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중부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 정권에 대해 팽배한 증오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맞선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징병제를 도입하자 전면적 반란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티롤, 이탈리아의 봉기 소식은 나폴레옹을 불안감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그는 오스트리아군을 파괴하는 훨씬 더 중요한 과제에 집중했다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은 당대 유럽 정치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전역의 전성기 이래로 나폴레옹을 감싸고 있던 무적의 기운을 약화시켰다. 비록 나폴레옹은 바그람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지만, 주의 깊은 관찰자는 대육군이 더는 1805~1806년 전역들의 훌륭하고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럽 상당 지역에 배치된 주둔군과 더불어 다양한 전역들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인해 대육군에는 상대적으로 노련한 병사가 별로 없었다.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패배와, 앞서 주목한 대로 아우스터리츠와 예나에서의 승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바그람에서의 제한적인 승리는 앞으로 무력 분쟁에서 나폴레옹이 더는 이기기 힘들 것임을 암시했다. 사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마지막 전투였다.

그의 이전 승전들은 구체제의 군대들을 상대로 거둔 것으로, 이들 군대는 프랑스 혁명이 풀어헤치고 나폴레옹이 갈고닦은 역동적인 전투 방식을 따라잡지 못해 쩔쩔맸다. 하지만 5차 대불동맹전쟁은 프랑스의 상대국들이 과거의 패전들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으며, 나폴레옹의 역량에 필적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자국 군대들의 점진적인 근대화와 프랑스 병사들이 누리던 질적 이점의 감소를 낳았음을 입증했다. 더 극적인 것은 전쟁의 외교적·정치적 결과였다.

프랑스와의 전쟁 전야에 영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쓴 오스트리아는 재정적 도움에 관한 주제를 조심스레 꺼내, 250만 파운드 선불 지급을 비롯해 750만 파운드의 보조금에 대한 대가로 병력 40만을 동원하겠다고 제의했다. 런던은 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도전하도록 부추겼지만 이번에는 그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은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며, 영국이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일단 전쟁이 진행되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는 런던이 결정할 것이다.

사실 영국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영국의 공격을 가능케 하도록 나폴레옹의 주의를 분산한다는 맥락에서만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폴레옹 황제는 한 담화에서 ‘오로지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진행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다 잃었다면 나는 전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트리아 군대의 전멸에 우리가 기여하지 않았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의 패배는 덴마크가 한동안 경제 성장을 누렸음을 뜻하는데, 덴마크 농업의 성장은 해상 활동의 증대를 자극했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에 덴마크가 결국 휘말리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대북방전쟁 이후 스웨덴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허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 싶은 욕망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스웨덴 군주들은 1536년 이래로 덴마크와 공동의 왕위로 연결된 노르웨이를 획득할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 1807년의 전반적 상황은 1800년의 상황보다 훨씬 좋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승리를 거둬 발트해 연안까지 프랑스의 지배력을 확대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영국-러시아 전쟁은 양측이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자 한 측면에서 독특했다. 러시아 함대는 공공연한 대결을 지속적으로 회피한 한편,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합의점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거듭 내비쳤다. 1810년 후반에 이르자 러시아가 대륙 봉쇄 체제로부터 점차 발을 빼고 있는 가운데, 양국 간 전쟁은 대체로 잦아들었고 영국과 러시아 간 교역은 늘어났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궁정의 신입자였지만 곧 왕위 배후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새로운 제2의 조국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조국의 이해관계를 수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데 전적으로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스웨덴의 동부 국경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핀란드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일체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그 대신 스웨덴에 알맞은 보상이라고 여기는 서쪽의 노르웨이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가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데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베르나도트의 확고한 결심이 1813~1814년의 6차 대불동맹전쟁 동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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