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양염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상 앞에서 말하였다. "재화와 부세라고 하는 것은 나라의 큰 근본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며,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것과 편안해지는 것과 위태로워지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리하여 예전의 시대에는 모두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도, 오히려 혹 소모하는 것이 어지러워서 모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당 초기에 부세를 거두는 법은 조(租)·용(庸)·조(調)로써, 전(田)이 있으면 곧 조(租)가 있었고, 몸이 있으면 곧 용(庸)이 있었으며, 가호(家戶)가 있으면 곧 조(調)가 있었다. 현종 말기에 호적(戶籍)이 점차 무너져서 대부분이 그 실제대로 되어있지 아니하였다. 지덕(至德, 肅宗의 연호) 연간에 병사들이 일어나게 되자 있는 곳에서 부세(賦稅)를 거두어들이면서, 압박하고 재촉하며 처리하니, 다시는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백성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은 정남(丁男)이 많으면, 대개 관리가 되었거나 승려가 되어서 세금과 노역을 면하였는데, 가난한 사람은 정남이 많으면 엎드려 숨을 곳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상등(上等)의 호구는 넉넉하였고, 하등(下等)의 호구는 힘이 들었다.

애초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몇 해 동안 천하의 호구(戶口)는 열에 여덟아홉이 없어졌고, 주현은 대부분 번진(藩鎭)에게 점거되어 공물(貢物)과 부세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부고(府庫)는 다 써서 고갈되었고, 중국에 변고가 많아지자 융적(戎狄)이 매년 변경을 침범하니 있는 곳에는 많은 병사를 묵혀 놓고 현관(縣官, 조정)을 향하여 지급해 주기를 바랐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모두 유안(劉晏)에게 기대어 처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드는 비용이 실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오니, 헛되이 쓰는 비용이 너무 많습니다."
유안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큰일을 꾀하는 사람은 적은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무릇 일이란 반드시 멀리 생각해야 한다. 지금 처음으로 선박을 만드는 장소를 설치하였는데,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마땅히 먼저 그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쓰는 것을 궁색함이 없도록 해야 관(官)에서 쓰는 물건이 굳고 튼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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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조용하)도 조선사람으로서 결코 일본의 임금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 역사란 항상 기복, 운동이라 해도 좋겠습니다만 어떤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는데요(p352)... 역사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_ 박경리, <토지 14>, p353/708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 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유인실)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당하느냐 안 당하느냐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 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에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_ 박경리, <토지 14>, p354/708


 토지문화재단 독서챌린지 27주차. 이번 주에 읽은 <토지 14>에서 아내 명희가 떠난 조용하는 유인실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코 둘 다에게 즐거웠다 할 수 없는 대화는 우리에게 1920년대 당시 사회운동의 주소를 알려주기에 시선을 붙들기에 이번 주 페이퍼는 이를 다루려 한다. 일본 유학파 지식인으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조용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본질과 다르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인실에게 간파당하고 그의 논지는 여지없이 논파당한다.


 사실, 허세가 강한 조용하에게 1910년대부터 점차 거세지고 있던 노동자 주도의 사회주의 사상은 매력적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처럼 번졌던 민족자결주의의 열풍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흐름이었고, 많은 이들이 다수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지배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까지 이어지고 '인터내셔널'에 의한 세계통합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했던 시점임을 생각해본다면, 조용하의 이러한 생각들은 시대를 앞선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전형적인 편에 가까웠다.


 (1910년대 당시) 노동자당과 사회주의당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극도의 주의와 주목을 끌었다. 과거의 성장세에 근거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은 승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다수가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p247)... 1880년대 이래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들의 급격한 부상이 정달들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지지자나 구성원들에게도 흥분과 희망, 즉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_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p248


 다만, 외면적으로는 거대한 하나의 조직으로 보이는 '사회주의'였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결들과 흐름이 있었고, 이들은 각각 저마다의 전선(戰線)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서로 단결되어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의 힘으로 작동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희망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분화(分化)되었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점차 어두워져갔다. 형이상학적인 사회변혁의 이념은 눈 앞의 경제적, 정체적 조건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이즈음의 사회주의 운동은 보여주고 있었다. <토지>에서 이는 오가타와 인실의 다가갈 수 없는 간극으로 표현되는데, '민족'을 넘어선 '인류'를 강조하는 오가타와 '민족'을 우선시 하는 인실의 대화는 결국 이들의 사랑이 사상의 차이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함을 보여준다.


 실질적으로 노동계급을 관찰했던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가 동질적인 대중이 아니었다는 점, 심지어 한 나라 안에서도 동질적이기가 힘들었다는 점에 동의했다.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주도하에 구분했던 대중들 내의 분열은 너무나 커서, 이들이 어떠한 실질적인 통일된 단일 계급의식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배타적으로 남성들만이 근무했던 보일러 생산직과 영국에서 주로 여성들이 종사했던 면방직 간에, 그리고 똑같이 항구도시에 존재했지만 조선소의 노동자와 도크의 노동자 간에, 의류노동자와 건설노동자 간에 어떠한 공통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_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p249


 노동자들의 차이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민족, 종교, 언어의 차이는 분명하게 분열을 초래했다(p251)... 계급적 경험의 힘은 대단해서 복수의 노동계급 가운데 다른 어떤 집단에 대해 느끼는 노동자들의 대안적인 정체감은 계급적 정체감을 없앤다기보다는 그것의 입지를 좁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느끼긴 했지만 특히 체코인 노동자, 폴란드인 노동자, 혹은 카톨릭 노동자로 느꼈던 것이다. _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p252


  이처럼 개인적으로 인실과 오가타, 인실과 조용하의 대화 안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를 발견한다. 역사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자본주의의 붕괴와 이를 대신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출현. 이러한 낙관적인 개혁의 전망 대신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혁명의 모습은 민족주의를 통한 볼세비키 혁명이었다. 계급과 민족, 인종 등 모든 제약요소를 철폐하는 대신 민족주의를 통해 세력을 규합해간 공산주의 혁명. <토지>의 인실에서 공산주의 혁명가의 모습,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1885~1918)의 일면을 발견한다면 무리가 있을까. 한 걸음 나아가 이를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 ~ 1919)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 ~ 1932) 사이의 논쟁도 함께 소환할 수 있다.


 볼셰비즘은 사회주의 전통의 틀을 깨면서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숙명론을 뒤흔들었다. 이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의 불가피한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필연적인 출구가 아니었다. 그 대신 혁명을 만들어야만 했다. 단순히 역사법칙의 객관적인 결과가 아닌 까닭에 혁명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정치행동이 필요했다(p292)... 1917~1923년에 민족과 계급에 관한 서로 경쟁하는 주장들이 차르의 옛 영토에서 이러한 혁명의 동학을 형성했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을 배제하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었다. 민족의 유대에 대한 호소는 계급적대를 억누르거나 중요성을 깎아내리면서 노동계급의 정치학을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주도하는 광범위한 연합에 결합시킴으로써 사회주의자의 이탈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그러나 좌파 역시 발전하는 민족주의의 틀 내에서 차별적인 강령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민족연합의 지도부를 자임할 수 있었다. 아무튼 좌파는 좀더 온건하고 수세적인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었다. _ 제프 일리,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좌파의 역사> , p303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성장'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는 결코 위기 요소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적응 수단'이라 규정한 현상들 - 카르텔, 신용 체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 노동자 계급의 지위 상승-이 결코 자본주의의 위기를 완화시킬 수 없다고 파악한다... 노동조합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 격화된 자본 간의 경쟁은 노동자에게 더 큰 어려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법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 더 높은 벽을 세우고 있다. 따라서 혁명, 즉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_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p133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다음의 인실의 대화가 더 잘 이해된다.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라는 조용하의 물음에 대해, 당신같은 무늬만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신, 민족의 대한 의견을 밝히는 인실의 대화 속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와 함께 공산주의자로서 인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민족'을 중심으로한 사회혁명의 성격을 공산주의가 갖고 있었기에, 1930년대 무장독립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 하겠다.


 일본이 우리 땅을 강점하여 내 민족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데 대하여 반대하는 것을 사회주의라 한다면 저는 사회주의자겠지요. 조선은 지금 정권 운운할 처지도 아니며 국토는 잃고 민족이 말살되어가는 형편인데 반일이면 되는 거지, 기치를 선명히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우가 비단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에만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업과 노동자의 경우에도 생존을 외치고 권리를 주장하면 이런 경우 사회주의자라는 못을 박기도 하더군요. _ 박경리, <토지 14>, p344/708


 그건 남성 여성의 구별에서 제기되는 것이기보다 인간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약자니까 나보다 약한 자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리, 일종의 잔인성이라 할까요? 부당한 독재자나 암우한 군주가 살생을 일삼는 것도 바로 그 심리 때문일 거예요. 비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일본을 보세요. 그 나라 유산이라곤 칼 쓰는 것밖에 없지 않아요? 참으로 열등감이 치열한 민족이네요. 그네들이 일등국민 일등국민 하기 위해, 일등국민이 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살육을 계속할 거예요.  나는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4>, p359/708


 다만, 이러한 지식인들의 시대 인식이 공산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는 그들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었겠지만, 그것이 민중들의 인식과 직결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부분이라는 것도 <토지>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의 법칙을 말하는 지식인들의 논리에 대해 소지감의 독백은 역사의 법칙 역시 또하나의 작위이며 기만임을 비판하는 민중의식을 대표한다.


 혁명이란 무엇이냐. 애국하는 겐가, 애족하는 겐가. 하긴 요즘엔 애국을 생략하는 축도 있고 민족을 인간으로 대치하는 축도 있긴 있더라만 결국 공평하자는 거다. 고루 나누어 먹자는 거다. 그게 바로 정의 아닌가.(p27)... 실패한 자는 정의를 환상한 자였느니, 희생된 자는 정의의 사슬로 발목을 묶였던 수많은 백성이었고, 성공한 자는 정의를 칼끝에 꽂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 자였느니라. 하항, 그러면 역사는 무엇이냐. 역사란 정의를 날조한 문서다._ 박경리, <토지 14>, p28/712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오가타와 조용하, 그리고 이들 모두를 비판하는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인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비판하는 소지감. 이들의 대화와 생각은 당시 시대상을 잘 녹여내면서 우리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사회주의 운동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을 듯 하지만,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기사는 100년 전과는 다른 이유로 쇠퇴해가는 좌파 운동의 이유를 짚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다름 의미있는 작업이 될 듯하다. 이에 대한 내용과 사회주의에 대한 더 깊은 내용은 다른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고 독서 챌린지 페이퍼는 여기서 갈무리하자...


 어떤 것이 물러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독차지한다. 전쟁 직후 5% 미만이었던 고학력자 비율이 오늘날 유럽과 미국에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고학력자들은 선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미 기득권층인 그들은, 정치적 승리를 위한 연대가 절실하지 않다... 1950~1960년대에는 부유층과 고학력자들이 우파에, 빈곤층과 저학력자들이 좌파를 지지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전문직업인이나 기업 간부들이 좌파에 투표한다. 이들은 부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을, 종종 반대방향으로 이끈다. _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월호>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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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23 16: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토지 뒷부분에 가면 이런 당대 사회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았던게 기억나네요. 아마도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가 이런 논의를 도저히 뒷편으로 밀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다만 책이 지식인 세대로 축을 옮겨가면서 토지의 앞부분이 가지고 있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묘사는 약해진듯했습니다. 어쩌면 당대 지식이들의 세계 인식이 그만큼 얄팍했다는 반영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토지를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다시 읽는듯한 느낌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1-23 19:50   좋아요 4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서희가 진주를 배경으로 한 시점부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작품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변화는 4부가 쓰여진 시점이 80년대 군사정권 하의 상황이었다는 점과도 연관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시대정신을 박경리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일요일 저녁 잘 마무리지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