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사는 길고도 긴 밤이 끝나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밤이기보다 깊이 모르게 파여 내려간 계곡 이쪽 저쪽에 매어 놓은 동아줄을 타고 가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계곡 바닥에서는 용의 혓바닥 같은 지열이 솟아오르고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달려오고, 방금 보았던 광경이 긴 밤 저쪽에서, 긴 동아줄 저쪽에서 마치 서산 마루에 가라앉기 시작하는 불덩어리, 붉은 해같이 떠오른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혼합된 것이었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어우러짐, 그 광경은 혈흔같이 축소되기도 했고 시뻘건 탁류같이 확대되어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온통 붉은 빛, 미친 빛깔, 진홍의 제전 같은 것, 붉은 광무(狂舞)...... 밤은 가는데 어둠이 내려온다. 서서히 안개비가 내리듯이 어둠이, 정수리에서 발끝을 질러나가는 점막이, 모든 것이 정지된다. _ 박경리, <토지 20> , p562/608(4/29)


 <토지> 독서챌린지 40주차이자 마지막 페이퍼. 이번주 미션 주제는 '토지를 마무리하는 소감'이다. <토지 20>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처럼 끝난다. '온화, 원망, 이끄시는 대로'의 꽃말을 갖는 해당화를 서희가 휘어잡으며 마무리되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친일과 독립투쟁의 지원이라는 양면을 모두 갖는 서희 자신이 짊어졌던 삶의 고뇌가 끊어지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많은 인물들의 화해가 사람들간의 만남을 통해서 또는 관음상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산에 숨어든 사람들 사이에 빚어진 갈등은 이어질 민족간의 대참상의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랐을까. 둑길에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중 한 사람이 앞서가며, "일본이 항복했소!" 하고 외쳤다(p584)...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_ 박경리, <토지 20> , p586/608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氷河)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은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縱]과 자리[橫],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_ 박경리, <토지 20> , p342/608


  <토지>를 읽으며 계속 들었던 의문이 있었다. 월선의 죽음과 간도로부터 돌아오는 옛 평사리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토지 2부와 진주로 돌아온 이후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점이었다. 2부 이전과 3부 이후에서 느껴지는 작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평사리에서 간도로 이주해서 다시 진주로 돌아오는 2부에서는 공간적인 이동이 주된 흐름이라면, 3부 이후에서는 일제 하에서 시간적 흐름이 강조된다. 또한 2부에서는 공간적 이동 속에 개인 감정과 행동이 미시적으로 보여진다면, 3부 이후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개인의 존재는 작아지는대신 새로운 주체로서 민족,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일본 문화에 대한 비판 등의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2부와 3부 사이에 갈라진 '틈'을 발견한다. 결코 작지 않은 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을 수 있다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그 무엇이 있을까?


 천수를 다하고 간 늙은이 죽음이 뭐 그리 애절할 리도 없고 가족을 제외하고, 영팔노인으로서는 동료들을 다 먼저 보낸 처지인 만큼 인연 맺은 사람도 드문 터에, 더더구나 애통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누구의 죽음이라서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땅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목숨의 명운을 너 나 할 것 없이 생각하며 말없이, 더러 떠드는 사람이 있어도 그 음성은 공허하게 텅 빈 것만 같은 산속에서 울리다간 사라진다. _ 박경리, <토지 20> , p408/608


 이에 대한 하나의 답(答)을 <토지> 독서챌린지 직전에 이뤄진 작품 해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해설 후 Q&A 시간에 김연숙 교수는 (여러 답이 있겠지만) 자신은 '인간(人間)'이라는 답을 주셨다. 토지에 등장하는 600여 명의 사람들이 각기 저마다의 생각과 행동으로 <토지>의 전반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내고 있기에 <토지>를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이라는 설명이었다. 개인적으로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었다.


 이를 받아들여,  <토지>의 구도에서 시간을 '하늘(天)'로, 공간을 '땅(地)'으로 치환한다면, 그 사이 인간이 있는 구도가 될 것이다. 천/지/인이 만드는 작품 세계. 이것이 <토지>의 세계일까. 더 나아가 이로부터 건(乾)괘와 곤(坤)괴로 시작하는 <주역(周易)>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 만물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힘들이 인간들에게 작용해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은 나머지 62괘에 대응하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런지.  그렇게 본다면, <토지>를 <역易>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드시 이러한 관점과 맞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 해설서 중 하나는 음(陰)과 양(陽)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법도 있음을 알려준다. 


 <역 易>은 건괘와 곤괘로부터 시작한다. 건괘와 곤괘 그리고 나머지 62괘. 총 64괘다... 건곤은 <역> 이라는 책으로 들어가는 문이면서 동시에 '변화'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건곤은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힘이다. 정이천은 건괘에서 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건은 천天이다. 천은 하늘의 형체를 말하는 것이고, 건은 하늘의 성질이다. 건이란 강건함이니, 강건하여 쉼이 없는 것을 건이라고 한다."... 하늘이 기능하는 성질이 건乾이며 건建 이다. 그렇다면 땅이 기능하는 성질이 곤坤이고 순順이다. 그러므로 건곤이란 천지라는 우주가 작용하는 힘과 기능이다. 이 두 가지 힘이 천지만물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건곤은 전체 생명의 궁극적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란 뜻이다. 동시에 건곤은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물과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대립적인 개념쌍이기도 하다. _ 정이천, <주역 역전> , p18 범례


 <토지>의 경우, 외적 행동과 대비되는 말씀과 대화와 지적 담론의 역할에 대한 작가의 사고가 치밀하게 형상화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작품은 1부에서 가장 행동이 치열하고 2부에 이르면 그 정도가 완화되며 3부에서는 사건들이 분산된다는 느낌을 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1부와 2부의 사건 전개에서 말씀과 대화는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흩어져 있다. 이에 비해 4부와 5부에서 말씀과 대화는 왕성하게 펼쳐지고 하나로 통일되며 행동의 측면은 약화된다. 행동과 말씀이 서로 간에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나면서, 또는 태극의 음양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쪽이 약화되고 다른 쪽이 강화되면 반대쪽이 약화되면서 작품이 진행되는 것이다. _ 최유찬, <박경리의 <토지> 읽기> , p135


 겨우 1번 읽은 것으로 작품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응로 여겨진다. 여태까지 읽은 <토지>가 완독(完讀)에 치중했기에 큰 흐름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부분, 작품 안에 담긴 여러 소주제에 대한 고민은 독서 챌린지를 마무리하는 지금 아쉽게 느껴진다. 이에 대해서는 틈틈히 보완하는 것으로 하고, 10개월에 걸친 독서 챌린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생생지위역 生生之謂易.


 역易에 최종적인 끝과 완성은 없다.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이다 終則有始". 그래서 마지막 64번째 괘가 미제(未濟)다.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다' 혹은 '아직 다스리지 못했다'는 의미다. 기제가 곧 미제인 것이다.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미완성이다. 끝일아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처음의 건곤으로 돌아가 새로운 창조와 실천으로 혁신해야 한다. 건곤은 모든 변화와 생성을 일으키는 시초다. 역에는 완성과 종말이 없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다시 생성하는 역동적인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_ 정이천, <주역 역전> , p18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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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01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의 10개월에 이르는 긴 여정으로 토지를 읽으셨네요. 읽어 내시는것도 힘든데 거기에다 챌린지로 글도 쓰셔야하는 여정인데도 아주 입체적인 책읽기를 계속 하신 겨울호랑이님!
그동안 수고하셨고 좋은 글 많이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1 14:40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매주 과제에 강제로 끌려왔네요 .덕분에 겨우 읽었습니다만, 부족함이 많습니다... 다만, 부족함을 알게된 것을 소득이라 한다면 더 채우도록 과제를 부여받은 독서챌린지였다고 정리하게 됩니다. 참 갈길이 멉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2-05-01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래 주역을 어설프게 어슴푸레 알게 되었는데요, 알수록 참 매력있는 사상인 것 같습니다. ㅎㅎ
서양 사상보다 훨 깊은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01 16:10   좋아요 1 | URL
저도 잘 알지 못하니 참 조심스럽습니다만, 철학이라는 부분에 한정해서 본다면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다만, 서양에 전래된 주역이 이진법과 같은 부분으로 서양과학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부분이 컴퓨터, 파동이론, 양자학까지 확장/연결된다고 본다면 (그래서, 서양철학+서양과학 vs 동양철학 구도로 본다면) 쉽게 가늠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2-05-01 17:40   좋아요 1 | URL
괘가 서양 이진법의 기원이군요. ^^
그런거 같습니다. 괘가 웬지 모르스 부호를 닮았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22-05-01 17:43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과거 문명교류의 흔적들이 여러 곳에서 남아 있는 듯 합니다.^^:)

mini74 2022-05-01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0주라니 대단하세요. 토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군요. 겨울호랑이님이 소개하신 인간이란 주제, 음양의 주역, 재미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더 호랑이님 *^^*

겨울호랑이 2022-05-01 17: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토지를 읽은 사람들만큼 해석의 길이 저마다 다를 것 같아요. 또, 같은 사람이 읽어도 읽을 때마다 분명 시선이 멈춰지는 부분이 다를 것 같네요. 그런 면에서 토지는 분명 여러 번 읽을 작품이라는 생각을 이번 독서 챌린지를 통해 배웠습니다.^^:)
 

첫번째는 개신교의 권력화 메커니즘이 보수주의와 불가분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장치로서 개신교는 보수주의를 재생산하며, 거꾸로 개신교의 보수주의가 권력의 메커니즘으로서 개신교를 작동시킨다. 두번째는 개신교 권력의 장치는 대형교회와 불가분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형교회가 없다면 개신교는 권력의 장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거꾸로 개신교의 권력화는 대형교회를 탄생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또한 개신교의 권력화는 주로 지적·사회적 자원을 과점한 이들의 현상이지만, 한편으로 개신교는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의 반지성주의적 신앙을 동원해 정치화함으로써 그런 권력자원의 과점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 책의 세번째 주제는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한다.

한국 교회 신도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지만, 여성이 교회사역자가 되기는 쉽지 않아요. 여성 목사를 허용하지 않는 교단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 목사 제도가 있는 교단도 실제로 교회 내에서 여성 신도조차 여성 목사 부임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아요. 여성은 어쨌든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생각 때문에, 여성 지도자를 여성들 스스로도 거부하는 거죠.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움직여나가는 두가지 권력구조가 있습니다. 강단권력(preaching power)과 교수권력(teaching power)이에요.

너무 쉽게 들키는 조야한 권력이 한국 개신교와 깊게 결합되어 있어서 한국 시민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포함한 전통적 권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된 것 같습니다. 동성애 혐오주의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교인들조차 자기 종교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고, 실제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한편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성직자중심주의가 정말로 실재하는가’라는 부분입니다. 의전상으로는 분명 존재하죠. 그런데 대형교회에서 강한 권력을 장악하던 이들이 속속 은퇴하고 있고, 그 후임자들은 아직 실권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창업자들의 후광을 입고 있죠.

교회의 재정 문제는 단지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의 부당한 재정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습니다. 대개는 숨어서 비자금을 조성하더라도 적발될 가능성이 있는데 교회는 감사를 받지 않아 그럴 가능성이 극히 낮은 거예요. 교회의 재정을 담임목사와 재정장로, 그리고 특권적인 교인 몇 사람 정도만 알아요. 일반 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장로도 교회 장부를 열람할 수 없죠.

한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개신교·가톨릭 등을 포함한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치나 민주주의 구조를 만드는 데에는 강력한 영향을 미쳐요. 차별금지법 문제만 해도 개신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죠. 민주국가에서는 전부 받아들여진 기본적인 인권 조항이 개신교 세력 때문에 통과되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많아질 거라는 둥 너무나 비논리적인 이야기들이 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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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광의 <자치통감> 294권을 마치며 간략하게나마 이를 정리한다. 전국시대부터 5대 10국까지의 1300여년 시기동안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끊임없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온 중국의 역사에는 일관되는 사람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평론가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사가가 처한 현실이 과거와 같지 않기에 다른 인과의 끈으로 구슬을 엮고, 목걸이를 만든다는 교훈. 


 역사를 과거에 대한 현재의 재해석으로 바라보고,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E.H. 카의 저서 속에서 이미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번 <자치통감>을 읽으며 우리가 만나는 과거가 하나의 과거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독자가 살아가는 현대사가 아닌 다음에야 저자의 사관(史觀)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통역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양자는 한비자를 군자로 보고 있어서 그가 뜻을 가지고 있으면 되었지 받아들여지고 아니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광은 한(韓)나라 사람으로 진(秦)을 위해 정책을 제시한 점을 몹시 나쁘게 보고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한비자와 몽념에 대한 평가에서 사마광은 한비자는 충성심이 없다고 비판하고, 몽념은 의롭다고 칭찬한데 대해 양자는 한비자는 능력있는 사람이고, 몽념은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평론하여 각기 보는 시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마광이 역사를 보는 시각은 도덕적 시각, 특히 유가적(儒家的)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375/957


 <자치통감>의 저술은 사마광이 역사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고도 정치적 목표와 황제를 교육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p407)...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려는 이유는 철저하게 '제왕을 위한 책'을 만들려는 것이다. 제왕은 시간이 없어 긴 책을 읽을 수가 없으니 제왕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하는데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싣겠다는 것이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410/957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p50)



 여기에 더해 독자가 처한 현실 역시 유동적이기에 '역사적 현실 - 해석된 과거 - 읽는 현재'라는 3개의 역사축(軸)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또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자치통감> 마지막 글을 읽으며, 어제 대통령 인수위의 소상공인 손실보상 공약 파기 뉴스가 떠오른다. 이와함께, 파기된 손실보상을 조금 일찍 시작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혼란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함께 느낀다...


 회남에 기근이 들어서 황상이 쌀을 그들에게 대여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백성들은 가난하여 아마도 갚을 수 없을까 걱적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백성은 나의 자식인데 어찌 아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아버지가 그들을 위하여 풀어주지 않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반드시 갚으라고 책임 지우려는데 있겠는가? _ 사마광, <자치통감 294>, 中

 관련기사 :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40849.html


PS. 역사서를 거치지 않고 현실의 역사를 체감하는 상황이 우리가 진실을 접한다는 사실을 보장할 수 있을까. 사실의 왜곡과 편향된 사실의 조명 그리고 이를 천명(天命)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기제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깝다'가 '진실과 맞닿아 있다'와는 다름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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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29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작업을 끝내신건가요^^ PS에 덧붙인 글까지 정말 공감하는 글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이전 글까지 짬짬이 읽어볼 참이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29 09: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일단 읽긴 했는데, 읽고 나니 큰 줄기와 부족함만 남습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기전체 역사서를 다시 들여다 보며 조금은 그 줄기에 살을 붙여볼까 싶습니다. 거리의화가님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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