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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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형이상학으로서 존재론이 불가능함이 밝혀진 것이라면,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형이상학으로서 윤리학이 정초된다.(p42)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GMS:IV, 429)

칸트는 기독교의 순수 이성(ratio pra)인 ‘신의 이성‘ 을 ‘인간의 선험적인 초월적 의식‘으로 대체한다. 필멸의 인간은 불멸의 신에 미치지 못하기에, 인간의 초월적 의식은 세계를 창조할 수도, 심지어는 완벽하게 인식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칸트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주어지는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에 귀기울이고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꾸준히 나아간다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희망할 수 있다는 복음(the gospel)을 전해준다.

인간은, 요컨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이로써 칸트의 ‘이성 비판‘은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더, 도덕적 완전성, 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내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力行)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p331)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내세(來歲)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도 우리 안의 도덕법칙이 하늘의 별과 더불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묘비명처럼.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kpV, A288=V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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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12: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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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2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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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형이상학 정초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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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B3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또 어떤 세워진 목적 달성에 쓸모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p7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6 IV401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상되는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이 의지의 동인인 한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에서만 생기는, 이 법칙의 표상 자체만이 우리가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이 탁월한 선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하는 인격 자체 안에 이미 현전하는 것으로, 비로소 그 행위결과로부터 기대될 필요가 없다.(p92)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윤리형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인식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 과연 도덕적 법칙에 맞는 존재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해 칸트는 자신의 답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선의지'로부터 시작한다. 선의지는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선의지는 필연적인 실천 명령으로 주어지며, 의무로부터 주어지는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B7 우리에게는 이성이 실천능력으로서, 다시 말해 의지에게 영향을 미쳐야 할 그런 것으로 품수되어 있으므로,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가령 다른 의도에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단적으로 이성이 필요했던 것이다.(p83)... B8 선의지라는 개념을, 즉 우리의 행위들의 전체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언제나 상위에 놓여 있어 여타 모든 가치의 조건을 이루는 이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의무 개념을 취해 보기로 한다.(p84)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3 IV399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의 법칙이 남는바, 그것은 곧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에서 그의 행복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의 태도는 본래적인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실천적 사랑은 의지 안에 들어 있지, 감각의 성벽(性癖)에 있지 않으며, 행위의 원칙들에 있지 애잔한 동정에 있지 않은바, 이런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명령될 수 있으니 말이다.(p8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그렇다면, 의무로 행해진다는 것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칸트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자연의 다른 사물은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선한 것을 선별할 수 있다. 이성적 존재자들은 이러한 '의지'를 가지지만, 동시에 윤리법칙에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이러한 윤리 법칙이 '명령'으로 주어진다고 보았다.


  B36 IV412  자연의 사물은 모두 법칙들에 따라 작용한다.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다시 말해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내지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법칙들로부터 행위하는 능력, 내지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법칙들로부터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데는 이성이 요구되므로, 의지는 실천 이성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B37 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다시 말해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p115)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38 IV413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은, 그것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 지시명령이라 일컬으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을 일컬어 명령이라 한다. 모든 명령은 당위('해야 한다')로 표현되며, 그게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성질상 그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즉, 강요)를 고지한다(p116)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에서 명령을 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으로 나눈다. 정언적 명령이 목적이라면, 가언적 명령은 수단이 된다. 칸트는 정언적 명령만이 윤리법칙,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타당성)이 필요한데, 우리는 명령의 타당성을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명령이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B39 IV414 모든 명령은 가언적으로거나 정언적으로 지시명령한다. 전자는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또는 의욕하는 것이 가능한)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겠다.(p118)... 행위가 한낱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하다면, 그 명령은 가언적인 것이다. (반면에) 행위가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되면, 그러니까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그 명령은 정언적인 것이다.(p11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51 IV421 내가 가언 명령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나에게 조건이 주어질 때까지 나는 그 명령이 무엇을 함유할 것인가를 미리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정언 명령을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함유하는가를 즉각 안다. 무릇, 명령은 법칙 외에 오로지, 이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함유하지만, 법칙은 그것이 제한받았던 아무런 조건도 함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남는 것은 오로지, 행위의 준칙이 그에 적합해야 할, 이 법칙 일반의 보편성뿐이며, 이 적합성만이 명령을 본래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B52 그러므로 정언 명령은 오로지 유일한 즉, 그것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의무의 보편적 명령도,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132)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칸트는 이로부터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필연성과 보편성을 모두 갖춘 정언명령을 도출해낸다.


 B66 IV429 무릇 최상의 실천 원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관련한 정언 명령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나 목적인 것의 표상으로부터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형성하고, 그러니까 보편적 실천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 원리의 근거인즉, 이성적 자연본성은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는 것이다.(p147)...  B67 IV429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p148)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그렇다면, 도덕법칙이 정언명령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만약 인간이 신적인 존재라면, '의지의 자유'가 언제나 '의지의 자율성'과 일치할 수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B87 IV440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로부터 독립적으로)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선택의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아무런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16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97 IV446 의지는 생물이 이성적인 한에서 갖는 일종의 원인성이다. 자유는 이런 원인성의 특성일 것인바, 자유는 그것을 규정하는 외래의 원인들에 독립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연필연성은, 외래 원인들의 영향에 의해 활동하게끔 규정받는, 모든 이성 없는 존재자들이 원인성의 특성이다.(p17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그렇지만, 인간은 지성과 함께 감성을 가지고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와 '의지의 자율'이 항상 일치할 수 없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이 필요하며, 이는 당위(當爲), 정언적 명령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을 그 아래 세우면서 인격적 존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논지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면,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도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선(善)을 직관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감성의 결합을 통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세계를 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언명령을 통해 도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에서 말한다. 이런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 <실천 이성 비판>으로 나가보자...


  B111 IV454 오성세계의 순전한 성원으로서 나의 모든 행위들은 순수 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한낱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그러니까 자연이 타율에 알맞게 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p194)...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 명령들은 가능하다. 이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하는 것인바, 왜 그런가 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 위에 동일하지만, 오성세계에 속하는, 순수한, 그것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저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p195)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10 IV453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오성세계의 성원으로 놓고, 의지의 자율을, 그 자율의 결과인 도덕성과 함께 인식하되, 그러나 우리가 의무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동시에 오성세계에도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p193)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28 IV463 우리는 비록 도덕적 명령이 실천적 무조건적 필연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개념화 못함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원리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철학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p212)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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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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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2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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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종에게만 세계 헤게모니를 쥐어 주고 다른 인종, 특히 니그로 인종은 백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 만족하거나 모든 것을 정복하려고 행진하기 전에 죽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암묵적인 그러나 명료한 현대 철학을 받아들인다. 이 철학은 바로 아프리카 노예 무역과 19세기의 유럽 확장이 낳은 산물이다.(p232)<니그로> 中 


  W. E. B. 듀보이스 (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 ~ 1963)는 <니그로 The Negro>에서 흑인은 역사와 문화, 능력이 없다는 20세기 초반 미국사회의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면서 인종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인 듀보이스에 의하면 인종주의 편견의 기원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제도에서 비롯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아프리의 베냉 지역에 존재했던 다호메이(Dahomey) 왕국이다. 


[지도] 19세기 다호메이 왕국(출처 : https://www.britannica.com/place/Dahomey-historical-kingdom-Africa)


 흑인에 반하는 현대인의 이른바 '본능적인' 편견은 무엇이라 말인가? (p139)... 우리는 피부색에 대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원인을 신체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을 현대 니그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서 찾아야 한다.(p141) <니그로> 中


  17세기 다호메이왕국의 번영은 노예무역의 활성화와 궤를 같이 한다.  다호메이 왕국은 지리적으로 베냉 협로라는 한계로 인해 국가 발전에 제약을 가지고 있었으나, 같은 시기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1664년까지 후추, 금, 상아가 기니 지역의 주된 무역품으로 다호메이 왕국이 무역에서 소외되었다면, 1672년 이후에는 노예가 새로움 무역품으로 떠오르면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게 된다. 이러한 다호메이 왕국의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칼 폴라니(Karl Polanyi, 1908 ~ 1964)의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Dahomey and the Slave Trade: An Analysis of an Archaic Economy >의 내용을 따라가 보자.

 

 다호메이 사회를 커다란 긴장으로 몰아넣은 역사적 사건은 경제영역에서 벌어졌으며, 또 그 시작은 외부에서 비롯되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번창하기 시작하자 노예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이 다호메이에 바로 인접한 기니 해안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이 시간이 낳은 충격은 아주 독특하였다.(p61)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中


 플랜테이션 농장은 엄청난 이윤을 낳아주었고, 서인도제도는 왕실과 최고위 귀족들의 사적 재산이 되었다. 이제 이를 위해 노예를 조달하는 것은 '절대적 필요'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농장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작물의 양은 엄청났으며, 이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노예노동이 꼭 필요했다... 다시 말하자면 국제경제에서의 변화가 큰 물결을 일으켰고, 이 물결이 대서양을 건너서 불과 20마일 길이로 펼쳐진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 지역에 몰아닥친 것이다.(p63)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中


 칼 폴라니는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에서 지리적 어려움과 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다호메이 왕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축적된 부를 활용하는가를 보여준다. 노예무역과 인신공양으로 악명높은 다호메이 왕국에 다소 우호적인 칼 폴라니의 시각에 대해 비판점도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책의 리뷰로 넘기 여기서는 간략하게 내용만 취하자. 다시 <니그로>로 돌아가서, 듀보이스는 노예확보를 위한 인간사냥이 가족과 국가의 약화라는 참혹한 결과가 아프리카에 주어졌음을 지적한다.


 18세기 초 강력한 다호메이 왕국이 건설되었고, 지독한 전제 국가가 되어 19세기 초에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비슷한 왕국인 아샨티는 1719년에 정복을 시작해서 노예무역과 함께 발전했다. 이렇듯 서아프리카에서 국가 건설이 도시 경제를 대신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국가는 전쟁을 기반으로 세워졌고 인간 상품을 사고팔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장려했다. 토착 산업은 변화하고 와해되었고 가족의 유대와 정부는 약해졌다.(p154) <니그로> 中


 아프리카 대륙에서 많은 이들이 서인도 제도로 끌려가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 1818 ~ 1883)가 <자본론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에서 설명한 시초축적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서인도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모습은 또다른 형태의 인클로저(Enclosure)운동으로도 비춰진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애서 '사탕수수가 사람들을 쫓아낸다' 로.


[그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인(출처 : https://www.africanexponent.com/post/10712-the-bitter-history-of-african-slaves-and-sugar-production)

 

 시초축적의 역사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형성에 지렛대로 기능한 모든 변혁들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에서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들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농업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전체 과정의 토대를 이룬다.(p981) <자본론 1-(하)> 中


 <자본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럽 자본주의 발전 중 일정 부분은 아프리카 부의 강제이전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강제이주된 이들은 새로운 가족제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전통의 제도 대신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가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에서 설명한 노예제의 산물로서의 '일부다처제'를 강요받는다. 아프리카 대륙의 수탈과 가족제도의 붕괴는 이들을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영화 <기생충>의 지하실로 안내한다.  


 일반적으로 아메리카 노예제도가 사회에 끼친 영향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상황은 일부다처제의 니그로 가정을 새로운 형태의 일부다처제로 대체한 것이다. 니그로 가정은 이제 보호받지 못하고, 덜 효율적이며, 덜 문명화된 새로운 형태의 일부다처제로 대체되었다.(p187) <니그로> 中

 

 사실상 일부다처제는 명백히 노예제의 산물이었으며, 몇몇 예외적인 지위를 가진 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일부다처제는 부자와 귀한 신분의 특권이며 주로 여자 노예의 구입을 통해 충원된다. 인민 대중은 일부일처제의 생활을 한다.(p72)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6 -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 > 中


 이외에도 듀보이스는 <니그로>에서 노예제도로부터 시작된 아프리카와 흑인의 수탈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듀보이스의 담담한 서술은 독자들에게 흑인이 무지한 존재라는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오해인지를 일깨운다.  <니그로>안에 담긴 메세지는 가볍지 않지만, 듀보이스는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하듯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아프리카, 빈곤, 인종 문제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니그로>는 좋은 사회과학 입문서라 생각된다. 


PS. 개인적으로 <니그로>에서 언급된 시초자본 문제와 관련해서, 실비아 페데리치 (Silvia Federici)의 <캘리번과 마녀 Caliban and the Witch>를 떠올리게 된다. 수탈의 대상을 아프리카인이 아닌 여성으로 대치시켜 노예제도 이후의 자본주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 <캘리번과 마녀>라 여겨진다. 이는 노동 문제, 인종 문제, 종교 문제, 성 문제 등 많은 문제가 '평등 平等'이라는 주제의 서로 다른  현상(現象 phenomenon)이라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인클로저가 농민들로부터 공유지를 박탈했던 것처럼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 따라서 신체는 노동의 생산을 위한 기계로 전락하지 않게 막아 주던 모든 예방장치에서 ˝해방되었다˝(p272)...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의 레파토리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화와 기독교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식민화된 사회의 신체에 획실히 이식되어 피식민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실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p341) <캘리번과 마녀> 中


 그들은 오늘날 발전의 맨 앞자리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뿐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위대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상을 위해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여성 해방, 세계 평화, 민주 정부, 부의 사회화, 인류애를 위하여.(p229) <니그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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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4: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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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형이상학 정초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선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다름아닌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 곧 '순수 실천 이성'이다.(p50)...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 함은, 결국 "의무로부터"의, 오로지 의무에서 말미암은 행위만이 "본래적인 도덕적 가치"를 가지며, 의무로부터의 행위란 도덕적 실천 법칙을 그 행위의 표준으로, "의욕의 원리"로, 곧 준칙(Maxime)으로 삼는 행위를 말한다.(p51)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이성적 존재자만이 선의지를 가질 수 있고, 선의지만이  선(善)한 것으로 해석한다. 신(神)과 같은 이성적 존재자는 선의지의 자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절대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시공간에서 감성적 욕구를 느끼는 존재에 불과하기에, 인간이 인격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정언적 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이 요구된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윤리법칙에 종속해 있음을 밝혀낸다.(p52)...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은, 그것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지시명령(Gebot)이라 일컬으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定式)을 일컬어 명령(Imperativ)이라 한다. 어떤 명령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져야만 한다.(p53)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주관적 욕구를 배제한 채, 객관적 법칙이 될 수 있는 행위의 준칙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보편적 자연법칙처럼 준수하려는 인간 의지는 그 자체로 거룩하고 '신성하다'(p54)...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은,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이다.(p55)... 그렇다면, 무엇이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씨 또는 덕으로 하여금 그토톡 높게 존엄성을 요구할 권리를 주는가? 그것은 자율성이다.(p56)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이성적 존재자의 선의지는 '자유'를 매개로 도덕 법칙과 결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 의지란 바로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를 말한다.(p57)... 인간은 감성적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시공상의 존재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에게는 당위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제적으로라도 부과하는 정언 명령이, 도덕 법칙이 있는 것이다..(p60)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우리는 <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에서 인간의 인식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조건의 제한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인격적 존재자로서 인간의 행동은 시공간의 제한으로 인해 의지의 자율과 도덕 법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역자의 해제로 위와 같이 큰 줄기를 파악하고, 상세 내용은 추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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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5-25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의 선의지에 이성이라는 전제 자체가 의문 시 됩니다. 칸트와 같은 천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한계 아닌가 생각됩니다.

겨울호랑이 2020-05-25 22:03   좋아요 1 | URL
칸트 철학에서 최고의 통일 능력을 의미하는 ‘이성(Vemunft)‘은 마치 중세의 신(神)의 다른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칸트 철학에서도 중세철학의 여운이 남아 있음을 저 역시 느끼게 됩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우주론적, 존재론적 증명 등은 그 일례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와 근대 사이, 아직 기독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던 시기에, 신만의 속성을 인간에게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저는 칸트 철학이 마치 신의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의 불‘과 같은 혁명이라고 느껴집니다. 칸트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야기 했습니다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사람이 자신주변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5-25 22:1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통찰에 공감합니다. 더욱이 우리도 그 오랜 옛날 중세 이념에 자유로운지도 새삼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5-25 22:28   좋아요 1 | URL
제 개인 생각입니다만, 우리 뇌 구조가 북다이제스터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간뇌에서 대뇌가 발달하는 구조가 되었던 것처럼, 과거의 사상이 영향력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함께 공존하지 않나 싶습니다. ‘간뇌‘를 양서류나 파충류의 뇌라고 놀리듯이 말하지만, 간뇌의 기능을 대신하는 대뇌의 부분이 없는 것처럼, 문명의 결과는 우리가 의식하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 짚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내주신 문제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5-25 22:36   좋아요 1 | URL
이름이 ‘서연’이었던가요? 죄송합니다. 자주 불러보지 않으니 기억이 가물가물... 죄송합니다. 아무튼 자전거 타는 사진 뒷태만 봐도 이젠 어여튼 숙녀네요. ^^

겨울호랑이 2020-05-25 22:39   좋아요 1 | URL
^^:) 연의입니다. 아닙니다,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친척들도 어려워합니다. 연의가 크는 것에 비례해서 저는 늙어감을 느낍니다 ㅋ 북다이제스터님 감사합니다!

2020-06-06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