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방공호 안에서 죽을 뻔했던 때로부터 5년 전쯤, ‘혁신 관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일본을 크게 바꾸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향한 바는 제2차 세계대전 수행을 위해 국가의 총력을 전쟁에 전용하는 ‘국가총동원 체제 확립이었습니다. 그들이 수립한 경제제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살아남아 전후 일본의 기본을 형성하게 됩니다. - P21
그들의 이념은 ‘산업의 국가 통제입니다. 기업은 공익에 봉사해야지 사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불로소득으로 생활하는 특권계급의 존재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주의 사상에 가깝습니다. 사실 기시 노부스케가 목표로 한 것은 ‘일본형 사회주의경제‘ 건설이었습니다. 때문에 한큐전철의 창업자이자 대표적인 전경영자였던 고바야시 이치조는 상공대신에 취임했을 당시에 차관이었던 기시를 ‘아카츠(적색분자·빨갱이)‘라고 부르며 비난했습니다. - P22
전시에 만들어진 이러한 경제체제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일본 경제 형태와는 이질적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그 체제를 ‘1940년 체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총력전을 위한 국가 총동원 체제로 만들어진 ‘1940년 체제‘는 종전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않은 채 살아남아 전후 일본 경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 P27
1940년 체제 사관‘이라는 ‘새의 눈‘으로 조망하면, 1980년대의 거품 경기는 일본 경제가 ‘1940년 체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그 체제가 생존을 도모한 데서 생긴 사건입니다. 더욱이 1940년 체제 사관에서 보면, 아베 신조 내각이 실시하고있는 경제정책은 ‘전후 레짐(체제)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닙니다. 완전히 반대로 ‘전시 · 전후체제로의 복귀‘입니다. 그 기본적인 방향은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고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 관여를 강화하자는것입니다. 1940년 체제의 사고방식 그 자체입니다. - P29
군수 관련 기업을 관리하면서 항공기를 비롯한 공업 생산 물자의 조달을 통제하던 군수관리들은 미 점령군 진주 직전에관공서 간판을 상공성‘으로 바꿔 달았죠. 점령되면 당연히 전범 색출이 시작되기에 군수라는 명패를 달고서는 도저히 조직으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수성은 1943년에 상공성과 기획원이 통합되면서 생긴 관청이기 때문에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린 것입니다. - P39
자금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는 전시에 형성된 간접금융 중심 시스템과 정부의 금융기관 대출 통제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정부는 자원배분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 P59
일본에게 이 전쟁은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을 ‘한반도 전쟁의 전략물자보급기지로 삼은 덕분에 일본의 시장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 ‘한국전쟁 특수‘가 발생한 것입니다. 1949년 말 2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화는 1950년 말 9억4000만 달러로 4.5배 급증했습니다. ‘도지 라인‘에 의해 경기 침체에 빠졌던 일본 경제가 이로 인해 단번에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 P75
즉, 엔화는 날로 강세를 보였습니다.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자, 일본 민관이 두려워한 것은 엔고가 진행되면서 수출이 줄고 일본 경제가 타격을 입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려했던 일은 실제로 터지지 않았고, 일본 경제는 엔고가 계속 유지되었음에도 고성장을 이어갔죠. 오히려 1980년대 들어와 무역흑자가 증가하고 주가도 상승하는 등 일본 경제는 엔고에 의해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 P167
한편, 일본의 인구가 고령화되는 추세가 두드러졌습니다. 이는 장차 사회보장비를 급증시킬 게 분명했죠. 하지만 사회보장비에 대한 장기 전망은 전혀 없었습니다.일본의 예산은 ‘연도주의‘로, 보통 1년 치의 예측밖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장기적인 전망이 없는 구조였던 셈이죠. ‘이러면 앞으로 문제가 불거진다‘라는 게 나가오카 차장의 생각이었고 저도 똑같이느끼고 있었습니다. - P172
‘1940년 체제‘는 1950년대, 1960년대의 자원·자금 부족 국면에서 전략적인 산업 부문에 자원이 우선적으로 배분될 수 있게 해전후 부흥과 공업화를 촉진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석유파동이라는 외부 위기에 일본 경제 전체가 최적으로 대응하도록 크나큰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 P195
그럼 왜 일본에서 토지 문제가 심각해진 것일까요? 도시의 토지 이용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즉, 도시지역의 토지를집약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거죠. 높은 빌딩을 지어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도심의 일등지도 방치된 채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 P247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금융 영역에서의 1940년 체제‘는 일본의 금융시장을 국제금융시장에서 분리해 쇄국하는 것을 밑바탕으로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금리 통제가 가능했던 거죠. 그러나 경제의 국제화와 자유화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이른바 ‘전시戰時 (1940년)‘ 금융체제가 사명을 마칠 때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거품 경제가 발생했던 거죠. - P253
‘이차원 금융완화‘라는 명분 아래, 일본은행이 비정상적으로 대량의 국채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그 국채는 장차 가격이 하락해 일본은행에 손실을 안겨줄 가능성이 매우 높죠. 손실액은 국민의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도 ‘문제‘로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국민이 큰 부담을 지는 국가정책은 명료한 형태로 공개되어야 하며 옳고 그름이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런 정책을 표면화하지 않고실시해 흐지부지하게 처리해버리고 있습니다. 이때의 ‘거품 경제 처리 방식‘이 현재의 금융완화정책으로 이어진 악습의 원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P277
좀더 본질적인 원인은 독일의 산업구조가 이후 크게 달라진 세계경제 환경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안고 있던 것과 같은 문제였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했던 경제체제가 1980~1990년대에 생긴 세계경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일본도, 독일도 새로운 세계경제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확실해진 것은 더 나중의 일이지요. - P294
중국이 공업화하여 일본과 같은 생산활동을 하면 일본의 임금 수준은 장기적으로 중국 수준으로 감소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 현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본질입니다. 임금 하락을 벗어나고 싶다면 중국에서 할 수 없는 경제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생산성이 높은 신산업이 탄생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일본 경제의 문제는금융완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장기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본 원인은 여기에도 있습니다. - P317
앞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안 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란 어떤 사정일까요? 사실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저는 ‘풍요로워지려면 성실하게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대원칙이 무너져버린 상태입니다. 즉, 성실하게 일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잘살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있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은 적어도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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