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청구권 문제는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과 대한민국 간 협정(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양국 정부가 합의했다. 게다가, 청구권 자금은 한번에 현금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10분의 1 정도의 경제적 가치를 10년에 걸쳐서 일본의 물품이나 역무로 제공하는 방식이 취해졌다. 구체적으로 무상 3억 달러는 3천만 달러씩 10년에 걸쳐 공여하고, 유상 2억 달러의 경우 2천만 달러씩 10년 동안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의 해결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의미에서의 ‘촉매catalyst’에 지나지 않았고, 한일 간의 대립 쟁점을 표면에 나서서 중재, 조정하는 의미에서의 중개자mediator, middleman가 되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한일 양국의 국내에서 미국의 개입이 편향되어있다는 인상을 남겨, 반미감정을 분출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은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을 실질화하기 위해 ‘식민지지배 잔재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다만, 적어도 출발점에서는 그러한 식민지배의 유제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식민지지배의 유제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청산하는 일이 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지배 청산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었다.

한국전쟁에 따라 반공 진영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일본을 철저하게 ‘비군사화’시키겠다는 애초의 방침을 포기했다. 일본의 보수 정권도 그에 호응하여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여 그것을 후에 보안대, 자위대로 개조시킴으로써 사실상의 ‘재군비’로 키를 돌렸다.

한일회담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식민지지배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왕래한 경제적 가치에 관한 것으로 특히, 일본 정부나 개인이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이전한 경제적 가치의 내역과 그 총액을 금전적으로 평가한 후, 원상 복귀를 위한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처리가 연합국에 의해 대일 배상 포기라는 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대일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했다. 더욱이, 식민지지배가 식민지에 손해를 입힌 것이며, 그에 대해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국제사회에 정착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와 관련하여 또 하나 한일 간의 쟁점이 된 것이 1910년의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법적 성격이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로서 ‘병합’이 진행된 만큼 법적으로도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한국 정부는 이 한국병합조약 및 그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의 협정체결이 일본의 강제로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병합’은 위법한 것이고, 따라서 지배 자체도 위법 상태가 계속되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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