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경제학자들이 볼 때에는 시장가격과 독점가격이 따로 있다. 즉 독점영역과 "경쟁영역(secteur concurrentiel)"이라는 두 개의 층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사람들이 경쟁영역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시장경제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제일 상층에는 독점이 있고 그 아래에 중소기업들에게 맡겨진 경쟁이 있는 것이다. 이 구분은 아직 우리의 논의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점차 상층의 것을 가리켜 자본주의라 부르는 관례가 퍼져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갈수록 최상급이 되어간다. 다름 아닌 트러스트, 다국적 기업 등 상층의 영역이다. 소규모 제조업 작업장이나 독립적인 소기업들도 자본주의와 관련을 가지지 않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65


 18세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광범위한 지상층(1층)의 영역이 존재하는데 최근의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오늘날 가장 산업화된 국가에서도 이런 층이 전체 경제활동의 30-4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와 같은 영역은 시장과 국가통제의 바깥에 놓여 있는 밀수, 재화와 서비스의 물물교환, "암거래 노동", 가구의 활동 등을 합친 것이다. "삼분할(tripartition)" 체제, 여러 층을 가진 경제라는 개념은 과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모델이며 다양한 관찰의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지상층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는 불완전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상층에서 하층까지 모두 아우르는 자본주의 "체제(systeme)"라고 하는 관점은 여러 면에서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와 그 아래층인 비(非)자본주의 사이에 생동하는 변증법이 작동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67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3권의 전체 결론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제규칙이 적용되는 다른 세계지만, 동시에 이 세상 경제계를 구성하는 3층 구조의 일부로서 이들을 바라봐야 한다는 전체 결론을 내리기 위해 저자는 어떤 길을 따라왔는가. 각 권의 리뷰를 통해 내용을 정리했지만, 전체적인 맥락 파악을 위해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La Dynamique du Capitalism>라는 저자 직강보다 더 잘 요약하기는 힘들 것 같다.


 책의 1권의 목적은 심층의 물질생활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책의 차례에 나와 있는 장들 자체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러한 힘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즉 물질생활 전반을 만들어내고 밀고 가는 힘이자, 물질생활 너머의 상위 영역까지 포괄해 인간의 역사 전체를 밀고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8


 물질문명은 경제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층(層)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삶이 이뤄진 배경인 물질생활은 큰 변화없이 일정한 크기만큼의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왔다. 어느 분야에서 이루어진 작은 혁신은 인구과 생산성의 한계로 지속적인 발전으로 이어지기 힘들었기 때문인데, 오랜 물질 생활의 층에서 변화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인구의 증가, 경작방법의 혁신에 따른 농업생산성의 증가, 과학과 기술의 접목 등으로 브로델은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꾸준한 변화가 있었음을 말한다. 


 15세기, 특히 1450년부터 경제가 전반적으로 회복 추세를 보입니다. 이 시기에 농산물 가격은 정체되거나 내려가는 반면, '공산품' 가격은 올라가는 덕분에 도시가 농촌에 비해 빠른 속도로 성장합니다(p34)... 회복세에 돌입한 경제는 16세기에 들어서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복잡해집니다. 결론적으로 16세기의 활발한 상승세는 경제의 최상층인 상부구조가 번창한 덕분입니다. 또한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귀금속이 유입된 데다가 엄청난 규모의 어음과 신용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어음 교환 및 재교환 시스템이 이 상부구조를 더욱 부풀렸습니다. 17세기로 들어서면 경제생활의 활력이 지중해에서 광활한 대서양으로 이동합니다. 또한, 경제 활동이 금융 거래에서 다시 상품 거래, 즉 기초적인 교환으로 대거 복귀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p36)... 18세기는 경제 전반이 가속적으로 팽창하던 세기였습니다. 시장의 교환도구들이 총동원되어 논리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p37)... 이처럼 소비와 교환이 팽창하던 시기에 도시의 기초적 시장과 소매상점들이 예전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습니다. 마침내 영국의 역사 기록에서 사적 시장 private market이라고 부르는 것이 발달하게 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38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갑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없이 많은 행동이 뒤죽박죽 누적되고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를 대신해 결정을 합니다. 이 같은 행동을 유도하는 유인과 충동, 그러한 행동의 전형과 방식, 또 그리 행동해야 할 책임을 살펴보면,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물질생활 vie materielle'이라는 편리한 용어로 파악하려고 했던 내용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6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넘을 수 없었던 인구의 상한선을 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인구는 증가 추세의 정지나 반전 없이 끊임없이 늘어납니다. 18세기까지는 인구가 거의 근접할 수 없는 원 안에 갇혀 있는 양상이었습니다. 만약 인구가 늘어나 그 원둘레에 닿기라도 하면, 인구는 거의 즉각적으로 성장을 멈추고 다시 줄어듭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9


  설탕, 커피, 차 그리고 알코올 같은 식품들은 각각의 역사의 흐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곡물은 예로부터 주된 먹을거리였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밀, 쌀, 옥수수는 인류가 아주 오래 전에 선택한 곡물입니다. 이러한 곡물은 각 문명이 수 세기에 걸쳐 수없이 많은 실험을 통해서 선택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21


 기술의 역사는 인간이 일해온 역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인간이 하루하루 바깥세상에 맞서 자기자신과 싸우는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보합니다. 기술은 그 더딘 발걸음에 맞춰 진화합니다. 이러한 기술이야말로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활동이고,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천천히 변화합니다. 과학은 한발 늦게 기술을 따라가는 상부구조여서 기술과 조응하더라도 그 과정은 아주 느리게 진행됩니다. 옛날부터 온갖 기술과 과학의 모든 요소는 항상 섞이고 전 세계로 퍼지면서 끊임없이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잘 확산되지 않는 것은 기술의 결합과 조합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23


 

나는 1권의 마지막 두 장에서 화폐와 도시를 다뤘습니다. 이는 화폐와 도시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최근에 등장한 근대성의 뿌리 깊은 요소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화폐와 도시는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뼈대를 이루게 된 구조물입니다. 도시와 화폐는 변화를 촉발하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러한 변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24


 1권과 2권을 연결하는 매개는 '도시'와 '화폐'다. 농촌보다 앞선 도시의 생산성과 화폐로 대표되는 교환경제로부터 오랜 물질생활의 균형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물질생활에서 사용가치만 가지던 재화는 시장을 통해 교환가치도 함께 부여받는데, 사용가치와는 달리 교환가치는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유인이 있었다. 여기에 눈을 돌린 일부 상인들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시장을 발전시켜 나간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의 사치품과 전쟁무기, 카를로 M. 치폴라(Carlo M. Cipolla, 1922~2000) 의 대포, 범선, 시계가 여기에 해당하는 품목이 될 것이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관료, 상인들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수많은 거점을 통해서, 한쪽에 광활하게 퍼져 있는 생산활동과 다른 쪽에 역시 광활하게 퍼져 있는 소비활동을 연결하는 이른바 교환경제 economie d'echage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교환경제는 분명 태곳적부터 이어져 왔겠지만, 생산 활동 전체를 소비 활동 전체와 결합하는 지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교환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더라도 시장경제 economie de marche는 계속 발전합니다. 그러다가 생산을 조직하고 소비의 방향을 유도하고 통제하게 될 만큼 시장경제가 많은 읍 bourg(邑)과 도시를 연결해가게 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26


 시장으로부터 갖가지 유인과 활력, 혁신이 일어났고, 사람들의 주도적 행동과 다각적 인식이 생겼습니다. 또 시장을 통해서 경제 활동이 성장하기도 했고, 나아가 진보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시장의 바깥에 머무는 것들은 모두 사용가치밖에 없습니다. 시장이라는 좁은 문의 경계를 건너는 것들은 전부 교환가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 교환 영역을 나는 경제생활 vie economique이라고 칭하여 물질생황 vie materielle과 대조하고자 했습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27



 시장과 초보적인 교환 행위자들 위에는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정기시 foire(定期市)와 거래소 Bourse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기시는 소규모 판매자와 중소 규모 상인들을 대상으로 열렸는데, 정기시 또한 거래소처럼 큰 규모로 거래하는 거상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조만간 도매상 negociant으로 불리게 되는 이 거상들은 소매 거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게 됩니다. '교환의 세계 Les Jeux de l'echange'로 이름 지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제2권의 앞부분 장들에서는 시장경제의 다채로운 요소들을 기술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29


 영국의 역사가들은 전통적 시장인 공적 시장과 병행하여 그들이 사적 시장이라고 명명한 시장이 15세기부터 점점 성장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나는 이 시장을, 기존의 전통적 시장과 다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한 반反시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출현한 이 시장은 과도한 교란을 유발할 만큼 전통적 시장의 규칙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도 애쓰지 않았습니까?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64


 브로델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독점의 형태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원거리 무역'임을 강조한다. 원거리 무역이라는 경제적 해자(Economic moats)를 구축하고, 무역을 독점(monopoly)해서 한계비용 수준에서 책정되는 시장가격(P=MC)을 시장에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 결국 Price maker(setter)와 Price taker의 차이를 브로델은 발견한다. 이들의 투자행태는 워런 버핏(Warren Edward Buffett, 1930 ~ )과 피터 린치(Peter Lynch, 1944 ~ )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보면 무리가 있을까.


 요약하면,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볼 때 유럽 경제가 다른 곳보다 앞섰던 것은 거래소와 다양한 신용 형태 같은 우월한 장치와 제도 덕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환 메커니즘과 기법 들 모두 유럽 이외의 지역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다만 지역마다 얼마나 발달했고 어느 정도로 활용됐는가는 많이 달랐습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45


 사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18세기까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이 두 유형의 활동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그 무렵까지 인류가 영위하는 생활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물질생활'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p51)... 시장가격이 물질생활이라는 표면에 닿기는 하지만, 항상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깊이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을 두고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흐름을 보면, 시장경제로 구성되는 활발한 생활공간이 지속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를 보여주고 또 입증해주는 지표는 세계를 가로지르는 연쇄적인 가격변동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53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원거리 무역이란 말은 독일어 'Fernhandel'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최상층의 상거래 활동을 눈여겨본 것은 독일 역사가들만이 아닙니다. 원거리 무역은 원하는 대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통상적 감독을 막아주거나 적어도 우회할 수 있을 만큼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p66)... 높은 이익을 거두는 것은 거래하는 지역과 품목을 갈아타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처럼 두둑한 이익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됩니다. 특히 원거리 무역은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했으니 자본 축적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이런 사업에는 아무나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지역 내 상거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67


 결국, 자본가들은 그들이 축적한 자본의 크기 덕분에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시대의 굵직한 국제 사업을 장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에는 운송이 아주 느려서 큰 거래를 하려면 자본의 회전이 오래 지연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p70)... 시장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문화와 분업이 빠른 속도로 심화되고 상품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꼭대기에 있는 상인 자본가들은 이러한 전문화와 분업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기능에 세분화되는 과정, 그렇게 진행된 근대화 과정은 애초부터 수직적 위계의 밑바닥에서만 나타났습니다. 수직적 위계의 꼭대기에는 전문화라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19세기까지 최상위 상인들은 어느 하나의 활동에 국한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71


 이제 요약을 좀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환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곳에 자리하는 교환이고, 이러한 교환은 투명하기 때문에 경쟁의 힘이 항상 작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교환이고 섬세하며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지배하는 메커니즘도 다르고 행위자도 다릅니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자리하는 영역은 첫 번째 교환이 아니라, 두 번째 교환입니다(p74)... 자본주의의 밑바탕을 이루는 불평등한 힘의 관계는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최초의 자본주의가 자기 모습을 펼치고 세력을 형성하며 우리 눈앞에 등장한 것은 사회의 최상층에서였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물질생황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서 있습니다. 물질생활이 팽창하면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신은 빨리 팽창하고 또 자신의 관계망을 확장합니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팽창할 때 자본주의는 항상 이득을 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76


 마지막 3권에서 브로델은 경제계(economie-monde)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속성을 보다 깊숙하게 드러낸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전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책을 고르라면 단연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2019)의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일 것이다. 경제적 헤게모니(Hegemony)를 통해 중심부-주변부의 관계를 살핀 월러스틴의 관점과 브로델의 관점은 경제권을 '중심부(core)- 주변부(periphery)'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경제권을 단극(單極)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극(多極)으로 볼 것인가, 헤게모니의 이동을 이전 패권세력의 이동으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붕괴-생성으로 볼 것인가의 차이로 정리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경제계는 지구의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된 경제를 가리키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경제 단위를 이루는 경제권을 말합니다. 경제계는 세 가지 특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차지합니다. 둘째, 하나의 경제계에는 언제나 하나의 핵, 혹은 중심이 있습니다. 셋째, 모든 경제계는 계층적인 경제권으로 나뉩니다. 우선, 중심 주위로 '중심부 coeur'가 자리잡게 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97


 월러스틴과 나는 이러저러한 논점이나 한두 가지 일반적 명제에서 의견을 달리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월러스틴은 16세기 들어서야 유럽 경제계가 구축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유일한 경제계였다고 봅니다. 이와 달리, 나의 생각은 유럽인들이 세계의 전체상을 인식하기 오래전부터 세계는 여러 개의 경제권들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이 경제권들이 그 중심의 구심력과 응집력을 어느 정도 갖춘 것들이어서 복수의 경제계로서 공존했다고 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98


 경제계는 하나의 핵, 즉 무게 중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 양 기존의 중심이 해체될 때마다 새로운 중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심의 해체와 재형성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어서, 그만큼 더 중요합니다(p101)... 유럽에서 숙명의 시계는 다섯 번에 걸쳐 종을 울렸던 셈입니다. 그때마다 싸움과 충돌이 일어나고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면서 중심이 이동했습니다. 대개 중심이 이동하기 전에 벌써 예전의 중심은 위협을 받게 되고, 몰아닥치는 경제적 악조건이 옛 중심을 무너뜨리고 새 중심의 출현을 확정하게 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02


 서유럽은 신대륙에 고대의 노예제를 이전했고, 자신의 경제적 필요 대문에 동유럽에서 재판 농노제 성립을 유도했습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주장에 무게가 실립니다. 자본주의는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국제 경제 차원의 공모가 필요하다고 임마누엘은 주장힙니다. 자본주의는 매우 드넓은 공간을 권위주의적으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만약 제한된 경제 공간에 갇혀 있었다면 자본주의가 그렇게 드세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지역의 종속적 노동을 이용할 수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전혀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09


 국민 경제 economie nationale는 물질생활의 필요와 혁신을 반영하여 국가가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통일되고 응집된 경제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 공간의 활동이 한꺼번에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영국만이 일찌감치 이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p116)...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승리는 매우 느리기는 했지만 일찌감치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부터 시작되었고, 1786넌 에덴 조약에서 크게 앞선 데 이어, 1815년 승리를 확정하게 됩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19


 생산이 급격하게 팽창함에 따른 갖가지 요구사항을 영국 경제의 모든 부문이 해결한 셈입니다. 막히는 병목도 없었고 고장 난 부분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국민 경제 전체가 아닐까요? 더욱이 영국의 면직물 혁명은 밑바닥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나서 등장하는 산업 자본주의라는 것의 실체를 시장경제와 기초적 경제의 힘과 활력이 받쳐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산업 자본주의는 그 밑에서 받쳐주는 경제의 활력이 없었다면 성장할 수도 없었고 자기 자리를 잡고 힘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영국의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29


 자본주의란 것은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적어도 그처럼 높은 곳에 올라서려는 경제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자본주의는 그 밑에 두터운 층 두 개 - 물질생활과 촘촘한 시장경제 - 를 겹으로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본주의를 최상층의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31


 자본주의는 언제나 독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품과 자본은 늘 같이 돌아다녔고, 자본과 신용은 항상 외부 시장을 공략하고 통제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습니다(p132)... 자본주의의 특징과 강점은 이 술수에서 저 술수로, 이러한 행태에서 저러한 행태로 변화하는 능력입니다. 또 변화하는 국면에 따라 수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자본주의의 특징이자 강점이고, 그러한 변화무쌍함의 와중에도 비교적 자본주의에 고유한 본질에 충실하고 유사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또한 자본주의의 특징이자 강점입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p133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이 정도로 일단 마무리짓도록 하고, 자본주의와 관련된 다른 내용이 있을 때 추가적으로 다루도록 하자. 예를 들면, <어둠의 세계 The Shadow World>와 같은.


 공식적 무기산업과 어둠의 무기산업은 이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교차한다. 이들의 상호의존은 매우 뿌리 깊으며, 사실상 어둠의 세계를 구성하는 두 날개에 해당한다. 공식적 무기산업이 런던증권거래소라면 비공식적 무기산업은 규모가 작고 규제가 약한 '대체거래소'라고 할 수있다. 또한 그레이마켓과 블랙마켓은 제품의 실질적 수명을 연장하고, 이를 통해 제품의 초기 가치를 높여주는 기능을 한다. 공식적 무기산업에서 취급되기에는 품질이 낮은 제품이나 불량품을 거래할 시장을 형성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이러한 시장에서는 대형 방산업체나 국가가 법적/정치적/외교적 이유로 무기를 판매할 수 없는 개인, 집단, 국가가 고객이 된다. 어둠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공식적 무기업체의 에이전트, 브로커, 중개인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둠의 세계는 공식적 무기산업에 비해 작은 규모이지만, 어둠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공식적 무기산업에서 무기 가격이 높게 유지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어둠의 세계가 분쟁을 부추기고, 확대하고, 장기화함에 따라 공식적 무기산업의 새로운 시장이 창출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_ 앤드루 파인스타인, <어둠의 세계> , p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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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는 "시간 개념을 관장하는 인간의 뇌를 비롯하여 모든 시계가 똑같이 느려진다면, 시간 자체가 느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계로 재지 않고서는 시간의 지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을 측정하는 다양한 방법이며 그 방법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과 관련된다. 시간을 시공간으로 한정시키면 진짜 시간은 없어진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3개의 공간 차원과 시간으로 구성된 4차원 우주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과거’가 미리 배열된 것처럼 ‘미래’도 한 치 틀림없이 배열되어 있는 우주에 자유의지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웜홀은 블랙홀과 비슷한 가상의 왜곡 공간으로, 웜홀의 한쪽 입구로 들어가면 무한하게 휘어지는 짧은 시공간의 터널을 통과해 반대쪽 출구로 나와 우주의 다른 공간에 도착할 수 있다(농구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튜브를 상상하면 된다. 공의 표면을 따라 먼 길을 돌아가서 반대쪽 지점에 도착하지 않고 한가운데로 뚫린 직선 터널을 지나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듯이 시간과 공간은 밀접하게 얽혀 있으므로, 킵 손은 공간을 뛰어넘으면 동시에 시간도 뛰어넘을 수 있으며 따라서 웜홀을 따라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버나딘의 틀을 받아들인다면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관계적’ 속성이라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물(혹은 한 집의 방들) 사이의 거리가 3미터라고 하자. 시간 간격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려면 두 사건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도 두 사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버나딘은 공간은 시간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시간을 방문한다는 것은 다른 방(다른 영역의 공간)을 방문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스티븐 호킹과 레너드 믈로디노프Leonard Mlodinow는 우주 인플레이션을 물이 끓고 있는 큰 단지에 비유했다. 단지 안에서는 기포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팽창한다. 대부분의 공기 방울은 빠르게 팽창하다가 터지고 말지만, 개중에는 초기의 팽창 이후에 안정된 상태로 수면까지 올라오는 공기 방울도 있다. 우리의 우주는 이렇게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공기 방울과 비슷하다. 물론 수면까지 가기 전에 팽창하다가 터지는 방울이 대다수이지만, 우리 우주와 같이 성공하는 방울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 인플레이션은 우리의 우주만이 아니라 무한히 먼 과거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우주를 만들어왔으며,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낼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은 자체적으로, 에버렛의 양자 현상에 대한 ‘다중 세계’ 해석과는 전혀 별개로, 우리가 무한한 다중우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끈 이론은 물질과 에너지를 구성하는 궁극적 요소가 진동하는 아주 작은 끈과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끈은 서로 다른 진동수로 진동함으로써 우리가 양성자나 중성자라고 부르는 종류의 입자들을 만들어낸다. 끈 이론이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끈 이론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통합, 즉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의 통일이라는, 이제까지 물리학에서 성취하지 못한 과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끈 이론 연구에 몰두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그들 중 다수가 끈 이론을 기술하는 방정식이 우리의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함을 암시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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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표면이야말로 진정한 기준틀이라는 사고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나중에 시간 여행의 본성에 대해 살펴볼 때도 문제가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똑같다. 절대적인 값이다. 그것 참 신기하다.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밝힘으로써 위대한 도약을 이루어냈다. 그는 빛의 속도(거리의 측정치를 시간의 측정치로 나눈 값)가 불변량이 되려면 무언가가 탄력 있게 변해야 함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통찰이었다. 즉, 시간은 상대적이다(공간도 마찬가지지만, 경우가 다르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운동, 혹은 속도가 시간의 측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과 가속 또한 시간의 측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진정한 시간true time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래리의 시계와 배리의 시계는 똑같이 정당하다. 래리의 시계를 기준으로 보면 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리의 시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시계를 우선시한다. 당연한 얘기다. 배리의 시계는 지구에 남아 있던 수많은 다른 시계와 맞춰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래리의 시계도, 배리의 시계도 절대적인 시간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 여행이 일어나려면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야기 말미에 가서는 그중 하나를 내던져 버린다. 하지만 두 개의 시계가 없이는 시간 여행이 존재할 수 없다. 즉 쌍둥이 사례는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시간들 여행travelling in times’이라고 불러야 한다. 시간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지칭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진정한 시간을 말해줄 한 시계를 지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모든 상대론적 시간 여행은 이렇게 한 시계의 측정값을 다른 시계의 측정값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상대성이론은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속도만 달라질 수 있을 뿐 시간은 언제나 앞쪽만 향한다. 여기서는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론적 시간 여행은 시간 이주time-emigration에 차라리 더 가깝다. 일방통행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관점은 대략 두 가지 큰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실체적substantival 관점과 관계적relational 관점이다. 실체적 관점, 혹은 ‘절대적absolute’ 관점에서는 시간을 우주가 그 안에 들어가서 사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집이라 여긴다. 따라서 시간은 실체적이며, 고유하다. 시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우주의 작동과는 독립적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세상에 사물이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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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07-04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수 없다면 시간 여행은 불가능한걸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겨울호랑이 2022-07-05 04:52   좋아요 1 | URL
네, 저자가 밝히는 시간여행의 비밀을 들으면서 막연하게 우리가 시간여행에 대해 가져온 생각들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말 그대로 회의주의자의 쓴소리같은 기사였습니다 ^^:)
 
중세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역사도서관 교양 18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김위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이른바 '상업혁명'은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를 바꿔 놓은 일종의 사회혁명이기도 했다. 사회 변화와 더불어 한 계층이 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 독일 한자동맹(Hansa 同盟)에 속했던 많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새로 생겨난 눈에 띄는 중요한 사회 변화는 바로 상인 계층의 등장이었다. 장원 경제 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상인이 이제는 상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48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중세 유럽의 상인들 Tre Storie Extra Vaganti >는 상인(商人, merchant)을 주제로 한 짧은 대중역사서다. 14세기 초 대상인의 등장 시기와 이후 17세기와 18세기 화폐(貨幣)경제에서 상인의 움직임이 가져온 변화를 통해 독자들은 당시 생생한 경제활동을 중계방송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도시를 주름잡은 상인은 대상인(grandi mercanti), 다시 말해 보통 상인과는 달리 대체로 국제 교역에 종사하며 상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및 금융업(환전과 은행 업무)을 겸하던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경제 조직체가 육지 무역쪽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른바 '콤파니아'라고 불렸다. 콤파니아의 탄탄한 기반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형태의 가족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 (vecchio)이 판단 · 결정하고, 처벌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예외없이 여기에 복종해야 했고 이들에게는 '불평'(mugugno)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은 콤파니아에서 일할 사람을 선별하고 콤파니아의 모든 자본을 관리하였다. 이것도 새로 생겨난 요소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50

세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바로 14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피렌체의 중심 가문의 바르디(Bardi) 가문 이야기다. 중세 말기 봉건제와 교회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이들의 공백을 대신하는 대상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현대 영어 company에 해당하는 콤파니아(Compagnia)가 장원을 대신하여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왕과 귀족들에게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여해 주고, 대신 사치품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보던 르네상스 거상(巨商)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30년대 초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피렌체의 경제는 말 그대로 완전히 전복되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p60)... 여러 콤파니아가 파산하자 그 여파를 받아 2차, 3차 산업도 일거에 붕괴되었다. 보통, 콤파니아는 상업 활동 이외에도 은행업과 수공업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콤파니아가 도산하자 신용이 삽시간에 치명적으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와 관려된 모든 영역이 피해를 입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1

이들의 투자가 항상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에 패배한 왕에게 자금을 빌려 준 경우 그들이 가진 채권은 휴지조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푸거(Fugger)가문처럼 바르디 가문은 잉글랜드 군주에게 투자를 하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잉글랜드 군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고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여기에 더해 피렌체 전체 경기가 수축 국면에 진입하면서 많은 콤파니아들이 무너지는 등 바르디 가문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디 가문의 처세와 그들의 생존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세 콤파니아는 좋은 운수를 타고나지 못했다. 하필이면 앞에서 설명한 1330년대와 1340년대 같은 최악의 시기에, 그리고 바르디 가문의 일이 계속 꼬이기만 하는 그런 때에 창립되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가문 특유의 방식이었던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르디 가문 사람 몇몇이 이미 피렌체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하면 입김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피에로데이 바르디의 주도로 콤파니아의 일부 회원은 피렌체의 정부 체제를 전복하려고 쿠데타를 꾀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6

교환 중심의 시장 경제라면 바르디 가문은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바르디 가문의 모습은 이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적 대처를 잘 보여준다. 막강한 경제력을 활용해서 '화폐위조'라는 중대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치력을 발휘해 독점권을 강화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근대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15~18세기 유럽 경제를 분석하며 자본주의의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치폴라는 넌지시 자본주의의 기원은 이보다 이전 시대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바르디 가문 사람에게 법이라는 것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법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였다. 베르니오 법령을 새로 제정한 후 피에로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정성 들여 작성한 법령에 의거해 약탈을 일삼고 있던 자들을 모두 응징함으로써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제거하였고, 그 일대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약탈권을 독점하였다. 그 이상 극악무도해지기도 힘들 것이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72

특히 바르디 가문 출신의 세 사람이 확신했던두 가지 사실은, 첫째, 경찰의 손에 잡힐 확률은 거의 없다는 점, 둘째, 혹 잡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형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는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특권층에 속했고, 이 때문에 특별히 법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실제로 이들은 법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96

다른 두 편의 이야기의 중심도 역시 상인들이다. 화폐의 품질을 조악하게 만들어 유통시켜 막대한 부을 축적하고 한 나라(오스만 투르크)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해상무역을 통해 더 큰 세력으로 커나간 상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14세기 이미 자본주의 형태를 갖춘 대상인들의 현대 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안의 담긴 이야기는 간략하지만 이야기들이 던지는 메세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현대 무기산업자본, 환율을 이용하여 경제소국에게 외환위기를 강요하는 투기자본의 모습과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대기업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발견할 수 있다. 불과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경제사 관련 서적을 우리가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야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도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 문제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세로 가야할 듯하다. 과연 중세 경제사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세 유럽의 상인들>을 읽으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이후 다른 과제를 부여받은 느낌을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 정부의 모든 힘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조악해질 대로 조악해질 악화 루이지노의 유통을 막아 낼 길이 없었다. 오랫동안 은화 부족 현상을 감내하던 터키 경제는 위조된 대량의 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터키의 경제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더 이상 현금을 가지고 거래할 수가 없었다. 생필품의 가격은 두 배로 뛰어올랐고 빵조차 사 먹기가 힘들었다. 터키 제국에는 루이지노 화폐가 넘쳐났다. 하지만 아무도 이 화폐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모두들 이 화폐가 하루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13

상인은 점차 신분이 높은 층과 낮은 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은 프랑스어 사전에도 반영되었다. 상점을 직접 운영하며 소매업을 하던 자나 신분 상승을 꿈도 꿀 수 없던 사람에게는 마르샹(marchand)이라는 이름표가 그대로 남았다. 그 외의 사람, 즉 귀족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던 특권층을 위해 네고시앙(negociant)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졌다. 인간사에 흔히 일어나듯이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싸움, 적대감, 경쟁의식이 생기곤 한다. 어떤 네고시앙을 마르샹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자크 사바리는 다행히도 자신이 네고시앙이라 믿었고 수많은 네고시앙을 위한 경제 입문서를 저술하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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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부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대해 팽배한 증오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맞선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하자 전면적 반란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티롤, 이탈리아의 봉기 소식은 나폴레옹을 불안감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파괴하는 훨씬 더 중요한 과제에 집중했다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앞서 주목한 대로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프랑스와의 전쟁 전야에 영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쓴 오스트리아는 재정적 도움에 관한 주제를 조심스레 꺼내, 250만 파운드 선불 지급을 비롯해 750만 파운드의 보조금에 대한 대가로 병력 40만을 동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런던은 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은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며, 영국이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단 전쟁이 진행되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는 런던이 결정할 것이다.

사실 영국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영국의 공격을 가능케 하도록 나폴레옹의 주의를 분산한다는 맥락에서만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 담화에서 ‘오로지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다 잃었다면 나는 전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전멸에 우리가 기여하지 않았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패배는 덴마크가 한동안 경제 성장을 누렸음을 뜻하는데, 덴마크 농업의 성장은 해상 활동의 증대를 자극했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에 덴마크가 결국 휘말리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북방전쟁 이후 스웨덴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허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싶은 욕망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스웨덴 군주들은 1536년 이래로 덴마크와 공동의 왕위로 연결된 노르웨이를 획득할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 1807년의 전반적 상황은 1800년의 상황보다 훨씬 좋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승리를 거둬 발트해 연안까지 프랑스의 지배력을 확대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궁정의 신입자였지만 곧 왕위 배후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새로운 제2의 조국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조국의 이해관계를 수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데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스웨덴의 동부 국경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일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그 대신 스웨덴에 알맞은 보상이라고 여기는 서쪽의 노르웨이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가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데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베르나도트의 확고한 결심이 1813~1814년의 6차 대불동맹전쟁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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