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보도를 쭉 이어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저널리스트로서 우리가 사건을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것, 명칭의 문제부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죠.

국가에 대한 실망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표적인 레토릭이 ‘이게 나라냐’였지요. 이것은 국정개입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헌법수호라는 프레임으로 넘어갔습니다. 동시에 ‘이게 나라냐’와 ‘헌법수호’라는 프레임 속에서 ‘세월호 7시간’이라는 프레임이 등장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 언론, 헌재(헌법재판소), 특검 등 네 집단을 한번에 모두 연결하는 아주 강력한 프레임이었죠. 아시다시피 ‘세월호 7시간’이 탄핵 사유로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인용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 네 주체에게 가장 큰 압력으로 작용했던 프레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은 여러 세력 간에 일어난 프레임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언론, 특히 방송뉴스의 경우 각 방송마다 보도의 논조나 방향성에서 스펙트럼이 다양했죠.

대통령 차량이 이동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좋아요. 그러면 그때는 다른 얘기를 해도 되거든요. 예를 들어 이동하는 장면은 자료화면처럼 보여주면서 오늘 일정이라든가 국정운영에 대해 대선 전에 밝혔던 대통령의 계획을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식의 중요한 팩트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앵커가 기자한테 ‘저 경로를 택한 이유가 뭐냐’라고 물어보면 ‘직선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경호실에서 여러차례 검증된 도로를 택하는 거다, 신호 조작을 해서 몇분 만에 도착한다’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요.

대형 사고나 큰 이벤트가 생기면, 항상 취재윤리를 염두에 두고 취재를 해야 한다고요. 당시 용어가 없었을 뿐이지 ‘기레기’라고 비난받을 상황이었던 건 마찬가지죠. 또 이런 것도 있어요. 기레기라고 하면 자사의 이익, 혹은 권력이나 광고주를 위해 기사를 쓰는 거죠. 독자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요.

독자들이 봤을 때 뭔가 문제가 있다 싶으면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 상관없이 바로 ‘기레기’라는 소리가 나와요. 기레기라는 단어가 한국 언론 전체를 상징하는, 굉장히 보편적인 용어가 된 거예요.

저는 출입처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사안이 불거지면 사실인지 확인부터 해야 하는데, 우리 출입처 시스템에서는 정당·정부부처에서 보도자료나 성명이 나오면 일단 무조건 써요. 거기에 대한 비판이나 반박이 있으면 그걸 또 쓰고요. 쓰고, 또 쓰고, 나중에 ‘공방’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내버려요.

말씀하신 것처럼 대선과 얽힌 이해관계가 각 언론사와 기자에게 있는 거예요. 자기가 출입하는 정당, 부처가 잘되어야 자기가 잘되거든요.

그리고 정치부는 정보 보고가 무척 중요해요. ‘유능한 기자’는 ‘정보 보고를 잘하는 기자’라고 할 정도로, 기삿감이 되든 안 되든 데스크에 보고를 많이 할수록 좋은 점수를 받아요. 청와대·여당의 정보를 윗선에 보고하는 게 기자들에게 중요한 일이 되는 거죠. 공영방송사에서는 고위 간부들이 보고를 받지만 일반 신문사나 민영언론사에서는 사주가 보거든요. 그래서 KBS·MBC보다 SBS 기자들이 훨씬 정보 보고도 많이 하고 잘해요. 조·중·동의 정보 보고 능력은 대단하죠. 기자들이 고급 정보에 가장 깊숙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청탁금지법을 강화할 필요는 있어요. 선거법을 위반하면 안 되니까 선거 때와 정권 초기에 몸을 사리고 있지만 기업 간부들의 접대는 아직 있고, 시간이 좀더 지나면 슬슬 구태가 다시 드러날 거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신문 전체를 봤단 말이에요. 지금은 핸드폰으로 기사 하나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전체 논조를 보려면 종이신문을 다 넘겨봐야 해요. 그러면 A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고 B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고, 문재인은 이쪽에서 다루고 안희정이나 안철수는 저쪽 면에서 다루는 게 다 보이거든요. 그런데 인터넷에 특정 기사만 딱 올라오면 ‘어, 문재인 비판 기사인데 한겨레네. 이놈들 옛날 버릇 못 고치고 있어’라는 식으로 흘러가기 쉬워요.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기자들도 어느 순간 언론 기득권 체제에 순화되고 동화된 측면이 있어요. 출입처 체제에 굉장히 안주했잖아요.

‘우리 사회에 리영희 같은 기자가 없다, 젊은 기자들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기자가 없다’고 하죠. 손석희 씨는 조율을 굉장히 잘하고 공정함과 중립의 표상이기는 하지만 리영희 선생처럼 언론과 사회가 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는 분은 아니잖아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난 건가요?

요즘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등 진보언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커졌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한겨레에 집중되는 감이 있고요. 문제는 이 비판이 보수진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같은 진영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독자·수용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 여러 지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의 재구(reconstruction)는 전 세계 초기 농업 관련 지식과 관습이 어디서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밝혀내는 강력한  도구를 제공한다. 이같은 언어학 연구는 많은 경우 고고학 자료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역사적 재구를 통해 발견한 자료가 쌓이면 과거의 어느 민족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를 밝혀낼 수 있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고고학자들이 탐구해야 할 지역, 새롭게 탐구해야 할 주제가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의 새로운 과제도 설정된다. 게다가 차용어의 경로를  조사해보면 지식의전파 경로 또한 드러난다. 기원전 제7천년기에 염소와 양이라는 어휘가 초기 쿠시어파에서  나일 사하라어족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 P179

한국에서 벼농사가 본격화된 시기는 금속기 사용 및 견인 동물 우경(牛耕)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요소가 한꺼번에 ‘패키지‘로 도입된 시기가 민무늬토기 시대인데, 이 무렵 한반도 전역에 고인돌 거석 무덤이 확산되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매장지의 거석 기념물이 확산되던 것과 비교되는 현상이다. 서유럽에서 발달한 집단 무덤과 달리 한반도의 고인돌에는 한 사람만 묻혔다. 이는 당시 갈수록 강화되던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P279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유럽과 중국 지역의 도처에서 마을을 둘러 환호를 건설했고, 유럽의대서양 연안이나 한국 같은 경우는 거석(巨石)을 이용하여 무덤을 조성했다.  초기 농업 사회의 맥락에서 이러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노동의가치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업적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같은 거대한 업적이 소규모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 주목을끈다. 이는 강력한 전통의 계승과 사회적 불평등을 지속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건축물들은 공동체의 의무 유지를 강조하는 선언문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즉 가정 단위뿐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의 이익을위해서도 노동력을 투자할 의무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 P291

야훼 숭배주의 모델에 따르면, 통치자는 농업 생산을 통제하고 상의하달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한다. 의사 결정은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생산 수단과 방식은 명령에 따라 예속 노동자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사례는 몇몇 극단적인 전제 군주 체제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 대부분의 초기 도시에서는 다양한 문제가  다양한 차원에서 결정되었으며 권력 관계의 복잡한 연결망을 통해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도시라면 공통적으로 고민한 근본 문제가 있었다. 이 많은 인구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먹여 살릴 것인가? 관개 시설 이용이나 곡물 다양성 선택 같은 의사 결정을 제대로 했는지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운송 능력과 생산량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결정적 요인은 어떤 농업 시스템이든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 · 정치 · 경제적 의무 시스템이다. 그래서 의사 결정에 필요한 자연환경 요인, 기술적 요소, 사회적 제약을 검토해야 하고, 정보의 활용 능력이나 문화적 규범의 유연성이 다양한 요소들을 얼마나 강화했는지 혹은 얼마나 제한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P3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양의 발전의 핵심을 두 가지 들라면 첫째, 상부에서여러 도구가 발달한 것이고 둘째, 18세기에 여러 수단과 방법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어땠을까? 유럽과 가장 거리가 먼  경우는 중국으로서 이곳에서는 제국의 행정이 경제의 계서화를 가로막았다. 단지 효율성 있게 돌아가는 것은 하층의 읍 및 도시의 상점과 시장뿐이었다. 유럽과 가장 유사한 경우는 이슬람 권과 일본이다. 물론 우리는 세계적인 차원의 비교사를 다시시도해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해줄 것이다.
- P184

내가 "경제 (economie)" — 또는 시장경제 — 라고 부른 것과
"자본주의(capitalisme)"라고 부른 것 사이의 영역 차이는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중세 이래 유럽에서 언제나  지속되던 상수(常數)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 시기의 모델에 세번째의 영역을 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非)경제라는 제일 아래층이다. 경제는 이곳을 부식토로 삼아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전체를 장악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 최하층은 거대하다. 이 위에 시장경제의 영역이 수평적으로 여러 다양한 시장과 연결을 늘려간다. 이곳에는 어느 정도의  자동성(automatisme)이 있어서 수요와 공급과 가격을 연결해준다. 마지막으로 이 시장경제라는 층의 옆에, 차라리 그 위에, 반(反)시장(contre - marché)의 영역이  있다. 이곳은 가장 약삭빠르고 가장 강력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바로 이곳이 자본주의의 영역이다. 그것은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 P323

간단히 말해서 자기 영역이 아닌 곳에 자본주의가 침투한 것은 그 자체로는 정당화가 안 된다. 단지 상업의 필요성이나 이익에 따라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생산에 손을 댔다. 자본주의가 생산 영역에 침입하는 것은 기계 사용이 생산의 조건들을 변화시켜서 산업도 이윤의 확대가 가능해진 영역이 된 산업혁명기에 가서야 일어난다. 이때 자본주의는 그런 것에 의해서 크게 변형되고 나아가서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국면에 따라 변화하는 행보를 포기한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9-20세기가 되어서는 산업과는 또 다른 조건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의 자본주의라고 해서 그것이 단지 산업생산 양식에만 연관된 것은 결코 아니다.
- P5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삶의 과정이, 다시 말해 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며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떤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27/160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 ~ 1980)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Lieben wir das Leben noch?>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다룬 독립된 저자의 유작 8편을 묶은 책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보면 각 편들의 내용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고 이 연결고리를 통해 개인부터 현대 사회의 공통된 문제와 해결방안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롬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목적을 미래의 행복에 두지 않고, 지금 눈 앞의 현실에서 발견하는 자세는 수단과 목적을 원래자리로 돌려놓는 것과 같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언어적이며 추상적인 것 대신 비언어적이며 구체적/경험적인 것을 긍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또다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이기도 하다.  


 현대의 다른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수단을 실제로도 수단으로, 목적은 실제로도 목적으로 놔두어야지 둘을 뒤죽박죽 섞지 말자고 결심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서구의 종교와 인문주의 전통에 진심을 다하자고 결심해야 한다. 진심을 다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그 전통에 찬동은 해야 한다. 지금은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다시 인간에게 윗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0/160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p29)... 창조적인 화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자기 나무나 꽃, 풍경을 보는 화가는 나무가 예쁘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다. 나무의 이름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두는 것은 나무를 남김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 그 나무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0/160


 순전히 개념으로만 인지할 경우 그 나무는 개성이 없으며 그저 '나무' 종 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나무가 추상의 대변인에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전한 구체성과 더불어 그것만의 유일성을 띠게 된다. 그럴 경우 세상엔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바라보며 응답하는 이 한 그루의 나무만 존재한다. 그 나무가 나의 고유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에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4/135


 에리히 프롬은 그 첫째로 눈 앞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른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진실(眞實)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창조성이 필요하며, 창조성에 바탕을 을 둔 긍정하는 태도는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인간을 목적으로 긍정하며, 수단으로 착취당하면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증오 등)을 대신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대규모 인간소외를 조장하는 현대사회 문제의 해결책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현재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감성과 지성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 전체를 재발견해야 한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써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을 재발견해야 한다. 나는 정신과 몸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p33)... 현대의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떠안아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창조적 인간이 되어 수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성이란 하나의 태도, 하나의 성격,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로서 창조성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4/135


  사고와 감정으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용기와 믿음이 없다면 창의성도 없다. 따라서 창의적 자세를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와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둘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최고의 대답은 이렇다. 창의성은 보고 (혹은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대답하는 능력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4/135


 나는 여기서 사용한 긍정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사랑은 삶과 성장, 기쁨과 자유의 긍정과 같은 뜻이므로 당연히 악, 그러니까 부정, 죽음, 강제는 사랑할 수 없다. 분명 주관적 감정은 신나는 흥분의 감정일 수 있고, 흔히 이것을 의식적으로 '사랑'으로 이해한다. 당사자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주관적 경험은 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8/135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으로 권위주의적 체제를 부정적인 제도로 해석한다. 프롬의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은 신(神)에 부여된 권위에 더해 자본(資本)이라는 우상을 '물신(物神)'으로 만들고 인간소외의 현실을 은폐시키는 부정적 도구다.  소외된 인간이 느끼는 결핍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은폐시킨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는 '소비자 주권'이라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 주권'을 통해 개인이 주도권을 갖는 양 호도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기에 현대인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맞닿아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지성과 감성, 관능의 가능성을 모두 갖춘 자아를 긍정할 깊은 감각을 키울 만큼 개인을 지지하지 못했다. 개인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생산과 이윤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강요한 청교도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은 파시즘이 대두할 조건을 마련했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3/135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호모 컨슈멘스 homo consumens)'으로 변해버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수동적이며 날로 더해가는 끝없는 소비로 텅 빈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과식, 구매, 음주가 우울증과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임상적 사례가 존재한다(p101)... 최대 소비에서 최적 소비로 이행하는 것은 생산패턴의 극적인 변화가 될 것이며 나아가 뇌를 세척해 탐욕을 점점 더 부추기는 광고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올 것이다(광고의 제한과 공공 부문 생산의 증가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거의 생각할 수가 없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02/135


 인간은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 때문에 다양한 이유로 불안과 소외감을 느낀다. 이 시스템이 날로 커져가는 경제적, 관료적 거인을 만들어내며, 그 거인과 마주 선 개인은 작고 무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은 날이 갈수록 시회의 사건에 적극 참여할 수 없으며, 중간 시민계급에서 그 아래 시민계급에 이르는 폭넓은 계층에 커다란 불안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09/135


 인간은 최고의 자산, 즉 경제적/기술적 진보에 쓰이는 도구가 된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동기에서 활동적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결과가 중요하다(p124).... 수동성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소비하라는 강제, 소비하는 인간이 되라는 강제다. 소비하는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안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5/135


 정치적 수동성에서도 똑같은 것을 목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척하며 거기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선거와 이런저런 후보에 대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무관심하며 완벽하게 숙명론적이다.... 활동적인지 않은 민주주의, 가난한 로마 시민들이 서커스나 검투 경기를 볼 때나 요즘 사람들이 경마를 볼 때와 똑같이 수동적인 관중의 자세를 취하는 민주주의가 무슨 민주주의란 말인가? 물론 그렇게 된 데는 TV 같은 기기의 역할이 크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5/135


 저자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문제점 해결을 위해 잠시 현재에 머물 것을 권유하며,. 'Laissez faire'라는 시장방임주의 대신 'Let It Be'를 말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소비가 아닌, 자신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바쁨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진실을 바라볼 것을 말하는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작은 것으로부터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프롬의 주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고도 단순하기에 감동과 신선함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행동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작은 결핍이 오늘날의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서양 기독교가 낳은 자본주의라는 현대의 병폐를 동양의 선(禪)으로 넘으려는 내용 안에서 현대 사상의 큰 흐름을 확인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6/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씨가 말하였다. "세금이란 관부(官府)의 물건입니다. 공께서는 절도사이시니 먼저 세금을 내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아랫사람들을 통솔하시겠습니까? 또 혼자서만 이정(里正)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세금을 내어 초달(楚撻, 매섭게 달고 치는 것)을 면하였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주행봉에게 유세하였다. "공의 얼굴에 글씨가 새겨 있으니 아마도 조정의 사자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이니 청컨대 약으로 그것을 없애시오." 주행봉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한(漢)에 경포(?布)가 있었는데, 영웅이 되는 데는 방해되지 않았다 하니 내가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소?"

황상이 말하였다. "근래의 왕조에서는 대부분이 진실로 믿고 제후들을 대우하지 아니하니 제후들 가운데 비록 충절(忠節)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로 말미암지 못하였다. 제왕 된 사람은 다만 그 신의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찌 제후가 마음으로 귀부하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도적들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 까발리어 고발하게 하여서 그 고발한 재산의 반을 그에게 상으로 주고, 혹은 친척이 그들[도적]을 위하여 자수하게 하면 그 무리들의 패거리들을 논죄(論罪)하고 그 자수한 사람을 사면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도적은 모일 수 없을 것입니다."

1년 시간 동안에 그의 직무를 살피시어 만약에 과연 능히 알맞게 감당할 수 있으며 그의 관직이 이미 높다고 한다면 평장사(平章事)로 제수하시고, 아직 높지 않다면 조금씩 바꾸어 승진시키고 권지(權知)의 일은 예전처럼 하게하십시오. 만약에 알맞지 않는다면 그들의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것을 거두시고 그 천거한 사람에게 책임 지우십시오.

무릇 정치를 하는데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신의를 두텁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신의가 진실로 드러난다면 전지(田地)는 넓어지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고, 전지가 넓어지면 곡식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면 이를 백성들에게 쌓아 두는 것은 마치 관부에 쌓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