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도 신학기와 환절기가 겹친 3·4·5월은 소아과가 붐빈다. 올해는 차원이 다르다. 마스크 착용이 전면 해제되고 지난 3년간 코로나19 유행으로 주춤했던어린이집과 유치원의 단체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감기 바이러스 7~8종이 일시에유행하고 있다. RSV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을 즈음이면 보카 바이러스에 보카 치료를 끝내면 아데노바이러스에 다시 걸리는 식이다. 3월부터 두 달째 약을달고 사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치료 시기를 놓쳐 폐렴으로 악화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생긴다. - P13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을 문제까? 이 ‘특수 시즌‘이 지나면 지금 당장 목도하는 극단적 형태의 소아과대란은 약간 풀리겠지만 소아과 의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은 앞으로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몇 년째 전공의를 확보하지못한 진료 과목은 전공의 확보율을 반등시키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전공의 정원이 비었던 그 병원, 그 과에 전공의로 들어가면 1년 차 레지던트가 2~3년 차 레지던트의 일까지 모두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팔라지는 저출생 기조도 예비의사들의 소아과 선택을 주저하게 한다. - P17

숨겨진 비밀은 바로, 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핵협의그룹에 있다. 정부는 핵협의그룹을 강화된 확장억제의 알맹이로꼽고, 심지어 제2의 한·미 방위조약이라고까지 칭한다. 정작 차관보급 회의체에불과한데도 말이다. 그래서 빛 좋은 개살구같지만, 한·미 핵협의그룹은 한·미·일3자 핵협의그룹으로 변신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게 숨겨진 비밀이다. 나아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포함한 아시아 핵협의그룹으로 확대해갈 것이다. - P27

정부 관계자들은 국제정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전략적 모호성‘이 아닌 ‘전략적 명확성‘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러시아와 각을 세우더라도 한·미·일 삼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미·일 핵협의그룹이 만들어지면 동북아시아에서 이 전략적 명확성이 가시화되는 조치가 될 것이다. 유엔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중국·러시아 2개 나라가 한국에 대한 위협을 전략적으로 명확하게 하는 시기가 눈앞에 닥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무역, 한반도비핵화와 평화 체제, 그리고 미래의 한반도 통일 등 우리의 국가이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나라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 P28

그런데 AI가 개를 포함한 온갖 동식물과 물건과 풍경과 개념의 이미지를 텍스트에 연결 지어 ‘복원 (생성) ‘해내려면,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쌍이 필요하다. 스테이블 디퓨전은 인터넷상에서 긁어모은 50억 개가 넘는 이미지 - 텍스트쌍을 학습했다. 출처는 워드프레스 같은개인 블로그 플랫폼, 디비언트 아트 같은아트플랫폼, 게티이미지 같은 이미지 플랫폼 등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따로 동의를 구하거나 대가를 지불하는 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 P35

논란의 핵심에 ‘화풍‘이 있다. 인간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하는 데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런데 국내외적으로 화풍(그림체·스타일)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법이 보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표현‘이다.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장려하는 취지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화풍이고, 어디부터가 표현인가? 생성 AI의 등장으로 누구나 짧은시간에 특정 아티스트 스타일의 작품을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누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해당 예술가에게 작품을의뢰할까?  - P38

생성 AI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공들이는 걸 포착해주는 독자들이 있길 바란다. 번역가로서 엄밀한 표현을 쓰려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시간을 들인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보면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문장들, 특히정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는 말들이 난무한다. 거기에 대해서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다. 당연하다고 여기고 넘어간다. 말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자체가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면, 특히 기자들이 끝까지 질문했으면 좋겠다. 말의 의미에 대해서. - P41

반면 정부는 피해자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돕는 데에는 선을 긋는다. 주거까지는 정부가 지원하겠지만, 재산 손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전세 사기도 단지 사기의 일종일 뿐이란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 P44

대통령의 연설은 눈앞의 청중을 기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질문을 한 단계 더 들어가보자. ‘그런데 한국 대통령은 왜 미국 의회에서 연설했나?‘ 청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만족한 상대를 대상으로 우리 몫을 얻어와야 한다. 그 지점에서 윤 대통령의 미국 의회 연설을 따져봐야한다. 외교에는 국적이 있기 때문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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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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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을 포함한 서방의 언론이 개전 이후에 내보낸 뉴스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경향을 발견했다. 이것을 미디어와 사실 fact의 관계 변화라고 해도 좋겠다. 진실 truth은 어떤 도덕적 함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사실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다. 포스트트루스 post-truth의 진행 단계가 고속화/고도화되면서 이제 미디어는 사실이나 진실에 특화된 사회적 체계와 기능에서 이탈했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권부 mediocracy가 되어 사실과 진실을 선별하고, 기사를 권력자원화한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201

이해영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는 언론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기에 ‘달의 뒷면‘과도 같이 낯설게 느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에서 지적한 언론에 의해 은폐된 진실은 개별 전투(combat)에서 전쟁(warfare)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쟁의 전반을 망라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국외적 배경과 국내적 배경 설명에 지면의 상당부문을 할애한다. 우선 국외적 요인으로 단극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기획이 지적된다. 이미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우방이었던 서독과 일본의 경제적 부상을 저지시킨 경험이 있는 미국은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정치적 경쟁자가 될 우려가 있는 소련을 해체시켰고, 나토(NATO)의 동진을 통해 러시아를 압박시켜왔다.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 ~ )와 제프리 삭스(Jeffrey David Sachs, 1954 ~ )는 정확히 이 지점을 지적하며 미국 역할론을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네이콘이 추진한 30년 프로젝트의 정점이다. 바이든은 네오콘을 몰고 거대한 파국으로 질주하고 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와 미국, 그리고 EU는 또 하나의 지정학적 파탄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 만일 유럽에 약간의 통찰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들은 미국의 외교정책 판탄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것이라고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컬림비아대학 교수는 말한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38

‘브레진스키 함정‘의 요체는 이렇다. 적을 원하지 않는 전쟁으로 유도해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고 전력을 약화시킨 뒤 최종적으로 압박해 무너뜨린다. 그렇게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베트남‘이 되었고, 소련은 자국의 생산력으로 더 이상 냉전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붕괴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우크라이나가 지목되었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67

국외적 요인이 미국 네오콘의 프로젝트라면, 우크라이나-러시아 문제는 아조프(Azov)로 대표되는 극우집단 문제다. 일찍이 1940년대 볼린 Volyn 지역에서 대학살을 주도한 세력을 기원으로 하는 극우 파시스트 문제는 전쟁 이전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 계 주민을 향한 폭력을 행사하며 악명을 떨쳤다. 언론에 의해 거의 보도되지 않는 이러한 사실을 펼쳐놓고 종합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본다면 선악(善惡)을 판단하는 문제는 이해 당사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우크라이나전 개전 이후 미영 등 서방 언론에서는 거의 삭제된 부분이 우크라이나의 극우 파시스트 문제이다. 우크라이나는 적어도 전전까지 전 세계에서 네오나치가 무장력을 갖춘 유일한 나라였다. 그리고 무장한 나치가 거리의 정치뿐 아니라 의회와 언론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 세계 네오나치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2014년 이른바 유로마이단은 네오나치의 공간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이 있었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96

아조프는 군사운동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점을 기억하라. 아조프는 압도적 다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아르코프 지역의 ‘우크라이나 애국자‘에서 넘어온 극우 세력이 모체이다. 그런데 아조프 민족주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달리 우크라이나 언어, 인종, 혹은 종교 이슈에 집중하지 않는다. 아조프는 ‘민족‘을 이탈리아 파시즘의 정신을 이어받은 국가주의로 인식한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104

그런데 이런 판단을 전쟁과는 전혀 무관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편향된 정보와 낡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내린다면 섣부른 결정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점이고, 때문에 정부의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에 대해 무겁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NATO의 동진(東進)으로 러시아의 시각을 아시아로 돌린다면, 결국 다음 대립은 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시아-일본의 갈등이 될 것은 너무도 명확한 상황에서 한미일 동맹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중심으로 인도까지 포함한 인도-태평양 동맹으로 중국을 포위하려는 미국의 의도는 노골적이다. 빠른 한미일 동맹을 위해 오염된 미군 기지 위에 살짝 흙을 덮듯 서둘러 과거사 문제와 독도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를 통으로 양보하는 윤석열 정부의 연이은 외교 참사.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보여준 통찰이 현재 우리의 정세 분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지금의 모습이 과거의 반복이라면, 책을 통해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 뿐 아니라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도 보다 깊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 의 <한국전쟁의 기원>리뷰에서 보다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11월까지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M777 견인포 142문과 155밀리미터 포탄 92만 4000발을 제공했다. 미국 정부는 155밀리미터 견인포를 감산하려 했지만 최근에 긴급 예산을 편성하여 물량 확보에 나섰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포병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장사정포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의 포탄 재고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지만, 그럼에도 포탄 생산력을 늘려려면 1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미국은 한국에 포탄 공급을 요청했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182

우크라이나전쟁은 타이완의 향배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둘러싼 서아시아에서의 갈등 역식 마찬가지다. 역으로 타이완 문제는 우크라이나 문제와 맞물려 중러 관계의 지속성을 강화하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모든 요인이 한편으로 미국 단극 체제의 동요를 수반하고 다른 한편으로 신냉전을 강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것이 군사적으로 한층 고조되어 3차 세계대전이 될 가능성 또한 실재한다. _ 이해영,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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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3-05-13 14: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페이스북을 통해 많이 교류하고 있는데, 제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물론 저는 2020년부터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을 비판해왔고, 다른 사람들이 반데라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부터 이에 대해 글은 쓴 적이 있습니다. 요즘같은 시대에 읽어야할 책이 이해영 교수님의 책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고로 <한국전쟁의 기원> 완역판은 이미 후원했습니다. 이것도 완독할 생각입니다.

겨울호랑이 2023-05-13 17:0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저 또한 언론이 다루지 않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에서처럼 종합적으로 정리된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어느 일방이 아닌 여러 각도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시야가 요즘처럼 혼란한 시기에 더욱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NamGiKim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23-05-13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3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변화하는 세계 질서
레이 달리오 지음, 송이루.조용빈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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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혁명/전쟁 같은 고난이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에게는 잘 헤쳐나갈 능력이 있으며, 이를 극복해서 보다 높은 수준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모든 비참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인류의 적응력과 창조력을 믿고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미래에 당신과 나, 그리고 세계 질서는 커다란 도전과 변화에 직면하겠지만 인류는 보다 영리해지고 강인해져 어려운 시간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의 번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_ 레이 달리오. <변화하는 세계 질서>, p60/760

레이 달리오 (Ray Dalio, 1949 ~ )의 <변화하는 세계 질서 The Changing World Order>의 내용을 거칠게 그리고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자본주의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기대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본주의 탄생 이후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한 네덜란드, 영국, 미국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과 함께 각 시기별로 적절한 투자 기회를 포착하는 관점 등을 제시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장점은 전업 투자자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사를 조망한다는 점과 이로부터 독자들은 투자자의 관점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나는 전 세계의 모든 경제 체제를 다 겪어 보았고 그 결과 돈을 벌어 저축하고 이를 자본시장에 투입하는 것(즉 자본주의)이야말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동기이며, 자원을 배분하는 수단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불공정한 빈부의 격차와 기회의 박탈을 유발하여 여러 가지 역효과를 낳고, 불경기와 호경기가 반복되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오늘날 각국의 정책입안자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등과 안정을 해치지 않고 자본주의에 기반한 경제 체제를 구현해서 생산성과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_ 레이 달리오. <변화하는 세계 질서>, p139/760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내용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전체적인 본문의 틀은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1930 ~ 2019)의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의 틀을 따르고, 저자만의 데이터 분석이 주를 이룬다. 세계체제 내에서 자본주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와 같은 주제라 할 수 있지만, 도출되는 결론은 사뭇 다르다.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지적한 자본주의의 본성 - 독점 monopoly - 문제에 대해 달리오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대자본가의 입장에서 적절한 투자 기회를 강조하며 이러한 기회와 혁신을 통해 지난 500년의 발전이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저자의 관점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과연, 어제까지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을 보장해줄 수있을까. 기후위기, 인간소외 등의 현대사회와 자본주의 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시점에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당연하면서도 역설적이지만 명나라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는 이 압도적인 부와 권력이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명나라의 황제는 해외 원정을 중지하고 문호를 닫아버린 후 쾌락에 빠져 관료와 환관에게 정사를 맡겨버렸다. 결국 내부 권력투쟁과 부패가 만연해 국가 기반이 취약해지고 군사력도 약해졌다. 실용적인 학문 연구와 혁신은 제쳐둔 채 탁상공론에 몰두했다. 이런 이유로 유럽과 비교해서 중국의 쇠퇴가 가속화된다. _ 레이 달리오. <변화하는 세계 질서>, p335/760

저자는 이와 함께 유럽의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다른 세계 국가들이 주변부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다분히 유럽 중심적으로 간단하게 해석한다. 저자는 명(明)나라의 쇠망을 쇄국정책과 내부부패 문제로 돌리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명나라 멸망 전후의 동북아시아 상황 - 만주족의 등장, 임진왜란, 왜구 문제 등 - 에 대한 고려 없이 혁신과 진취적인 정신이 없이 향락에 빠져 나라가 망했다는 분석은 저자의 분석이 과연 얼마만큼 정밀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한다. 또한, 남아메리카의 아스텍 제국과 마야 제국의 멸망에는 유럽의 침략 이전에 이들 제국과 주변 부족간의 대립, 천연두 등 전염병의 유행 등 복합적 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자가 ‘혁신- 비혁신‘ 이라는 단순화된 기준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책을 읽으며 드는 불편함으로 이어진다.

멕시코에 있던 아스테카제국(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은 당시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인구가 많았다)과 남미에 있던 잉카제국이 가장 컸다. 그러나 곧 유럽의 침략이 시작되어 두 제국이 멸망한 후 새로운 식민지가 탄생하고 276년 후에 미국 건국의 씨앗이 뿌려졌다. _ 레이 달리오. <변화하는 세계 질서>, p336/760

이러한 이유로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서술된 세계사관련 내용에 대해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인 단순한 기준으로 바라본 세계사. 이러한 관점의 한계는 저자 자신이 바로 성공한 투자가 때문일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투자적격성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는 자본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사 그리고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 이것이 <변화하는 세계 질서>가 담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만약 독자들이 <변화하는 세계 질서>를 통해 역사적인 통찰을 얻으려 한다면 많은 한계가 있지만. 대신, 자본가, 투자자의 시각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일정 부분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기진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경화로 이자를 지불할 수 없게 될 때까지 부채와 채권자산이 점점 커진다는 면에서 화폐/신용/자본시장의 사이클도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항상 그랬듯이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채권자산을 팔고 다른 자산을 구매하려 하지만, 통화량과 자산 가치 대비 이미 너무 많은 채권자산이 시장에 풀려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상황이 되어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가 발생하면 통화 공급 주체는 더욱 많은 돈을 찍어낸다. 이 사이클은 수천 년간 본질적으로 같았다. 국내 질서와 혼란, 국제 질서와 혼란의 사이클도 마찬가지다. _ 레이 달리오. <변화하는 세계 질서>, p4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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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납치 피해자들을 다루는 최면술사와 심리 치료사 들은 환각과 지각 기능 장애에 관해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외계인 납치 이야기는 믿으면서도, 신, 악령, 성인, 천사, 요정과의 만남은 거부하는 것일까? 확신의 정도는 UFO 목격자들에게 지지 않을 텐데, 왜 믿어 주지 않는 것일까?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을 듣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깊은 감명을 준다고 해서 진실이라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외계인 납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분명한 물적 증거가 법정에 제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장이 가진 감정적인 호소력은 분명하다. 인간이라는 포유동물은 본능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악마 숭배의 의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만큼,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올리려고 한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않고 물질로 되어 있지도 않고 날아다니며 뜨겁지도 않은 불을 뿜는 용이 있다는 것과 용이 아예 없다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의 주장을 논파할 방법도 없고 나의 주장을 반증할 만한 실험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용이 존재한다는 내 주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내 가설을 무효화할 수 없다고 해서 내 가설을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두 주장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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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효용가치설로 대체함으로써, 코브던은 보호무역주의자들의 강력한 주장들 중 하나에 대응할 수 있었다. 즉, 더 값싼 식량은 고용주가 더 낮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게 해줄 텐데, 이는 노동자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고 사회 불안을 부추길 것이라는 주장 말이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었다. 코브던의 설명에 따르면,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은 리카도가 생각한 것처럼 노동자를 먹여 살리는 비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그의 임금 수준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식량의 가격은 임금 수준과 관련이 없었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나쁜 정부를 덕 없음이나 사회 세력의 불균형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의 사상가들은 나쁜 정부를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신의 처벌로 다루었다. 계몽주의의 정치적 합리주의자와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은 잘못된 정치를 교정 가능한 무지와 피할 수 있는 오류의 결과로 여기게 했다. 스펜서는 나쁜 것들에 대해 늘 그랬듯이 나쁜 정부를 일종의 부적응으로 취급했다. "모든 악한 것은 사태에 대한 체질적 부적응에 기인한다."

사람들은 이상적이지 않았고, 정치는 바로 그러한 이들과 함께해야 했다. 동시에 기조는 왕의 절대 권리라는 원리에 목매는 정통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최고 권력의 행사라는 바로 그 주권 개념은 기조가 생각하기엔 폐기되어야 했다. 정치에서 유일한 주권은 법과 정의와 이성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주 중대한 결과로 이어졌다. 모든 권력 행사가 공유되어야 했다. 정부가 선거를 통해 교체될 수 있어야 했다. 언론이 제한받지 않아야 했고, 정치적 모임들이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했다.

갈등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권력 문제에 이어,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경쟁자들과 대조되는 두 번째 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갈등은 늘 존재하는 것이었다. 갈등은 중단되지도 근절되지도 않았다. 이해관계나 신념이나 삶의 방식에서 갈등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갈등은 길들여지고, 경쟁에 들어가고, 거래·실험·논쟁에서 유효하게 쓰여야 했다. 자유주의자들이 갈등을 건강하고 생산적인 것으로서 환영했는지, 아니면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으로서 우려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과도한 일일 수 있다. 둘 다 맞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갈등은 삶의 기정사실이었다. 정치는 어떻게 갈등이 유익한 결말로 이어져 사회가 해체되지 않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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