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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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삶의 과정이, 다시 말해 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며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떤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27/160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 ~ 1980)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Lieben wir das Leben noch?>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다룬 독립된 저자의 유작 8편을 묶은 책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보면 각 편들의 내용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고 이 연결고리를 통해 개인부터 현대 사회의 공통된 문제와 해결방안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롬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목적을 미래의 행복에 두지 않고, 지금 눈 앞의 현실에서 발견하는 자세는 수단과 목적을 원래자리로 돌려놓는 것과 같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언어적이며 추상적인 것 대신 비언어적이며 구체적/경험적인 것을 긍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또다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Copernican revolution)'이기도 하다.  


 현대의 다른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수단을 실제로도 수단으로, 목적은 실제로도 목적으로 놔두어야지 둘을 뒤죽박죽 섞지 말자고 결심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서구의 종교와 인문주의 전통에 진심을 다하자고 결심해야 한다. 진심을 다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그 전통에 찬동은 해야 한다. 지금은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다시 인간에게 윗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0/160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p29)... 창조적인 화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자기 나무나 꽃, 풍경을 보는 화가는 나무가 예쁘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다. 나무의 이름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두는 것은 나무를 남김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 그 나무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0/160


 순전히 개념으로만 인지할 경우 그 나무는 개성이 없으며 그저 '나무' 종 중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나무가 추상의 대변인에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전한 구체성과 더불어 그것만의 유일성을 띠게 된다. 그럴 경우 세상엔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바라보며 응답하는 이 한 그루의 나무만 존재한다. 그 나무가 나의 고유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에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4/135


 에리히 프롬은 그 첫째로 눈 앞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을 강조한다.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른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진실(眞實)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창조성이 필요하며, 창조성에 바탕을 을 둔 긍정하는 태도는 '사랑'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인간을 목적으로 긍정하며, 수단으로 착취당하면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증오 등)을 대신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대규모 인간소외를 조장하는 현대사회 문제의 해결책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현재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감성과 지성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 전체를 재발견해야 한다. 혹은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써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을 재발견해야 한다. 나는 정신과 몸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p33)... 현대의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떠안아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창조적 인간이 되어 수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성이란 하나의 태도, 하나의 성격,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로서 창조성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4/135


  사고와 감정으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용기와 믿음이 없다면 창의성도 없다. 따라서 창의적 자세를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와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둘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최고의 대답은 이렇다. 창의성은 보고 (혹은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대답하는 능력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4/135


 나는 여기서 사용한 긍정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사랑은 삶과 성장, 기쁨과 자유의 긍정과 같은 뜻이므로 당연히 악, 그러니까 부정, 죽음, 강제는 사랑할 수 없다. 분명 주관적 감정은 신나는 흥분의 감정일 수 있고, 흔히 이것을 의식적으로 '사랑'으로 이해한다. 당사자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주관적 경험은 내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38/135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으로 권위주의적 체제를 부정적인 제도로 해석한다. 프롬의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은 신(神)에 부여된 권위에 더해 자본(資本)이라는 우상을 '물신(物神)'으로 만들고 인간소외의 현실을 은폐시키는 부정적 도구다.  소외된 인간이 느끼는 결핍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은폐시킨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는 '소비자 주권'이라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 주권'을 통해 개인이 주도권을 갖는 양 호도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기에 현대인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맞닿아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지성과 감성, 관능의 가능성을 모두 갖춘 자아를 긍정할 깊은 감각을 키울 만큼 개인을 지지하지 못했다. 개인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생산과 이윤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강요한 청교도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은 파시즘이 대두할 조건을 마련했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63/135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호모 컨슈멘스 homo consumens)'으로 변해버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수동적이며 날로 더해가는 끝없는 소비로 텅 빈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과식, 구매, 음주가 우울증과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임상적 사례가 존재한다(p101)... 최대 소비에서 최적 소비로 이행하는 것은 생산패턴의 극적인 변화가 될 것이며 나아가 뇌를 세척해 탐욕을 점점 더 부추기는 광고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올 것이다(광고의 제한과 공공 부문 생산의 증가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거의 생각할 수가 없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02/135


 인간은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 때문에 다양한 이유로 불안과 소외감을 느낀다. 이 시스템이 날로 커져가는 경제적, 관료적 거인을 만들어내며, 그 거인과 마주 선 개인은 작고 무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은 날이 갈수록 시회의 사건에 적극 참여할 수 없으며, 중간 시민계급에서 그 아래 시민계급에 이르는 폭넓은 계층에 커다란 불안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09/135


 인간은 최고의 자산, 즉 경제적/기술적 진보에 쓰이는 도구가 된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동기에서 활동적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결과가 중요하다(p124).... 수동성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소비하라는 강제, 소비하는 인간이 되라는 강제다. 소비하는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안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5/135


 정치적 수동성에서도 똑같은 것을 목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척하며 거기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선거와 이런저런 후보에 대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무관심하며 완벽하게 숙명론적이다.... 활동적인지 않은 민주주의, 가난한 로마 시민들이 서커스나 검투 경기를 볼 때나 요즘 사람들이 경마를 볼 때와 똑같이 수동적인 관중의 자세를 취하는 민주주의가 무슨 민주주의란 말인가? 물론 그렇게 된 데는 TV 같은 기기의 역할이 크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5/135


 저자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문제점 해결을 위해 잠시 현재에 머물 것을 권유하며,. 'Laissez faire'라는 시장방임주의 대신 'Let It Be'를 말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소비가 아닌, 자신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바쁨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진실을 바라볼 것을 말하는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작은 것으로부터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프롬의 주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고도 단순하기에 감동과 신선함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행동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작은 결핍이 오늘날의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서양 기독교가 낳은 자본주의라는 현대의 병폐를 동양의 선(禪)으로 넘으려는 내용 안에서 현대 사상의 큰 흐름을 확인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p126/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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