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으로 상상해 본 저 모든 정치 체제의 묘사는 분명 우스꽝스럽고 실행에 옮기기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최선의 사회 형태와 우리에게 적용할 가장 적절한 규칙을 두고 벌이는 저 거창하고 장황한 논쟁들은 우리 정신을 훈련시키는 데만 적절할 뿐이다. 마치 교양 과목 안에 그 본질이 정신적 자극과 토론에 있고 그것을 떠나서는 어떤 생명도 없는 주제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유의 정치 체제 묘사는 새로운 세계에서라면 적용해 볼 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구속된 인간들, 이러저런 관습에 맞게 형성된 인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생각으로가 아니라 진실로, 뛰어난 최선의 정치 체제는 어느 나라에나 지금 그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체제이다. 그 모습과 본질적 이점은 관습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나 민주 국가에서 소수의 지배를 혹은 왕정체제에서 다른 종류의 정부를 계속 희구한다는 것은 오류이고 얼빠진 생각이다.

혁신만큼 한 나라를 짓밟아 놓는 것은 없다. 변화란 불의와 학정에 모양새를 갖춰 줄 뿐이다. 어떤 부분이 삐끗 떨어져 나오면 우리는 그것을 받쳐 줄 수 있다.

누구든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그저 치워 버리려고만 하는 사람은 생각이 짧은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다음에 꼭 선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또 다른 악이 따라올 수 있으며, 혹은 더 나쁜 악이 올 수도 있으니 카이사르를 살해한 이들에게 닥친 경우가 그러했다.

흔들리는 것은 어느 것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커다란 조직의 구조는 수많은 못이 지탱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고색창연함으로 버티고 있기도 하다. 마치 오래된 건물이 시간에 의해 그 기초는 낡아 없어지고 외장도 접착제도 사라졌는데, 그래도 살아남아 자신의 무게로 지탱되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라는 것이 길다고 하여 더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죽음은 짧은 것일수록 더 낫다고 한다. 나는 죽음이라는 상태 앞에서 움츠러들고 있다기보다 죽는 것과 친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단단히 챙겨 입고 폭풍우 속에 따뜻이 안기면, 그것은 순식간에 느낌도 없이 나를 덮쳐 내 눈을 감게 하고 나를 쓸어가 버리리라.

우리를 세상에 들어서게 하는 순간에 지혜로운 여성, 산파가 필요하듯이, 세상에서 나가는 순간에는 훨씬 더 지혜로운 어떤 사람이 꼭 필요하다. 지혜롭고, 나아가 벗인 그런 사람은 이런 순간 도움을 얻기 위해 아주 귀한 값으로 사들여야만 하리라.

기쁨은 확장시켜야 하지만 슬픔은 가능한 한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이유 없이 동정을 바라는 사람은 막상 이유가 있을 때는 동정해 줄 수가 없다. 항상 탄식하는 사람은 결코 동정받지 못하니, 너무 자주 불쌍한 사람 노릇을 하는 바람에 누구에게도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살아 있는데 죽은 자 노릇을 하는 사람은 죽어 가는데 살아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노쇠란 홀로 있기를 필요로 하는 상태이다. 나는 과도하리만큼 사교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내 거북한 모습을 거두어 들이고, 나 홀로 그것을 품으며, 내 몸을 웅크려서 마치 거북이처럼 나의 껍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나는 사람들에게 들러붙지 않고도 그들을 보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죽음도 내 삶의 평안함과 안락함에 제 몫을 지니고 있으면 싶다. 죽음은 삶의 커다란 한 부분이며, 중차대한 것이니 앞으로 남은 이 부분이 지나온 삶과 너무 다르지 않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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