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정신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적개심에서건 경쟁심에서건 다른 사람들에게 인간 정신이 할 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견해를 갖게 했다. 한쪽에서 앎에 대해 극단으로 갈 때, 다른 쪽에서는 무지에 대해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만사에 절제를 모른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아니면 멈추기를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게끔 말이다.



그토록 무심하고 고요하게 자기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후세가 그를 그만큼 더 평가하게 할 만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정의 가운데 운명의 여신이 그의 죽음을 위해 마련한 영광만큼 정의로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은 그의 죽음을 야기한 자들을 너무 혐오한 나머지 마치 파문당한 자들을 대하듯 그들을 피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래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죽음을 죽음 자체 때문에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죽음은 삶 못지않게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분이다. 죽음은 대자연의 작업이 다채로이 펼쳐져 가는 것을 보장해 주며, 이 세계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상실과 파멸보다 생성과 증식에 더 기여하는 것을 볼 때, 대자연이 무엇을 위해 우리 안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심어 놓았겠는가?

자연이 준 앎을 넘어서는 저 모든 학문이란 다소 공허하고 군더더기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소용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짐이 되거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셈이다. C "건강한 정신은 대단한 학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세네카) B 그것은 칠칠맞지 못한 하인이 공연한 흥분 상태인 듯, 우리를 섬겨야 할 정신이 과도하게 열에 들떠 있는 상태이다.

마음을 모아 보라. 당신은 당신 안에서 대자연의 논거를 보게 되리니, 그것이야말로 필요한 때가 되면 당신에게 가장 적절하게 소용이 될 진실한 것이다. 바로 이 논거를 빌려 농부도, 또 어떤 민족들은 그 전체가 철학자처럼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강력하고 유리한 자질을 내가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는 아무리 되풀이 말해도 부족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움을 짧은 폭정이라 했고, 플라톤은 자연의 특혜라고 불렀다. 신뢰도에 있어서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자질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들의 사귐에 있어서 그것은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아름다움은 앞으로 치고 나서며, 대단한 권위와 경이로운 인상으로써 우리의 판단력을 유혹하고 점령해 버린다.

우리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학문이 주는 가르침은 대부분 굳건함보다는 겉치레이며 내실이기보다는 과시용이다. 우리는 대자연을 버렸으며, 그에게 선생 노릇을 하려 드는데, 우리를 그토록 운 좋게 또 안전하게 이끌어 온 것은 대자연이 아니던가.

어떤 학문이건 간에 그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들만이 그 어려움과 모호함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려면 일정 수준의 지력이 필요하며, 문을 밀어 봐야 비로소 그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아픈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병의 도움 없이도 죽음은 너를 능히 처분한다. 어떤 이들은 병이 죽음을 멀리 떼어 놓기도 하는데, 자기들은 이제 다 끝나 죽어 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더 오래 살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상처들이 그렇듯, 치료해 주고 건강을 돌려 주는 병들도 있다.

젊은이들에게 충고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움직일 것, 그리고 조심할 것, 두 가지이다. 우리의 삶이란 그저 움직임일 뿐이다. 나는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며 무슨 일에나 꾸물거린다. 일어나는 것도 잠자리에 드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다 그렇다. 7시는 내게 너무 이르며, 내 뜻대로 일과를 정하는 곳에서는 11시 전에 아침을 드는 일도 없고, 6시가 넘어야만 저녁을 먹는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해서 불평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너 한 사람에게만 불의한 법을 적용하려 들면 그때는 투덜대라."(세네카)321) 어떤 노인이 완벽하고 힘찬 건강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시 말해 청춘으로 돌려 달라고 신에게 빌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라.

피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삶이란 이 세상의 조화로움이 그렇듯이 서로 모순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감미로운 소리와 거친 소리, 날카로운 소리와 나지막한 소리, 여릿한 소리, 장엄한 소리 같은 갖가지 음조들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중 한 가지 방향으로만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다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겠는가? 그는 마땅히 양쪽 모두를 함께 쓸 줄 알고 또 섞어서 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이 함께 있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쓸 줄 알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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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과 감사를 받아 마땅했던 이들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내 앞에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그들이 계시니 나는 더 잘, 그리고 더 정성스럽게 그분들에게 갚아 드리는 셈이다.

옛날 저 델프의 신이 우리에게 했던 명령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대 내면을 바라보라, 그대를 알고자 하라, 그대에게 집중하라. 그대의 정신과 그대의 의지는 지금 다른 곳에서 소모되고 있는데, 그것을 그대 안으로 가져오라. 그대는 그대 자신을 흘려보내고 흩뿌리고 있다. 그대의 밀도를 높이라, 그대의 고삐를 죄라. 사람들은 그대를 속이고 있고, 산만하게 하고 있으며 그대에게서 그대를 훔쳐 가는 중이다. 이 세계는 그 모든 시선을 늘 안으로 향하고 있으며, 자기를 명상하기 위해 늘 눈뜨고 있다는 것이 너는 보이지 않는가? 안으로건 밖으로건 너에게는 늘 헛됨뿐이지만 외부로 덜 뻗으려 할수록 그 헛됨은 줄어들리라.

아무도 자기 돈을 남에게 나눠 주지는 않지만 누구나 자기 시간과 자기 삶은 나누어 준다. 이런 것에 대해서만큼 우리가 후하게 구는 것도 없지만, 이런 것을 인색하게 아끼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익하고 또 칭찬할 만한 태도일 것이다.

날카롭고 격렬한 욕망은 우리의 기획을 수행해 가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되며, 결과가 지체되거나 불리할 때 우리를 초조함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의 협상 상대들을 향해 앙심과 불신에 사로잡히게 한다.

반면 자신의 분별력과 자질만으로 일을 처리하는 자는 훨씬 즐겁게 임한다. 그는 경우에 따라 필요하면 아닌 척하기도 하고 슬쩍 피하기도 하며 마음껏 미루기도 한다. 실패를 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아파하지 않으며, 온전히 새로운 계획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항상 고삐를 제 손에 쥐고 간다.

우리의 필요와 소유를 더 확장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우리를 운명과 역경의 타격 앞에 드러내놓게 된다. 우리 욕망의 무대는 가장 손쉽고 바로 인접해 있는 즐거움들의 좁은 테두리 속에 제한되고 한정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너무도 선동과 과시를 위해 만들어진 탓에 선함, 절제, 평정심, 지조 같은 고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자질들에 대한 감각을 잃고 말았다. 거친 물체는 느껴지지만 매끄러운 것은 다룰 때 아무런 감각이 없다. 병은 느껴지지만 건강은 거의 혹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진실과 허위는 얼굴도 비슷하고, 태도나 맛, 거동도 닮아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 생각에 우리는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데 느슨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 칼에 찔리게 하려고 부러 애를 쓰고 있다. 우리는 허공에 섞여 들기를 좋아하니 우리 자신의 존재가 허공과 닮아 있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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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으로 상상해 본 저 모든 정치 체제의 묘사는 분명 우스꽝스럽고 실행에 옮기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최선의 사회 형태와 우리에게 적용할 가장 적절한 규칙을 두고 벌이는 저 거창하고 장황한 논쟁들은 우리 정신을 훈련시키는 데만 적절할 뿐이다. 마치 교양 과목 안에 그 본질이 정신적 자극과 토론에 있고 그것을 떠나서는 어떤 생명도 없는 주제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유의 정치 체제 묘사는 새로운 세계에서라면 적용해 볼 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구속된 인간들, 이러저런 관습에 맞게 형성된 인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생각으로가 아니라 진실로, 뛰어난 최선의 정치 체제는 어느 나라에나 지금 그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체제이다. 그 모습과 본질적 이점은 관습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나 민주 국가에서 소수의 지배를 혹은 왕정체제에서 다른 종류의 정부를 계속 희구한다는 것은 오류이고 얼빠진 생각이다.

혁신만큼 한 나라를 짓밟아 놓는 것은 없다. 변화란 불의와 학정에 모양새를 갖춰 줄 뿐이다. 어떤 부분이 삐끗 떨어져 나오면 우리는 그것을 받쳐 줄 수 있다.

누구든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그저 치워 버리려고만 하는 사람은 생각이 짧은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다음에 꼭 선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또 다른 악이 따라올 수 있으며, 혹은 더 나쁜 악이 올 수도 있으니 카이사르를 살해한 이들에게 닥친 경우가 그러했다.

흔들리는 것은 어느 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커다란 조직의 구조는 수많은 못이 지탱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고색창연함으로 버티고 있기도 하다. 마치 오래된 건물이 시간에 의해 그 기초는 낡아 없어지고 외장도 접착제도 사라졌는데, 그래도 살아남아 자신의 무게로 지탱되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라는 것이 길다고 하여 더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죽음은 짧은 것일수록 더 낫다고 한다. 나는 죽음이라는 상태 앞에서 움츠러들고 있다기보다 죽는 것과 친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단단히 챙겨 입고 폭풍우 속에 따뜻이 안기면, 그것은 순식간에 느낌도 없이 나를 덮쳐 내 눈을 감게 하고 나를 쓸어가 버리리라.

우리를 세상에 들어서게 하는 순간에 지혜로운 여성, 산파가 필요하듯이, 세상에서 나가는 순간에는 훨씬 더 지혜로운 어떤 사람이 꼭 필요하다. 지혜롭고, 나아가 벗인 그런 사람은 이런 순간 도움을 얻기 위해 아주 귀한 값으로 사들여야만 하리라.

기쁨은 확장시켜야 하지만 슬픔은 가능한 한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이유 없이 동정을 바라는 사람은 막상 이유가 있을 때는 동정해 줄 수가 없다. 항상 탄식하는 사람은 결코 동정받지 못하니, 너무 자주 불쌍한 사람 노릇을 하는 바람에 누구에게도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데 죽은 자 노릇을 하는 사람은 죽어 가는데 살아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노쇠란 홀로 있기를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나는 과도하리만큼 사교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내 거북한 모습을 거두어 들이고, 나 홀로 그것을 품으며, 내 몸을 웅크려서 마치 거북이처럼 나의 껍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나는 사람들에게 들러붙지 않고도 그들을 보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죽음도 내 삶의 평안함과 안락함에 제 몫을 지니고 있으면 싶다. 죽음은 삶의 커다란 한 부분이며, 중차대한 것이니 앞으로 남은 이 부분이 지나온 삶과 너무 다르지 않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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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드높아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결단성에서, 지혜에서, 건강에서, 그리고 또 부유함에서이며, 그것도 절제되고 조심스럽게, 나를 위해 적합한 방식으로 성장해 가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자기 아래 몸을 굽히게 하는 일이 이렇게 편하고 맥없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온갖 즐거움의 적이다. 그것은 미끄러지는 것이지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자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시대는 뒷걸음질을 쳐야만, 시대와 일치하기보다는 불일치함으로써만, 비슷해지는 것보다는 달라짐으로써만 우리를 개선할 수 있는 때이다. 좋은 본보기들에서 배우는 일이 거의 없으니, 나는 나쁜 본보기들을 통해 배우는데 그런 경우가 일상적이다.

내 생각에 우리 정신의 가장 비옥하고 자연스러운 훈련은 대화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삶의 다른 어떤 행위보다 더 달콤한 경험이라고 여긴다. 바로 그 때문에 만일 지금 내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듣고 말하는 능력을 잃느니 시각을 잃는 쪽을 택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내 생각에 행운과 불운이야말로 두 가지 으뜸가는 힘이다. 인간의 지혜가 행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생각이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제 손으로 자기 일의 경과를 통제할 수 있다고 뻐기는 자의 기획은 공허하다.

더 나아가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우리의 지혜 자체도 또 우리의 궁리도 대부분 우연에 의해 이끌려 간다고 말이다. 나의 의지나 나의 추론은 때로 이렇게 때로 저렇게 흔들리며, 이런 동요는 많은 부분 나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적의 칼에 달려드는 나머지 그의 일격이 원래보다 더 깊이 찌르게 도와주는 수도 있다. 예전에 내가 설전을 벌이는 중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된 반격이 내가 원했거나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정통으로 상대를 찌른 경우들이 있었다. 나는 그저 [길이를 생각하며] 말의 수를 채웠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무게로 받아들인 것이다.

좋은 노래를 한 곡 듣는다고 즉시 훌륭한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멋진 연설을 듣는다고 전장에서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무엇에든지 당신이 거기 손을 대려면 오랜 동안의 한결같은 훈련을 통한 도제 학습을 먼저 해야 하는 법이다.

지혜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고 불만족스럽고 두려운 상태로 만들어 두는 데 반해, 고집스러움과 무모함이 그 주인들을 기쁨과 자신감으로 채우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재앙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말문이 막히면 음성과 표정이 바뀌며, 자신을 수습하는 대신 무례하게 화를 냄으로써 그들의 허약함과 초조함을 드러내고 만다. 장난스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때로 상대방의 약점이라는 비밀스런 심금(心琴)을 집어 뜯는 수가 있는데, [이 마음의 현악기는] 평상시에는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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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드러진 것은 개인정보 활용 등 프라이버시 문제다. 한국은 봉쇄나 재택명령 대신 확진자와 접촉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잠재적 감염자들을 선제적으로 검사하는 3T 방식을 택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기본권 제한이 약하지만, 사생활의 보호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측면에서는 기본권을 크게 제약한다. 서구에서는 이 방식이 불가능했다. 추적을 위한 정보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요구 정도가 매우 높아서 실행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바이러스는 모두에게 재난이었지만 그 영향은 불평등했다. 특히 장애인·홈리스·이주노동자·요양원 수용자·기저질환자 등 차별받던 의료 취약계층에게는 더한 차별이 닥쳤다. 이들은 정부가 지정한 고위험군·집중관리군에 포함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이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정부 관리와 사망자 통계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된 죽음’이었다.

질병의 원인을 도덕화하는 오랜 습속과 혐오를 조장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토양이 접속하자 혐오는 마치 증식숙주 속의 바이러스처럼 폭발적으로 창궐했다. 경기도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2020년부터 2022년 1월까지 4회에 걸쳐 경기도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기도 코로나19 심리방역을 위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초기에는 확진 자체와 관련이 있는 중국인, 신천지 교도, 성소수자 등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방역수칙 위반자, 백신 미접종자 등 특정 행위 관련자들에게 혐오가 가해졌다.

혐오와 비난을 줄인 것은 결국 유행의 장기화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코로나19를 둘러싼 방역정치는 정당 간 대립의 맥락 속에서 과잉정치화되었다. 한쪽에서 "세계가 감탄한 K-방역"을 자찬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 최악 ‘허망한 K방역’"이라는 비난으로 맞섰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수정당 지지자에 비해 권력의 억압을 훨씬 더 촉구하는 역설은 ‘방역정치의 정당정치화’라는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K-방역의 성공은 세월호참사와 메르스사태 때 국민의 생명을 방기한 보수정권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 진보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였다. 훼손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급격한 기후위기는 채굴 분야에 투자한 이들에게 경제적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세계관에 투자한 이들에게는 우주론적 위협이 된다. 기후변화는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로, 공짜는 없다는 것, 인간이 (특히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 한쪽만 이득을 취하는 일방적인 관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행동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굴착과 추출은 이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튼튼한 구조물?해안도시, 고속도로, 석유굴착기 등?조차 취약하고 허약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추출주의적 사고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뿌찐, 트럼프, ‘자유호송대’의 공통된 우주관을 감안하면, 이들이 저마다 다른 지역에 살고 다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독성이 덜한 향수(鄕愁)를 되찾는다고 해서 독성이 강한 향수의 힘을 물리칠 수는 없다.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제국주의적 침략, 우익 사이비 포퓰리즘, 그리고 기후붕괴를 동시에 야기하는 세력과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싸움과 매우 흡사한 것이 그린뉴딜이다. 그린뉴딜은 현 체제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버려지고 오염된 지역사회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저렴한 친환경주택과 좋은 학교를 짓는 등 의미있는 일을 하는, 가족을 지원하고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사업장에 투자함으로써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책이자 운동이다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는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대체할 화석연료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다. 그 위기는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 우리 모두가 여전히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요동치는 시대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많다.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도록 내버려둘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한때 강대국이었던 나라들을 비난하는 근시안적 사고에 대해. 어떤 땅과 목숨은 침범하고 버려도 되고, 다른 어떤 땅과 목숨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서구 언론의 기괴한 이중잣대에 대해.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위기가 되고, 또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 대상국에 위기로 작용하는가에 대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의지에 대해. 그리고 자기 결정과 영토 보전을 위한 어떤 싸움은 영웅적인 것으로 칭송받고, 또 어떤 싸움은 테러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해. 벌거벗은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내 연안 양식장이 직면하고 있는 또다른 과제는 해양 쓰레기다. 어민들이 살고 있는 어촌 주변 바닷가에는 파도에 밀려온 플라스틱이나 양식장에서 사용하는 어구인 흰색 부표가 많다. 어쩌다 치운다고 하더라도 조류에 밀려온 다양한 해양 쓰레기가 금세 해안에 수북이 쌓인다. 도시에서 살다가 귀어한 어민들의 경우 처음에는 작업 중 나오는 쓰레기를 되가져오려고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바닷일의 고됨이 누적되고 시간에 쫓기게 되면 결국 바다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게 된다. 다른 어민들은 자연스럽게 버리는데 자신만 쓰레기를 되가져오는 게 혼자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방치하는 문제는 귀어 초기 어민들이 이전 세대와 갈등을 겪는 주제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출산은 죽음을 환기할 만큼 어머니와 자녀 모두의 취약성이 극대화되는 시간이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명의 취약성에서 오는 불안까지 동반하는 복합적 노동일 수밖에 없다.

임대병영’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독일제국의 주택정책은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던 임대인 단체나 임대차제도를 넘어 생산과 관리 영역에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사회개혁가 등의 출현과 쟁명 속에서 전개된다.

주택공익성 개념과 소유권이 계속 충돌했던 서독에서는 규제와 해제가 긴장 속에 반복된다. 전후 복구시기 과거의 주택강제경제를 철폐하면서도 사회주택의 공급과 주거보조비의 확대를 통해 국가 개입의 끈을 튼튼히 잡았던 것이 보수진영의 입장이었다는 점은 ‘사회국가’ 독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후 서독에서는 1960년대의 규제완화로 임대료가 폭등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때처럼 민간부문의 건설 활성화도 이룩하지 못했고 결국 1971년에 다시 임차인보호강화법을 제정하게 된다. 동독과 서독의 이러한 사례를 보면, 좌든 우든 현실의 복잡함 앞에서 자만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헤겔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믿음의 과정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통일되어 개별성으로 지향되는 과정으로 개념화하는데, 이는 부처나 그리스도라는 씨앗이 중생 즉 인간에 내재한 채 전개해서 개별적인 그 나름의 인격이 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기호의 책에는 이백년도 더 전인 그 옛날 헤겔이 이러한 개념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일, 즉 왕권과 그 밑에 활동하는 종교성의 감시와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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