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지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의 재구(reconstruction)는 전 세계 초기 농업 관련 지식과 관습이 어디서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밝혀내는 강력한  도구를 제공한다. 이같은 언어학 연구는 많은 경우 고고학 자료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역사적 재구를 통해 발견한 자료가 쌓이면 과거의 어느 민족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를 밝혀낼 수 있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고고학자들이 탐구해야 할 지역, 새롭게 탐구해야 할 주제가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의 새로운 과제도 설정된다. 게다가 차용어의 경로를  조사해보면 지식의전파 경로 또한 드러난다. 기원전 제7천년기에 염소와 양이라는 어휘가 초기 쿠시어파에서  나일 사하라어족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 P179

한국에서 벼농사가 본격화된 시기는 금속기 사용 및 견인 동물 우경(牛耕)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요소가 한꺼번에 ‘패키지‘로 도입된 시기가 민무늬토기 시대인데, 이 무렵 한반도 전역에 고인돌 거석 무덤이 확산되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매장지의 거석 기념물이 확산되던 것과 비교되는 현상이다. 서유럽에서 발달한 집단 무덤과 달리 한반도의 고인돌에는 한 사람만 묻혔다. 이는 당시 갈수록 강화되던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P279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유럽과 중국 지역의 도처에서 마을을 둘러 환호를 건설했고, 유럽의대서양 연안이나 한국 같은 경우는 거석(巨石)을 이용하여 무덤을 조성했다.  초기 농업 사회의 맥락에서 이러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노동의가치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업적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같은 거대한 업적이 소규모 사회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 주목을끈다. 이는 강력한 전통의 계승과 사회적 불평등을 지속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건축물들은 공동체의 의무 유지를 강조하는 선언문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즉 가정 단위뿐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의 이익을위해서도 노동력을 투자할 의무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 P291

야훼 숭배주의 모델에 따르면, 통치자는 농업 생산을 통제하고 상의하달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한다. 의사 결정은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생산 수단과 방식은 명령에 따라 예속 노동자에게 의무로 부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사례는 몇몇 극단적인 전제 군주 체제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 대부분의 초기 도시에서는 다양한 문제가  다양한 차원에서 결정되었으며 권력 관계의 복잡한 연결망을 통해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도시라면 공통적으로 고민한 근본 문제가 있었다. 이 많은 인구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먹여 살릴 것인가? 관개 시설 이용이나 곡물 다양성 선택 같은 의사 결정을 제대로 했는지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운송 능력과 생산량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결정적 요인은 어떤 농업 시스템이든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 · 정치 · 경제적 의무 시스템이다. 그래서 의사 결정에 필요한 자연환경 요인, 기술적 요소, 사회적 제약을 검토해야 하고, 정보의 활용 능력이나 문화적 규범의 유연성이 다양한 요소들을 얼마나 강화했는지 혹은 얼마나 제한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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