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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 전2권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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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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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이미경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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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구멍가게를 그릴 땐 오래되어 낡고 소소해서 볼품없어 보이는 가게가 지닌 은근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4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며 뚝심 있게 살아온 주인의 삶이 궁금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며 그 구멍가게들이 더 이상 대물림되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부디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는 어르신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빌었다.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 기록할 수 있다면, 내 그림 속에라도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_ 이미경,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p6


 예전 시골학교 관사 옆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은 동네 구멍가게로 나가는 후문이었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지나 약 30m 정도 걸어나가면 나오는 작은 가게.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시골가게 할머니는 항상 푸근하고 좋은 미소로 반겨주시곤 했었다. 초등학교 전교생의 수가 300명에 달할 때는 학교 준비물도, 간식도 이 곳에서 모두 해결했지만 이제는 전교생의 수가 그 때의 1/10 수준으로 떨어지고 준비물도 학교에서 제공하며, 인근에 편의점이 생기면서 점차 가게보다는 떡이나 은행을 파는 것으로 운영하셨던 할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일정 부분을 모아 초등학교 장학금으로 전달해주셨던 그 어른의 모습을 뵌 지도 벌써 5년 전의 일이 되었다.







 물건은 많이 없지만, 가끔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작은 공간과 꽃으로 아름다웠던 시골가게는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시골학교를 떠나고 다시 도시로 들어오면서 시골가게와 같은 동네가게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반갑게도 손자와 함께 지내는 노부부가 운영하시는 동네슈퍼를 볼 수 있었다. 작은 가게지만 편의점에는 없고, 대형마트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많이 구입해야 하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숨겨진 보물창고와 같은 곳. 이제  이 곳도 늘어가는 편의점의 파도와 코로나 19가 가져온 위기를 넘지 못하고 지난 주 문을 닫게 되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던 즈음 알바를 시작해 수많은 일을 전전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마스크가 숨통을 막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일자리는 희박하거나 불안했고, 더럽거나 위험했다. 부유한 누군가는 마스크도 좋은 걸 쓰고 거리두기로 인해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근배와 같은 도시 빈민에게 코로나 시대는 전시체제와 다름없었다. 생존에 대해 고민해야 했고 감염되고 나면 부상병처럼 후송되어 재기가 불가능한 꼴이 되었다. _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p236/370


 이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동네슈퍼를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연결이 점차 끊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얼굴을 보고 거래를 하고, 안부를 묻거나 세상 이야기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상황에서, '1+1'과 같은 다양항 혜택과 첨단 유행하는 상품이 갖춰졌고, 자주 바뀌는 점원과 인간관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편의점이 시골가게나 동네슈퍼를 밀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편의점이란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곳이고 손님이나 점원이나 예외 없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걸, 물건이든 돈이든 충전을 하고 떠나는 인간들의 주유소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_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p280/310


 이러한 흐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서 '사랑방'과 같은 가게 분위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제는 '무인 편의점'이 등장해서 그나마 학생들이 편하게 일하는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빠른 변화가 다소 답답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의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슈퍼마켓 부문에서도 온라인 주문과 배송이 인기를 얻고 있고,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한창일 때 거의 모든 사람이 집에 있어야 하자 급격히 성장했다. 소비자 선호의 변화가 계속될지는 시간이 말해주겠지만 일단 고객이 문 앞까지 식료품이 배달되는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이 변화는 꽤 오래갈 것이다. 이는 슈퍼마켓 매장의 전반적인 구조 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매장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자동화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지고, 고객이 쇼핑하는 통로 공간이나 제품 진열은 점차 축소될 것이다. 결국 배송이든 픽업이든 순식간에 주문을 처리하는 물류 창고 개념의 슈퍼마켓 매장이 출현하고, 이곳에는 고객이 키오스크나 모바일 기기로 주문하기 전에 진열된 제품을 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있을 것이다. _ 마틴 포드, <로봇의 지배>, p89/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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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25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안타까운 광경이지요,ㅠㅠ

겨울호랑이 2023-06-25 22:10   좋아요 1 | URL
사람과 옛 추억이 변화의 흐름 속에 쓸려가는 것 같아 참 아쉽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3-07-01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립네요. 저렁 아름다운 구멍가게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

겨울호랑이 2023-07-01 18:05   좋아요 1 | URL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도 함께 했던 시대도 모두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방공호 안에서 죽을 뻔했던 때로부터 5년 전쯤, ‘혁신 관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일본을 크게 바꾸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향한 바는 제2차 세계대전 수행을 위해 국가의 총력을 전쟁에 전용하는 ‘국가총동원 체제 확립이었습니다. 그들이 수립한 경제제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살아남아 전후 일본의 기본을 형성하게 됩니다. - P21

그들의 이념은 ‘산업의 국가 통제입니다. 기업은 공익에 봉사해야지 사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불로소득으로 생활하는 특권계급의 존재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주의 사상에 가깝습니다. 사실 기시 노부스케가 목표로 한 것은 ‘일본형 사회주의경제‘ 건설이었습니다. 때문에 한큐전철의 창업자이자 대표적인 전경영자였던 고바야시 이치조는 상공대신에 취임했을 당시에 차관이었던 기시를 ‘아카츠(적색분자·빨갱이)‘라고 부르며 비난했습니다. - P22

전시에 만들어진 이러한 경제체제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일본 경제 형태와는 이질적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그 체제를 ‘1940년 체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총력전을 위한 국가 총동원 체제로 만들어진 ‘1940년 체제‘는 종전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않은 채 살아남아 전후 일본 경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 P27

1940년 체제 사관‘이라는 ‘새의 눈‘으로 조망하면, 1980년대의 거품 경기는 일본 경제가 ‘1940년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그 체제가 생존을 도모한 데서 생긴 사건입니다. 더욱이 1940년 체제 사관에서 보면, 아베 신조 내각이 실시하고있는 경제정책은 ‘전후 레짐(체제)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닙니다. 완전히 반대로 ‘전시 · 전후체제로의 복귀‘입니다. 그 기본적인 방향은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고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 관여를 강화하자는것입니다. 1940년 체제의 사고방식 그 자체입니다.  - P29

군수 관련 기업을 관리하면서 항공기를 비롯한 공업 생산 물자의 조달을 통제하던 군수관리들은 미 점령군 진주 직전에관공서 간판을 상공성‘으로 바꿔 달았죠. 점령되면 당연히 전범 색출이 시작되기에 군수라는 명패를 달고서는 도저히 조직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수성은 1943년에 상공성과 기획원이 통합되면서 생긴 관청이기 때문에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린 것입니다. - P39

자금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는 전시에 형성된 간접금융 중심 시스템과 정부의 금융기관 대출 통제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정부는 자원배분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 P59

일본에게 이 전쟁은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을 ‘한반도 전쟁의 전략물자보급기지로 삼은 덕분에 일본의 시장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 ‘한국전쟁 특수‘가 발생한 것입니다. 1949년 말 2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화는 1950년 말 9억4000만 달러로 4.5배 급증했습니다. ‘도지 라인‘에 의해 경기 침체에 빠졌던 일본 경제가 이로 인해 단번에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P75

즉, 엔화는 날로 강세를 보였습니다.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자, 일본 민관이 두려워한 것은 엔고가 진행되면서 수출이 줄고 일본 경제가 타격을 입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려했던 일은 실제로 터지지 않았고, 일본 경제는 엔고가 계속 유지되었음에도 고성장을 이어갔죠. 오히려 1980년대 들어와 무역흑자가 증가하고 주가도 상승하는 등 일본 경제는 엔고에 의해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 P167

한편, 일본의 인구가 고령화되는 추세가 두드러졌습니다. 이는 장차 사회보장비를 급증시킬 게 분명했죠. 하지만 사회보장비에 대한 장기 전망은 전혀 없었습니다.일본의 예산은 ‘연도주의‘로, 보통 1년 치의 예측밖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장기적인 전망이 없는 구조였던 셈이죠. ‘이러면 앞으로 문제가 불거진다‘라는 게 나가오카 차장의 생각이었고 저도 똑같이느끼고 있었습니다. - P172

‘1940년 체제‘는 1950년대, 1960년대의 자원·자금 부족 국면에서 전략적인 산업 부문에 자원이 우선적으로 배분될 수 있게 해전후 부흥과 공업화를 촉진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석유파동이라는 외부 위기에 일본 경제 전체가 최적으로 대응하도록 크나큰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 P195

그럼 왜 일본에서 토지 문제가 심각해진 것일까요?
도시의 토지 이용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즉, 도시지역의 토지를집약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거죠. 높은 빌딩을 지어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도심의 일등지도 방치된 채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 P247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금융 영역에서의 1940년 체제‘는 일본의 금융시장을 국제금융시장에서 분리해 쇄국하는 것을 밑바탕으로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금리 통제가 가능했던 거죠. 그러나 경제의 국제화와 자유화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이른바 ‘전시戰時 (1940년)‘ 금융체제가 사명을 마칠 때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거품 경제가 발생했던 거죠. - P253

‘이차원 금융완화‘라는 명분 아래, 일본은행이 비정상적으로 대량의 국채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그 국채는 장차 가격이 하락해 일본은행에 손실을 안겨줄 가능성이 매우 높죠. 손실액은 국민의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도 ‘문제‘로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국민이 큰 부담을 지는 국가정책은 명료한 형태로 공개되어야 하며 옳고 그름이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런 정책을 표면화하지 않고실시해 흐지부지하게 처리해버리고 있습니다. 이때의 ‘거품 경제 처리 방식‘이 현재의 금융완화정책으로 이어진 악습의 원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P277

좀더 본질적인 원인은 독일의 산업구조가 이후 크게 달라진 세계경제 환경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안고 있던 것과 같은 문제였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했던 경제체제가 1980~1990년대에 생긴 세계경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일본도, 독일도 새로운 세계경제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확실해진 것은 더 나중의 일이지요. - P294

중국이 공업화하여 일본과 같은 생산활동을 하면 일본의 임금 수준은 장기적으로 중국 수준으로 감소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 현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본질입니다. 임금 하락을 벗어나고 싶다면 중국에서 할 수 없는 경제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생산성이 높은 신산업이 탄생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일본 경제의 문제는금융완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장기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본 원인은 여기에도 있습니다. - P317

앞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안 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란 어떤 사정일까요? 사실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저는 ‘풍요로워지려면 성실하게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대원칙이 무너져버린 상태입니다. 즉, 성실하게 일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잘살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있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은 적어도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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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 종사자들에게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신뢰는 곧 생계와 직결된다. 해녀들의자율 조직인 통영나잠자율공동체 장안석 위원장(66)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를생생히 기억한다. 수산물에 대한 불안이 퍼지면서 가격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벌써 당시와 유사한 사태가 반복될 조짐이 보인다. 최근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전복, 소라, 해삼 등의 가격이 30%가량 하락했다. 그는 오염수 방류 우려로 불안감이 증폭한 데 따른 결과라 해석한다. - P10

학생 수 감소는 전국 모든 학교에서나타나는 공통 현상 아닌가? 그렇지 않다. 반대인 곳도 많다. 폐교와 학생 수감소가 이어지는 가양동 등촌동과 서편으로 바로 닿은 마곡동의 공진초등학교는학생이 너무 많아서 학교가 미어터질 지경이다. 올해 초 기준 전교생 1937명으로, 강남구 도곡동의 대도초등학교(1986명) 다음으로 서울에서 학생 수가 많은초등학교다. 공진초는 마곡지구가 조성되던 2014년 서울 가양동에서 마곡동으로 옮겨온 ‘이전 재배치‘ 초등학교다. 원래 가양동 공진중학교와 붙어 있었다. 공진초는 이전하고 공진중은 폐교했다. - P13

학폭위 개최 없이 이 특보의 아들 전학으로 마무리된 사건은 이 특보가 개입된 은폐 의혹으로도 연결된다. 이 특보는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으로 시작해 홍보수석과 언론특보를 지내며 친이명박계 중에서도 최측근으로 불린다. 아들 학폭 은폐 의혹이 큰 논란으로 번진것은 이 때문이다. - P23

다음날인 3월1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권력은시민단체를 세금으로 지원하고, 시민단체는 권력을 지지하는 부패 카르텔"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당시와 지금은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다. 그때는 시민단체이고 지금은 민간단체다. 사정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부터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단체를 겨냥했다. 처음에는 국세청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 P26

수신료 분리 징수제가 도입되면 매달전기요금에 합산해 걷던 TV 수신료 2500원을 낼지 말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KBS는 당장 재원구조에 타격을 입는다. 2022년 기준 KBS의 TV 수신료는 전체수입의 45.3%(6934억원)를 차지한다. 분리 징수가 시행되면 절반 이하인 3000억원대로 감소할 것으로 추산된다.  - P29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 5년이 언론계에 중요한 시기였다고 언론단체는 입을 모은다. 언론개혁 열망 속에 집권한정부였던 만큼,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후견주의를 끊어낼 적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박근혜 정부 시절 발의했던 공영방송 지배구조개선법(방송법)은 끝내 처리되지 못했다. 2017년 8월문재인 대통령이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라며 재검토를 지시한 후, 사실상 좌초되었다. - P31

윤석열 정부는 가루쌀 홍보에 사활을걸고 있다. 농정정책의 최대 현안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황근 농림부 장관은 가루쌀을 ‘신의 선물‘이라고까지 부르며 지난해부터 보급 사업을 독려하고 있로 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밀가루 값이 급등하면서 식량 위기를 걱정했던 한국으로서는 가루쌀이 미래의먹거리라는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가루쌀이 윤석열 대통령이 4월4일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의 ‘대안‘ 격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양곡관리법의 핵심은 쌀값 안정을 위해정부가 쌀을 의무적으로 매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논에 쌀 말고 - P42

공화당 여론조사가인 닐 뉴먼하우스는 AP 통신에 "트럼프 스스로 기소될 것이라고 누차 말했기 때문에, 이번 기소는친공화당 유권자들에게 놀랄 일이 아니다"라면서 공화당 대선주자 1위인 그의입지가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공화당 전략가인 세라 롱웰은 "트럼프가 탄핵되거나 기소될 때마다 오히려 지지자들의 결집 효과가 나타났다. 이번 기소 외에 추가로 기소돼도 트럼프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는 데 도움이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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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 환경의 역할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조준희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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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펴본 지역, 이처럼 밀집되고 복합적이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 지역에 어떤 단일성(unite)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들이 모여들고 역사들이 혼합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지중해의 중심에는 지중해를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자연의 단일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기후이다. 기후가 지중해의 풍광과 삶의 방식을 하나로 만들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299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1>에서 우리는 단일한 기후 아래 묶여있는 지중해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경작지도, 목초지도 갖춰지지 않은 척박한 곳. 비가 내리면 흙의 영양분이 쓸려 내려가 오히려 강한 햇볕이 지력을 유지시켜 준다는 지중해성 기후는 이들을 교역(交易)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밀어버렸다. 


  기후학자들이 보기에 지중해는 마땅히 서로 구별되어야 할 다양한 일군의 소기후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간의 유사성 혹은 부정할 수 없는 단일성을 지우지는 못한다. 반면에,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같은 기후, 같은 계절적 변동, 같은 식생, 같은 색채, 또 지형적 구조 덕분에 같은 풍경이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궁극적으로는 삶의 방식이 같다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306


 지중해 지역의 바다는 육지보다 결코 더 생산적이지 않다. 극히 자랑하는 해산물은 그저 소박한 양만 생산될 뿐이며, 이곳의 어장은 산출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생선의 부족은 어부의 부족, 그리고 곧 선원의 부족을 초래했으며, 이는 지중해 세력의 대사업에 보이지 않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정치적 야망과 실제 사이에는 언제나 이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176


  이러한 자연 환경이 지중해 인근 주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유사한 삶의 형태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단일성을 부여했다면, 이러한 단일성은 다양성의 밀바탕이 된다. 자급자족할 수 없는 지중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구성원들은 내외부에서 긴밀하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형성된 교역관계 속에서 우연과 필연이 누적되면서 지중해의 정치 패권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베니치아, 제노바, 오스만 투르크, 에스파냐 등으로 차례로 옮겨가게 된다. 


 지중해 역사의 중심에는 항상 이중고, 곧 빈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어쩌면 이 이중고 때문에 지중해 사람들은 조심스럽고, 검약하고, 부지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이중고가 동기가 되어서 지중해 나라들은 특정한 방식의 제국주의를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지중해는 내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행동을 취해야 했고, 외국으로 나가야 했고, 먼 나라들의 협력을 구해야 했고, 그곳의 경제와 연결되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지중해의 역사는 더욱 확장되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320 


 각각의 바다는 독자적으로 살아간다. 지중해의 동서쪽 양쪽 해역 모두 자신의 선박들을 이용하여 자체적인 운항 시스템을 조직했다. 양쪽이 서로 소통하고 연결점들을 유지하긴 했지만, 자체의 폐쇄적인 회로를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p172)... 1559년 이후 프랑스 함대의 쇠퇴, 프랑스와 투르크 제국 사이의 관계 약화 이후 서부 지중해는 명백히 에스파냐의 바다가 되었다... 반대로 이오니아 해, 즉 "크레타 해"는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지중해 구역은 쌍둥이 제국주의의 매개체이자 창조자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173 


 브로델은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에서 지중해의 생활에서 큰 틀인 환경에 대해 말한다. 저자가 제1부에서 보여준 이 틀은 지중해의 문화에 큰 영향을미쳤고, 역사의 큰 줄기 속에서 일종의 공식(公式)을 보여주며, 장기(長期)의 역사의 순환을 이해하게 만든다.


 바다의 삶. 그 생명력은 가장 작은 곳, 가장 무게가 덜 나가는 부분을 먼저 통제한다. 그것은 섬과 일부 연안 지역으로, 마치 북유럽의 밀물과 썰물이 조약돌을 가지고 놀 듯이 이리 던지고 저리 돌리고 하는 것이다. 점차 더 강해지고 더 강제적이 되자 이 힘은 자신의 궤도 안으로 더 큰 덩어리들인 반도들을 끌어들이는데, 이렇게 되면 바다의 역사는 한 수준 더 위로 상승한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순간은 그 힘이 매우 강력해져서 드디어 대륙 덩어리 전체를 끌어들일 때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212


 그렇지만, 이러한 대류(大流)에 대한 이해는 펠리페 2세의 시대라는 한정적인 시기에 대한 설명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또다른 저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보여준 3층 구조 - 교환,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 - 에서처럼 보다 깊은 역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제는 2층 지중해의 사회사로 넘어갈 차례다...


 역사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리를 통제하고 발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다시 한번 설명할 수 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291


 도시 역사의 역동성은 우리를 원래의 주제의 바깥으로 데리고 간다. 제1부의 목적은 논의의 초점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특징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상적인 통계들, 반복적인 현상들, 지중해 삶의 기반들, 지중해의 진흙 바닥과 잔잔한 물에 두는 것이었다. 도시들은 내연기관과 같아서, 회전하고, 활력을 띠고, 헐떡거리다가 다시 전진한다. 내연기관의 고장 그 자체도 우리를 변동의 세계로 이끄는데, 그것은 제2부의 주제이다. 고장은 우리에게 진화와 콩종튀르를 말해주고, 우리에게 운명선을 예감하게 한다. 16세기 말에 이미 여러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쇠퇴는 17세기 들어서서 더욱 급격해졌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470



카스티야의 현저한 팽창 사례는 명백한 결론에 이른다. 이목은 내부와 외부의 복잡한 구조들 그리고 중량감 있는 제도들을 전제로 한다. 카스티야의 양모는 세고비아와 같은 도시 및 시장을 필요로 한다. 양모를 선배하고, 피렌체인과 마찬가지로 양모를 세탁할 수 있는 대형 통을 소유하고 있는 제노바 상인들, 이 대상인들을 위해서 일하는 카스티야의 중개인들, 양모 운반인들, 빌바오에서 플랑드르로 해상운송을 책임지는 선단들, 알리칸테와 말라가를 통해서 이탈리아행의 수출을 담당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일상의 차원에서 관찰한다면 목장에서 가축들에게 먹일 소금을 구매하고 수송하는 사람 등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 - P116

16세기 이후 기술적으로 그리고 산업적 진보에서 혁신을 경험하는 서방 세계와 그렇지 못한 동방 세계 사이에 생활수준의 차이가 갈수록 벌어졌다. 서방으로부터 생활비가 싼 동방 세계로 들어오는 화폐는 자동적으로 가치가 상승했고 더 큰 구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수준 차이가 어떤 면에서는 두 지역 간의 경제적 통합성을 재창조했다. 지중해 역사의 흐름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서 원격 지배하는 것은 그와 같은 심층의 요구, 균형의 혼란과 회복, 필수적인 교환이기 때문이다. - P175

모든 활동이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활동이 상업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매력에 의지했다. 대규모 장거리 상업의 절대적 필수 조건, 곧 자본의 축적이 상업 자본주의의 원동력이었다.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및 밀라노 등지에서 공업 활동은 상업 경제가 규정한 공간 내에서 부양되었고, 특히 새롭고 혁명적인 직물업, 곧 면직물과 견직물의 경우가 그러했다. 폴 망투의 고전적인 이론, 곧 공업은 상업에 의해서 창출되고 육성된다는 이론은 이미 16세기에도 사실이었다. - P422

지중해와 주변 사막 간의 갈등은 단순히 가축과 쟁기 간의 대립 이상의 것이었다. 이는 두 가지 종류의 경제, 문명, 사회, 삶의 방식의 충돌이었다.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스텝으로부터의 침략은 언제나 먼저 유목 문명의 변화, 곧 원시 단계에서 "봉건적인" 사회로의 이행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슬람의 성공적인 정복 과정에서 종교적인 신비주의의 발흥이 기여한 바는 잘 알려져 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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