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4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지음,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 엮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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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나 상황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시간 개념을 농축된 형태로 구현하는 이율배반적인 존재단위이다. 시대란, 서로 다른 시간표를 갖는 여러 배열체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성좌 configuration로서, 시간의 균질적 흐름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고유한 시간을 정한다. 그러니 어느 한 시대가 시간성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 시대 앞뒤의 다른 시대들이 시간성을 경험하는 방식과 다를 수 있다. 시대 사이에는 비약이 있다는 뜻이요, 이어진 시대들 사이의 이행은 문제적이라는 뜻이요, 역사적 과정에 단절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71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Siegfried Kracauer,1889~1966)는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History: The Last Things Before The Last>에서 역사를 연대기적 시간과 고유한 시간을 갖는 이질적이면서 양 면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사이에서 과연 역사가는 개별 사태로부터 역사의 일반 법칙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역사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역사가는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역사계의 구조의 문제가 나온다. 역사계는 역사가가 서로 다른 차원들 사이를 쉽게 오갈 수 있을 만큼 균질적인 세계인가? 거시사의 실체성과 타당성, 곧 거시사의 실재성 reality character은 막힘없는 양방향 교통에 달려 있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39


 저자 크라카우어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비균질적인 구조 속에서 역사가는 지극히 한정된 정보로 자신의 주관과 이해의 깊이에 따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역사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서다. 크라카우어는 성공적인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이 융합을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예술작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허구적 아름다움. 결국 완벽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결합은 현실이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할 수 있을까.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이 교통하는 데는 극심한 제약이 따른다. '원근의 법칙'에 따라서, 증거의 일부는 자동 누락된다. '수위의 법칙'에 따라서, 누락되지 않은 증거의 일부는 손상된 상태로 목적지에 도달한다. 이것은 역사계가 비균질적 nonhomogeneous 구조임을 뜻한다. 역사계는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밀도를 가지는 여러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편으로는 불가해한 회오리에 싸여 있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44


 예술의 본질적 기능이 완수되는 때는, 예술이 역사가가 세운 목표일 때가 아니라 역사가가 이룬 결과일 때이다. 역사가가 어떤 사료를 다루느냐에 따라 미학적으로 훌륭한 언어가 요구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도 언어의 아름다움은 역사가의 이해의 깊이를 보여주는 데 그친다. 언어의 아름다움은 부산물이지 명시적 목표가 아니니 말이다. 역사가가 예술을 생산하는 때는 예술가일 때가 아니라 완벽한 역사가일 때이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94


 크라카우어에 의하면 <역사철학>에서 보여준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시대정신(Zeitgeist)은 연대기적 사건 속에서 역사의 법칙에 맞는 선택적 조합이다. 마치 회귀분석(regression analysis)에서 연속형 변수들 사이에 연구자의 주관에 맞는 모형을 구축한 뒤 실선 바깥의 수많은 표준편차들이 무시되는 것처럼 거시사의 역사법칙 위에 역사의 개별 사례들은 무시되어도 좋을 것인가. 크라카우어는 이 점에서 철저하게 개별사례에 집중할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top down식의 대륙철학보다는 bottom up 방식의 경험론철학에 가까운 셈이다. 


 역사가가 미시적 차원을 벗어나 보다 일반적 차원으로 올라갈 때, 그는 내가 '역사적 이념'이라고 명명한 지점에 도달한다. 그가 그 지점을 지나 '철학적' 이념의 차원 내지 극단적 추상화의 차원으로 올라가면, 그의 통찰의 의의는 계속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든다. 대규모 역사는 미시적 차원의 많은 사실들을 제외시킨다는 것에 주목하자. 아주 높은 추상화는 증거와의 연관성을 잃게 되며, 없었던 이념을 끼워넣게 된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147


 우리가 '상상적 구축'이라고 여기는 것들, 곧 인류의 운명에 대한 종교적 예언들, 신학적 추론들, 형이상학적 이념들이 오랜 세월동안 통사의 존재이유 raison d'etre였다. 역사의 행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바로 그런 것들에 기초한다. 모든 기본적인 여구는 '위'로부터의 접근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제국들과 민족들의 운명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접근이 '아래'로부터의 접근에 항복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였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208


 역사는 한 편으로는 구체적인 일상생활과 다른 한 편으로는 추상세계와 접한다. 이러한 접점은 알타미라 동굴(Altamira)과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에 보여지는 생생한 동물 그림과 여기에 담겨진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의 결합처럼 예술에서는 성공적으로 작동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극단이 아닌 대기실에 있는 처지의 역사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헤겔의 시대정신은 그의 <미학강의>에서는 허용될 수 있겠지만, <역사철학>에서는 유용하지 않는, 미(美)의 경계를 넘어 진(眞)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볼 때 딜타이의 이런 흔들림은 근본적인 흔들림이다. 그의 흔들림의 한쪽 극단은 헤겔의 '세계정신'이고 다른 쪽 극단은 하이데거의 '존재가능 Seinkoennen'이다. 후자는 모든 객관성을 삼켜버리고 아울러 일련의 진실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삼켜버린다. 진보의 이념은 역사 전체에 적용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의 이념이 그렇게 전면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진보의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두 측면을 갖고 있으므로 이 개념에 대한 모든 정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진보의 이념은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그런 시대들의 연속은 진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220

  

 이처럼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역사가 대상으로 삼는 시대와 역사가의 한계를 통해 미시사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이 비판되는데, 크라카우어의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과 칼 포퍼(Sir Karl Raimund Popper,1902~1994)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보여준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점의 같은 듯 살짝 다른 내용을 비교해 본다면 보다 의미있는 독서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현대 작가들과 현대 예술가들의 파괴적 의도는 종합을 노리며 '외적인 총체적 연속체'를 강조하는 내러티브에 대한 역사가들과 사상가들의 점증하는 의혹과 비슷한 데가 있다. 이런 유사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정신 Zeitgeist이란 신기루이다. 교차영향들을 상쇄하는 온갖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_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 , p200

크로체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의 시대란 그 시대 특유의 정신 spirit을 소유하고 있는 통일체라기보다는 경향들, 목표들, 활동들의 덩어리이며, 이런 경향들, 목표들, 활동들은 많은 경우 서로 무관하게 발현된다. 물론 어느 한 순간을 놓고 보면 특정한 믿음들, 목적들, 태도들 등등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고 심지어 대세가 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시대적 대세가 존재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당위"라기보다는 경험적 사실일 뿐이다. - P81

프루스트는 연대순 시간을 실체적 시간으로 회복시키지만, 그것은 사후적 a posteriori 회복일 뿐이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파편화된 삶의 이야기를 하나의 통일적 과정으로 볼 수 있으려면,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야 한다. 또 그가 이렇게 맞서는 두 명제를 화해시킨 것, 곧 그의 승리는 그가 예술 차원으로 물러난 것, 곧 그의 후퇴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에는 적용될 수 없는 해결이다. 역사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학적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P179

역사가가 예술가로 성공하면 역사 그 자체는 많은 경우 실패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가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라는 말이 유의미할 때는 예술이 역사의 외적 요소가 아니라 역사의 내적 속성일 때, 예술이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역사가의 자기 삭제 및 자기확장 능력, 그리고 역사가의 진단과 탐구의 취지일 때, 다시 말해 예술이 익명성을 잃지 않았을 때로 한정된다. - P195

시간의 핵심은 이율배반이다. 시간은 한편으로는 관습적인 흐름 이미지에 부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이미지에 부응하지 않는 면도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물줄기로 이루어진 폭포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물줄기들 사이에는 왠지 간섭현상을 연상시키는 ‘구멍들‘이 있다. 이렇게 보자면 이와 같은 구멍에서 솟아나는 어떤 이념들의 상대성은, 잠정적으로는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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