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지음, 이종인 옮김 / 북길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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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체제든 기타 체제든 분명 붕괴한다. 혹은 경제적, 사회적 진화 과정이 그것을 탈피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불사조가 그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혼란이 있을 수도 있고, 만약 사회주의를 가리켜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비非혼란적 대안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93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한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슘페터 자신은 마르크스와 다르다고 본문에서 강변한다. 슘페터가 바라보는 마르크스는 사회과학자가 아닌 '역사의 진화를 믿는 예언자'이며, 역사는 진보(進步)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으로 붕괴한다'는 교리(敎理)를 만든 종교인이다.


 마르크스가 볼 때 진화는 사회주의의 부모였다. 그는 사회적 구도의 내재적 논리를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혁명이 진화 과정의 어떤 부분을 대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혁명(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도입되었고, 완전히 다른 전제 조건들 아래에서 발행했다. 따라서 마르크스 혁명은 그 성격이나 기능에 있어서 부르주아 과격파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음모꾼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벌어지는 혁명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95

 

 슘페터는 본문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의 동태성과 역동성을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그 이전까지 자본주의의 모순 - 잉여가치와 착취라는 -이 점차 쌓이면서 드러나는 역사의 법칙에 따른필연적인 결과로 보는 반면, 슘페터는 필연적 법칙을 거부한다. 대신,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에 의한 창조적 파괴로 인한 동태적 변화를 강조한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동태적 변화의 우연한 결과물이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는 정태적이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 경제는 꾸준한 방식으로 내내 확대되어 나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기업에 의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변혁을 이루어나간다. 즉 그 어느 때든 새로운 상품, 새로운 생산 방법, 새로운 상업적 기회가 기존 산업 구조로 흘러드는 것이다. 기존 구조와 사업 수행 조건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어떤 상황은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뒤집힌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 발전은 곧 동요를 의미한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59


 마치 진화(進化, evolution)라는 주제로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적 진화론과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듯, 이들의 자본주의의 붕괴는 그 원인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모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한 반면, 슘페터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너무도 성공적으로 작동해서 붕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파악해야 할 핵심 사항은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를 다룬다는 것은 곧 진화적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성질상 경제적 변화의 형태 혹은 방법이 결코 정태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엔진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근본적 충동은 새로운 소비자 물품, 새로운 생산이나 수송 방법, 새로운 시장, 기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조직 등에서 나온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25


 이 과정은 내부로부터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꾸준히 변화시키면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항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모든 자본주의적 회사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26

 

자본주의의 실패와 성공이라는 정반대의 결과가 가져온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도래.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는 중심에는 자본주의의 "독점(獨占, monopoly)"이 자리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체제가 최대한 효율을 내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return to scale)'가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독점시장이 완전경쟁시장보다 자본주의 이상에 부합하는 시장이라고 해석한다.


 내가 정립하고자 하는 이론은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실제 업적 혹은 장래 업적은 아주 훌륭하여 그 경제적 실패의 무게 때문에 붕괴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체제의 성공 때문에 그 체제를 보호해주는 사회 제도가 훼손되고, "불가피하게" 그 체제가 망해버리는 조건들이 생겨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그 체제의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00


 대규모 단위의 시대에서 자본주의 생산 엔진의 실제적 효율성은 그 전 시대인 중소기업 시대의 효율성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은 통계적 기록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다. 통제단위(회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그와 함께 기업 전략이 대규모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고, 상당 정도까지 그 통계 기록에 반영된 성과의 사전 조건들이었다. 그 회사들이 완전 경쟁에 노출되었더라면 새로운 기술적/조직적 가능성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와 유사한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269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만들어진 독점기업의 거대한 힘은 시장을 통합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 힘은 자신을 독점기업으로 만든 사회적 기반마저 파괴시키며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지의 기득권마저 무너뜨리고, 창조적 기업가 정신마저 절멸시키면서 전체주의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한다.


 만약 자본주의 진화(발전)가 중지되거나 완전 자동화된다면, 산업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기반은 현행 관리자에게 지불되는 임금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 정신은 그 성취로 인해 발전을 자동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기업 정신은 그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의 성공이 가져오는 압력으로 인해 스스로 산산 조각나버린다. 완전 관료화된 거대 산업 재벌은 중소기업들을 몰아내고 그 소유주들을 "수탈"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기업가들을 추방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수탈한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93


 농업 부문을 제외하고 비즈니스는 소수의 관료화한 대기업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발전은 느려질 것이고 점점 기계화되고 계획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자율은 제로를 향해 수렴할 것인데, 그것은 정부 정책의 압력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투자 기회의 소멸 때문에 항구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산업 재산권과 관리는 탈脫개성화할 것이다. 소유권은 주식이나 채권의 보유권으로 변질될 것이고, 경영자는 공무원 비슷한 심리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동기와 기준들은 모두 시들해질 것이다. 시기가 성숙하여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이런 추론은 너무나 명백하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312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하다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슘페터의 전망은 '그렇다'. 집단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라는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은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부분에 있어서 데모스(demos)들은 모나드(monad)가 되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버리고 만다. 이러한 문제점은 대의제(代議制)에 명분을 주게되면서, 이와 함께 관료제(官僚制, bureaucracy)의 중요성도 함께 부각된다. 


 내가 볼 때 문제의 핵심은 개인적 관심사와 직접적 연결고리가 없는 전국적/국제적 영역의 문제들에서는 현실감각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중대한 정치 문제들은 일반 시민의 머릿속에서 한가한 시간의 실없는 화제이거나 무책임한 잡담의 화제일 뿐이다. 그런 정치적 문제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감소된 현실 감각은 감소된 책임 의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효과적인 의지의 부재를 의미한다.... 감소된 책임 의식과 효과적 의지의 부재는 차례로 보통 시민의 국내외 정책에 대한 무지와 판단력 결핍을 설명해준다. 이처럼 보통 시민이 정치 분야에 발을 디디면 지적 수준의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져버린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370


 선거에 따라 바뀌는 집권세력을 보완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전문가 집단에 의한 체제 유지는 대의민주주의에 있어 필수적인 것인데, 이는 중앙집권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경제적으로 기업 독점 상태는 국가 독점 상태로, 정치적으로  대의민주주의는 중앙권력에 의한 지배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될 것이라는 것이 슘페터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펼친 미래 전망이다.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대 산업 국가들의 민주정부는 공공 행위의 모든 영역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공공 행위는 잘 훈련된 관료제의 서비스를 포함한다. 이 관료제는 좋은 전통과 명성을 갖고 있고, 투철한 사명감과 그에 못지 않은 단체정신 esprit de corps을 갖고 있어야 한다(p409)... 관료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국가가 어떤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든 그것은 어디에서나 자라난다. 관료제의 확대는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는 현상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411


 이처럼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하지만, 이러한 전망만으로 그를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완벽한 승리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본문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슘페터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지나친 팽창을 경고한 수정자본주의자라고 해야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방법론보다 다소 온건적인 페이비언 주의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다음 문장을 통해 우리는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붕괴가 아닌 개혁에 의한 자본주의 존속을 바라는 슘페터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계급 투쟁이든 혁명이든 페이비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정반대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페이비언이 마르크스보다 더 나은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현실 정치 내에 있는 문제들만 집중하고, 사회적 여건들의 진화에 발맞추어 움직이고, 그렇게 하여 궁극적 목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근본 교리에 더 일치하는 것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458

역사적 해석이라는 마르크스의 도식 속에서 발생하는 많은 다른 난점들은 생산의 영역과 사회생활의 다른 영역들 사이에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인정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을 둘러싼 근본적 진리의 빛은, 그 이론이 주장하는 단호하면서도 단순한 일방적 관계에서 나온다. - P34

진정한 비극은 실업 그 자체가 per se 아니다. 실업이 발생했는데도 추가 경제 발전의 조건들을 훼손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업자들에게 적절한 지원 수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비극이다. - P110

지금까지 해온 이론적 문제의 해결안을 살펴보면 독자는 중앙청 제도가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할 것이다... 현대의 조건 아래에서, 사회주의 경제는 거대한 관료제의 존재나 그 경제의 탄생, 혹은 작동에 우호적인 사회적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P264

생산 문제의 확정적 해결은 주어진 데이터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거나 최적의 것이다. 확정적 해결로 가는 길을 단축시켜주거나 부드럽게 해주거나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은 뭐든지 인간의 에너지와 물질 자원을 절약해주고, 또 소정의 결과에 도달하는 비용을 줄여준다. 이렇게 하여 절약된 자원이 완전히 낭비되지 않는 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식) 효율성은 필연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 P276

역사적으로 볼 때,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일어났고 그 사상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다. 민주적 실천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경쟁적 리더십을 획득하기 위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적 변화를 추구했고, 그 덕분에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출세를 도와준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재편했으며, 또 그들의 관점에서 그런 구조를 합리화했다. 민주적 방법은 그런 재편을 돕는 정치적 도구였다.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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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26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종인 번역이네요...개인적으로 이종인 번역 별로인데...슘페트의 난삽한 문장을 번역한 걸 보니 좀 거시기 합니다. ‘중앙청 제도‘라니...ㅎㅎ 그가 전공자가 아니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문장...경제전공자에게 검수라도 받을 것이지...하~

그나마 인용해 주신 번역은 그런대로 읽을만하게 번역했네요. 처음 삼성출판사에서 이상구 번역으로 최초 한국어판이 됐죠. 그거 읽다가 열받아서 원서를 봤는데....이게 진짜 문장들이 헬이더라구요~ 한 문장이 두 페이지를 채우지를 않나...여튼 문장이 매우 깁니다. 평균 4-5줄인데, 문장이 난삽하고 어려워서 이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의 고뇌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더라도 삼성출판사본은 읽을 수 없습니다. 한길사 본도 여전히 독해를 방해하는 문장들이 널려 있었는데, 북길드판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인용된 문장들만 보면 번역은 그나마 가장 나은 듯합니다~

어쨌건 호랑이님 때문에 북길드판도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책이 읽을만하면 이 책을 소장하고 나머지판본들은 모두 처분해야 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6 18:36   좋아요 0 | URL
저는 한길사 판과 북길드 판만 읽었는데, yamoo님께서는 원서를 비롯해서 이미 여러 판본으로 읽으셨군요. 덕분에 저 또한 슘페터의 원문의 난해함과 다른 출판사 번역본에 대한 비교를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
 

1965년, 청구권 문제는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 협정(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양국 정부가 합의했다. 게다가, 청구권 자금은 한번에 현금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10분의 1 정도의 경제적 가치를 10년에 걸쳐서 일본의 물품이나 역무로 제공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구체적으로 무상 3억 달러는 3천만 달러씩 10년에 걸쳐 공여하고, 유상 2억 달러의 경우 2천만 달러씩 10년 동안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의 해결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의미에서의 ‘촉매catalyst’에 지나지 않았고,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을 표면에 나서서 중재, 조정하는 의미에서의 중개자mediator, middleman가 되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한일 양국의 국내에서 미국의 개입이 편향되어있다는 인상을 남겨, 반미감정을 분출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은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을 실질화하기 위해 ‘식민지지배 잔재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다만, 적어도 출발점에서는 그러한 식민지배의 유제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식민지지배의 유제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청산하는 일이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지배 청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에 따라 반공 진영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일본을 철저하게 ‘비군사화’시키겠다는 애초의 방침을 포기했다. 일본의 보수 정권도 그에 호응하여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여 그것을 후에 보안대, 자위대로 개조시킴으로써 사실상의 ‘재군비’로 키를 돌렸다.

한일회담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식민지지배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왕래한 경제적 가치에 관한 것으로 특히, 일본 정부나 개인이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이전한 경제적 가치의 내역과 그 총액을 금전적으로 평가한 후, 원상 복귀를 위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처리가 연합국에 의해 대일 배상 포기라는 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대일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했다. 더욱이, 식민지지배가 식민지에 손해를 입힌 것이며, 그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국제사회에 정착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와 관련하여 또 하나 한일 간의 쟁점이 된 것이 1910년의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법적 성격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로서 ‘병합’이 진행된 만큼 법적으로도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 한국병합조약 및 그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협정체결이 일본의 강제로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병합’은 위법한 것이고, 따라서 지배 자체도 위법 상태가 계속되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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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J. 토마스 쿡 지음, 김익현 옮김 / 서광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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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카>는 어떤 삶이 인간 존재에게 최선의 삶인가 그리고 어떻게 개인은 그런 삶을 방해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설명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70 


 J. 토마스 쿡 (J. Thomas Cook)의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Spinoza's 'Ethics': A Reader's Guide>은 기하학적 구조로 정리-증명-주석이라는 기하학적 구조로 건축된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5)의 <에티카 Ethica>를 보다 평면적으로 보여주는 입문서다. 신(神), 정신, 정서, 지성, 이성으로 이어지는 논의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앞서 말한 기하학적인 논증 구조 안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용어를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증명을 통해 앞선 정리로부터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구조는 강력하지만, 간결한 도형 대신 명제로 구성된 <에티카>는 그만큼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은 구조에 대한 좋은 도면을 보여주며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 이번 리뷰에서는 다소 거칠지만 <에티카>의 구조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세계는 결과가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질서 있게 따라 나오는 그리고 결과가 그것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그 원인 또한 그것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계속된다... 만약 스피노자의 실재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기하학과 같은 전적으로 합리적인 명료성을 가지려 한다면, 체계를 위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선행하는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 스피노자가 이러한 출발점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낱말이 '실체'(substance)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45


 <에티카>의 제1부에서 다루는 대상은 실체(實體), 신(神)이다. 결과를 가져오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 자기 원인(causa sui)을 스피노자는 실체라고 이름짓는다. 세계는 신의 활동 역량에 의해 생겨나며 이를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생산된 자연(natura naturata) 의 관계로 표현된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因果)관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의 법칙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의 구조에 따라 필연의 세계를 보여준다. 


 신의 역량은 구조화된 역량이고, 사물들은 이 구조화된 역량에 의해 생겨나게 되며 이 역량으로부터 질서 있게 따라 나온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연장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연장된 사물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관념 혹은 사유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동일한 구조적 역량이 양태의 두 계열 -연장과 사유 - 모두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88


 신(자연)의 세계는 이처럼 완전한 세계지만, 인간의 세계는 이와 같지 않다. 인간 또한 실체이고 인간 자체로 완전하지만, 신의 부분인만큼 부분적으로 완전하다. 신의 속성에 대해 부족한 만큼 인간은 무지와 오류를 갖고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상상지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는 신체나 뇌의 변용을 통해 어떤 것의 현존을 지각적으로 기록하는 과정 전체를 '상상지'(imaginatio)라고 부른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상적 관념이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물체의 본성 못지않게 적어도 우리 자신의 신체의 본성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오류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p110)... 제2부 정리18에서 약술된 상상지(imainatio)론은 인간 인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일 뿐만 아니라 허위, 인간의 무지와 오류에 대한 설명의 기초이기도 하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15


 인간은 고유의 특성인 상상지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그는 사물들의 보편적 특성인 '코나투스'라는 자기보존 특성도 함께 갖는다. 자기보존을 하려는 '욕망' 그리고 긍정적 정서인 '기쁨'과 부정적 정서인 '슬픔'이라는 세 기본 정서는 다른 관념 및 정서들과 결합하여 수많은 감정을 끊임없이 창출해간다.  


 제3부에서도 중심이 되는 정리는 제3부 정리6으로, 거기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의 원리를 소개하고 그 원리가 모든 사물들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코나투스의 원리는 <에티카>의 나머지 부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스포노자의 주장은 각각의 것(unaquaeque res)이 자신의 존재 보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53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물리적 유기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코나투스적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질적 노력이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62


  부분적인 실체인 인간이 구조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상지'의 한계 안에서, 자기보존의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통해 더 많은 덕(virtus), 탁월함(arete)을 가지려는 노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은 최고선(崔高善)과 신에 대한 인식을 지향하며,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성에 의해 느끼는 정신이, 이성에 의해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하면서 최종적으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자신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피노자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능동적인 한 우리는 자유롭지만, 반면에 수동적인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예속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것이 스피노자 논증의 핵심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73


  <에티카>는 분명 기하학적인 구조로 구성된 건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이 조금은 위태롭게 보인다면 이는 건축물을 스피노자 시대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 현대의 기반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필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실체의 세계와 우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부분적 실체의 세계를 같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욕망이라는 변수로 인해 생겨나는 곡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적 구조로 설명했다면, <에티카>가 보다 설명력있는 기하-윤리학책이 되었겠지만, 자기원인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개체는 존재 보존을 위해 노력하며(제3부 정리6) 그렇게 함에 있어서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고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제4부 정리19 증명). 이러한 노력이 바로 개인의 코나투스적 본질 혹은 본성이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수록, 그 사람은 더 많은 역량을 표출한다. 스피노자는 개인의 역량을 그의 덕과 동일시하며(제4부 정의8) 개인이 존재 보전 노력에 있어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는 덕을 더 많이 갖게 된다고(제4부 정리20) 결론내린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84

연장된 개별 사물이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 ‘안에‘ 있으며 그것을 ‘통해 파악되는‘ 것처럼, 개별 관념과 정신 상태도 사유(thought)라는 일반적 범주 ‘안에‘ 있으며 그것을 ‘통해 파악될‘ 수밖에 없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p52)... 무한하고 실존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실체가 단 하나의 속성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증하고 나서, 무한한 실체는 무한히 많은 수의 속성(attribute)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각 속성 자체가 무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피노자는 추론한다. 정리 11에서 그는 이 모든 주장을 함께 제시하면서 처음으로 ‘신‘이라는 낱말을 끌어 들인다. - P53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무한하고 영원한 양태를 이해하고자 할 경우, 양태가 신/실체의 역량이 활동으로서 표현되는 방법 내지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경우 연장의 무한하고 영원한 양태는 신의 역량이 무한히 연장된 영역 전반에 걸쳐 표현된 무시간적 방식이다. - P68

능동적인 것을 수동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하거나 생산된 것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을 구분한 후에 스피노자는 정리31에서, 특정한 사유와 의지는 사유라는 속성의 양태들이며 사물의 ‘생산된 측면‘ - 생산된 자연 natura naturanta -에 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와 의지는 그것들을 생산한 활동적 역량에 의해 지금 상태로 존재하도록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P75

스피노자는 제3부 정리9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 그것은 의지라 불리지만,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계될 때, 그것은 욕구라 불린다. 그러므로 욕구는 바로 인간의 본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물리적 유기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코나투스적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질적 노력이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 P162

만약 우리가 역량 내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충분히 마음에 새겨 두고 있다면, 우리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데서 오는 좌절의 고통을 겪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한 노력을 통해, 욕구와 욕망을 제한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견해로는 우리 역량 내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적합한 관념은 그 자체가 우리 역량을 넘어서는 것을 우리가 소유하고 완성시킨다는 생각에 대한 부정을 포함하며, 따라서 후자를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으로서 그리고 욕망의 상상적 대상으로서 약화시킬 것이다.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인 것만을 욕망할 수 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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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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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p154)...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55/232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1909~1948)의 <인간실격 人間失格>에서 주인공 요조가 돌아본 자신의 인생이다. 그는 신에게 묻는다. 공포에 대한 무저항이 자신이 저지른 죄(罪)이며 불행의 근원인가를. 요조는 어떤 공포를 느꼈던가. 다른 이들과 자신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이를 피하기 위해 요조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닌 '주변에서 원하는 나'가 되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사람받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으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한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p18)...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20/232


 겉으로는 웃음과 미소짓고 있지만, 가면 속 자신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겉과 다른 자신 안의 괴물을 발견했기에, 그는 그는 괴물을 닮은 자화상을 보며 진(眞)정한 아름다움(美)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추(醜)의 미학을.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46/232


 세상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요조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는 죽지 않는다. 그는 대신 죽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이란 결국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닐까 하는. 요조는 사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사회는 신뢰할만한 곳이라고 회심(metanoia)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새롭게 태어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요조의 사회는 아버지와 같은 무서운 곳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다시 사회 계약론의 사회로 옮겨간다. 이처럼 요조의 사회는 죽음을 통해 달라졌다.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78/232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15/232


  요조의 변화는 호리키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죄(罪)의 반의어를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법(法)과 선(善)에서 찾는 호리키와 그렇지 않은 요조. 호리키에게 법과 도덕은 다르지만, 요조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법과 선악(善惡)은 분리된 개념과 현실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인식은 곧 깨지고 만다.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뭔데? 신이야?"

 "설마.......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선량한 시민. 즉 나 같은 것이지."

 "농담은 그만두자고. 그러나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 거지."

"말이 많군. 그렇다면 역시 신이겠지. 신, 신. 뭐든지 신으로 해두면 틀림없어."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2/232


 엄청난 불행이 닥쳤을 때, 그는 사회에 대한 신뢰가 처절하게 깨져 나가면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리바이어던이 다시 뛰쳐나왔음을 실감한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깨졌을 때 그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 선량한 상대에 대한 믿음의 대가가 과연 공포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그때 저를 엄습한 감정은 노여움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그것은 묘지의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사(神社)의 삼나무에서 흰 옷을 입은 신령과 부딪쳤을 때 느낄지도 모를,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만드는 고대의 거칠고 난폭한 공포였습니다. 저의 새치는 그날 밤부터 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인간을 한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7/232


 그렇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요조는 선과 악, 죄에 대한 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자신의 불행이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면 그에 대한 신의 해명을 요조는 기다리지만, 신의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기되는 심판 속에서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제 그는 '익살'이라는 끈으로 사회에 맞춰 사람 사이에(人間)사는 대신 비합법의 영역에서 사람(人)으로 머문다. 이제 그가 생각하기에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죄로 인해 그는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요조는 결국 어렸을 때부터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거절하지 못하는 무저항이 문제였을까.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59/232


 요조는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에서 선악이라는 도덕적 관념과 죄악은 구분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죄에 대한 요조의 질문과 신의 침묵, 그 사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요조는 죄인이자 악한이 되버리고 말았으며, 결국 자신 스스로 선악이라는 도덕과 죄악이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말았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p138)...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9/232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신에게 신뢰심과 무저항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먼저 요조는 자신의 불행이 죄의 결과인지에 대해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에 앞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직시(直視)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실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맞춰 변화되는 불안정 속에서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추구 -  인간이란 무엇인가 - 란 덧없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느낌이 드는 것이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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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2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인간실격>을 호랑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저하고 다른 포인트를 잡으셨네요~ 신선한 리뷰 잘 봤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3 10: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인간실격>은 뒤늦게 읽은 만큼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yamoo님 활기찬 한 주 여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