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모에게 녹봉으로 봉양하는 영화[祿養之榮]를 누리게 해드리는 것을 아주 중요한 효도의 법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왕이면 큰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를 기다려 성대하게 수연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출세하여 지위가 고귀하게 된 뒤에 연로한 부모를 연석宴席에 모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맹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대개 왕이 되어 천하를 소유하는 것은 사람의 큰 소망인데 저것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지 않으니 세 가지 즐거움이 천하보다 큰 점이 어떠하겠는가.

근경의 중층 누각 건물은 서대문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고, 원산에는 도성의 성가퀴 일부가 보인다. 실제로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장소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구름이나 안개를 이용해 임의적으로 거리를 축소한 뒤 멀리 있는 경물을 화면 안에 끌어다 놓는 것은 기록화에서 흔히 쓰인 표현 기법이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매화나무, 푸르른 소나무와 대나무, 화분의 큼직한 괴석, 시동이 들고 오는 거문고 등 사대부를 표상하는 여러 장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제1폭과 반대로 화면 왼편에 무게를 두어 두 그림을 나란히 배치했을 때 대칭의 구도를 형성하게끔 고려하였다.

경수연에 앞서 수친계의 결성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은 경수연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림 제작의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아울러 수친계를 기반으로 열린 행사의 기념화였으므로 그림의 내용, 제작 및 분배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1603년의 수연은 이거의 노모를 위한 개인 집안 차원의 사적인 설행이었지만, 1605년의 경수연은 수친계 계원이 주축이 된 수연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공적인 성격이 강했다. 아울러 그림도 참석 집안 수대로 여러 건을 제작하여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특히 모란 병풍, 복식의 장식, 화병과 그릇의 문양 등이 모두 강렬한데, 바닥 전체에 무늬를 넣는 것은 배경 전체를 꽃무늬로 처리한 〈하연 부부 초상〉과 상통하는 19세기 후반적인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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