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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향하여 - 에스프리 누보 총서 1
Le Corbusier 지음, 이관석 옮김 / 동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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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그것은 시다. 감각의 감동이자 측정하고 감상하는 정신의 기쁨이며, 우리 존재의 깊은 곳을 감화시키는 축의 원리에 대한 인식이다. 예술,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창조의 최고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창조하고 있다고 느낄 때 커다란 행복을 느끼게 된다.(p220)

건축은 수정된 법칙에 직면해 있다. 건설은 너무나 큰 기술 혁신을 경험한 터여서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낡은 ‘양식들‘은 더 이상 그것을 포용할 수 없다... ‘양식‘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의 시야 바깥에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과거와 직면하게 한다면, 우리는 4000년 동안 전개되어 온 다수의 규칙 및 규정들과 함께 낡은 건축 법규는 더 이상 흥미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든 가치는 수정되어 왔다.(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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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할머니 산소가 있는 전라도 강진을 갑니다. 하루동안의 짧은 일정이지만, 산소에 들르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강진과 해남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돌아본지도 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산 유배지, 김영랑 생가, 백운동 별서정원 등을 들렀고 이번에는 병영(兵營) 성터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병영성터는 황금색 벌판과 어울어져 마치 황금성처럼 보였습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병영이 위치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군사요새임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병영과 관련한 내용을 해설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병영(兵營) 조선의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원래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년) 도강고현(道康古縣)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라도는 물론 제주의 군대를 총괄하는 본부였기에 소속 군인들과 몰려든 상인들로 제법 큰 고을을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곳에 8년 동안 억류되기도 하였다.(p247) <해설 대동여지도> 中


 전라도 육군을 총괄하는 군사기지인만큼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성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원래 성터만 남은 곳이었으나 최근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제법 모습을 갖춘 읍성(邑城)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을 연상케 하는 성의 외관입니다. 복원된 성에는 성곽 일부분을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제압하는 옹성(甕城)도,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는 해자(垓字)도 갖추어져 있어 작지만, 완벽한 요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읍성(邑城)은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가 들끓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관아가 있어 나라를 다스리던 지역에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계승된 것이다. 세종, 성종 때에 많은 읍성들을 축조하였는데, 기존의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5개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04개소의 읍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읍성의 모양은 방형과 원형이 많은데, 이는 산 위에 건축되기보다 평지나 구릉지에 축성되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부정형의 읍성도 있다. 성내에는 관아, 객사, 향청, 훈련원, 중영, 군기고 등을 두어 나랏일을 보고 평시나 비상시 성을 방비한다. 현재 전국에는 동래읍성 등 109개소의 읍성이 남아 있다.(p229) <한국건축사> 中


 역사 속에서 병영은 하멜(Hendrik Hamel, 1630 ~ 1692)과 그 일행이 머물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하멜과 일행은 1656년부터 1663년 대기근이 일어나 남원, 순천, 좌수영(여수)로 분산되기까지 약 7년간 머무르게 됩니다.


 1656년 3월 어느날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에는 태창(泰倉 큰 창고) 혹은 전라 병영(兵營)이라 불리는, 성채가 있는 어떤 큰 고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관찰사 다음으로 권위가 있는 전라도 군사령관인 절도사 節度使의 관저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제주로부터 9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해안과 가까운 곳이었다.(p55) <하멜표류기> 中


 <하멜 표류기> <조선왕국기>로 처음으로 서양에 조선을 소개한 하멜이기에, 그가 한동안 병영에 머물렀다는 사실때문에, 병영성 근처에는 하멜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영과 조선에서의 기억은 하멜에게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닌 듯 합니다.


 신임 좌수사가 7월에 부임해 왔는데 그도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일을 시키려 했다. 우리들 각각에게 매일 일백 패덤(fathom 약180m)이나 되는 새끼를 꼬라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전임자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종류의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 후임자들도 계속 똑같이 할 것이며, 일단 그런 관행이 이루어지면 쉽사리 바꾸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모색했다. 이 심술궂은 사람들 밑에서 매일 슬픔에 젖어 노예 상태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p68) <하멜표류기> 中


 그렇다면, 조선에게 하멜은 좋은 방문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이 역시도 아닌듯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하멜은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 일지를 썼으며, 조선의 풍습, 지리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의 초기 탐색 과정임을 생각한다면 조선에게도 하멜은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원전인 <하멜일지>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이며 보고서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서문)... 조선을 서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만의 안쪽과 입구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절벽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로 水路 안내인은 우리에게 서해안이 가장 접근하기 좋다고 말했다.(p141)<조선에 관한 기술> 中


 하멜과 조선과의 관계는 하멜의 말처럼 포로 - 간수의 관계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원수일지도 모를 이들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필요에 의해 친한 관계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병영성을 떠나왔습니다... 



 러나 우린 이교도의 국가에 잡혀 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고 죽지 않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p66) <하멜표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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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6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정민 선생님과 함께 한 강진 답사
에서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하멜 표류기가 사실은 하멜이 소속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인가에서 보험금
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라는 이야
기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06 09: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하멜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어 의도치 않게 조선을 소개한 역사적인 책이 되버린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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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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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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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거의 칠 주가 지났다. 나는 장례식 때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너무도 강렬한 욕망이, 그녀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고 얼빠진 듯 말문이 막혔던 그때 상태로 되돌아가기 전에 작업에 착수했다.(p9) <소망 없는 불행> 中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 )는 <소망 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u''ck>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작품에서 어머니의 일생을 그리면서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 시작은 배움의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배움의 욕망은 어머니에게 새롭게 세계를 보는 법을 알려주었고, 이로부터 어머니는 달라지게 되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했다.(p19) <소망 없는 불행> 中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어머니에게 문학을, 정치를 알려주었고 이를 통해 어머니는 '여러 명 중 한 명'이 아닌 '개인'으로 자리잡아갔지만, 이러한 어머니의 깨우침은 일반적힌 사람들의 지향과는 달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불행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나의 어머니는 이런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 끝없는 강요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p53)... 나의 어머니는 영원히 위축되고 존재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p56)... 그녀는 점차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여자>가 되어갔다.(p61) <소망 없는 불행> 中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으로 서기 보다 '무리(유형)' 안에 속하면서 안락함을 느꼈고, 무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기꺼이 자신의 개성(個性)을 포기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p36) <소망 없는 불행> 中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p45) <소망 없는 불행> 中


 그 결과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를 거부했고, 고독감을 느끼며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집단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외로운 길을 선택한 어머니. 작가는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의 죽음과 개별 사안과 이로부터 도출된 추상적 개념의 관계를 연결짓는다. 추상적인 개념은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이 과거를 추억으로 미화하듯이. 때문에,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에게도 의식화, 추상화는 거부해야할 대상이었다. 동시에, 어머니의 생애를 쓰려는 한트케에게도.


 각자 다른 구석을 볼 테니 외로움은 그만큼 더 커질 거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조금 뒤어다녀야겠다... 타인들이란 그녀를 방해하고, 기껏 잘해 봐야 약간 감동을 주는 어린애들에 불과했다.(p75) <소망 없는 불행> 中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역겹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구체적으로 체럼 가능한 모습으로 사회 통념들을 교란시켰다면 이제는 개선되고 깨끗해진 <가난한 계층>으로서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어서 예전에 비참했던 모습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궁핍에서 오는 비참함은 구체적인 말로 묘사될 수 있지만 가난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다.(p51) <소망 없는 불행> 中


 때문에, 저자 한트케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때 객관적으로 쓰려 노력했던 것은 단순한 기자정신이 아니라 유형화를 거부했던 어머니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길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망 없는 불행> 안에서 집단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와 의식화/추상화를 피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어울어져 우리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p12) <소망 없는 불행> 中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혀지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p39) <소망 없는 불행> 中


 그렇지만, 역사가가 아무리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서술한다고 했을 때, 조감도(鳥瞰圖)처럼 완전히 시대와 떨어져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망 없는 불행> 속의 작가가 객관적으로 서술한다고 수없이 강조하지만, 분노와 격정에서 나온 욕구로 쓰여진 글이 완전하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러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때로 그녀를 한참 들여다보고 난 후에는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면 나의 지리함이 극에 달해 심란해져서 시체 곁에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p80)... 나는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분노 속에서 나의 어머니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p81) <소망 없는 불행> 中


 그런 면에서 <소망 없는 불행>은 개인으로 서려고 했지만, 좌절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삶을 비통한 마음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써내려간 아들의 사모곡(思母曲)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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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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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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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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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12-0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객관적 서술은 불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 주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요.
작가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없지요.

겨울호랑이 2019-12-04 13:45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처럼 작가처럼 주관적인 주체는 없는 듯합니다. 객관적이라면 보고서가 되겠지요...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한길그레이트북스 77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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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제는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앙인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내세의 후보자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기독교인 자신의 고백과 자백에 따르면 ‘반은 동물이고 반은 천사인‘ 기독교인에서 인간으로 만들려는 과제이다.(p401)

나는 불멸성에서 비로소 신성의 의미와 목적이 발견되고 달성되며, 신성과 불멸성은 하나이고, 처음에는 독자적인 본질로서 존재하던 신성이 끝에 가서는 불멸성으로서 인간의 특성이 된다는 증명과 함께 내 과제의 목표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종교의 신이 자연이고 정신종교인 기독교의 신이 정신 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이교도처럼 인간 밖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처럼 인간을 초월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 속에서 행위의 규정근거, 사유의 목적, 해악과 고통의 치료 원천을 찾고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했다.(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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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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