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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평점 :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 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번째라고 믿는다... 삶 속의 말은, 문학 속의 말과 달리, 끊임없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맥락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p92) <벤투의 스케치북> 中
존 버거(John Berger, 1926 ~ 2017)의 <벤투의 스케치북 Bento's Sketchbook>에는 여러 관련 없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자신의 이야기와 주변 인물의 이야기. 이들의 이야기를 묶는 주제는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의 철학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Ethica>의 구절과 드로잉, 버거의 이야기로 구성된 서로 다른 이야기 속에서 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를 찾는다면 무엇이 될까. 이번 리뷰에서는 이에 대해 풀어가고자 한다.
춤은 행복하고, 반복되고, 느긋하고, 힘이 넘치고, 환각에 빠뜨린다. 결혼식에서의 춤에 대해서도 똑같은 형용사들을 쓸 수 있지만, 두 춤의 움직임은 깊이 다르다. 차이가 뭘까. 결혼식의 여자들에게, 춤은 자신들 안에 숨겨둔 무언가를 향해 관심을 돌리는 기회가 되고, 남자들은 그렇게 숨어 있는 무언가의 앞에서, 혹은 그 주위에서 춤을 춘다. 내(內, into)=안쪽으로, 향(向, vertere)=돌리다. 생일잔치에 온 손님들에게 음악의 비트와 울림은, 자신들의 활력을 모인 사람들에게 드러내며 과시하고 싶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그들 각각은 큰마음 먹고 자신들의 다가감을 나타냈던 것이다. 외(外, extro)=바깥으로, 향(向, vertere)=돌리다.(p75) <벤투의 스케치북> 中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존 버거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내향적인 것과 외향적인 것의 대비를 표현한다. 이러한 대비는 춤과 슈퍼마켓에서 이루어진다. 내향적인 결혼식장에서의 댄스와 외향적인 생일잔치에서의 댄스. 같은 춤이지만, 이들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방향성(方向性)에 있다.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가, 아니면 안으로 향하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대형슈퍼마켓과 길거리 시장의 차이를 어디에서 발견하고 있을까.
(대형슈퍼마켓에서) 우리 모두는 용의자이다. 우리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길거리 시장의 정반대다. 그곳에서 핵심은 흥정이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모두가 최선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p110) <벤투의 스케치북> 中
대형슈퍼마켓에서는 흥정이 필요치 않다. 모든 가격이 정액(定額)으로 결정되어 있기에, 소비자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시장에서는 인간적인 사정이 통용되지만, 대형마켓에서는 구매, 거절의 디지털화된 표현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슈퍼마켓은 '언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존 버거는 일은 언어의 측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보통 우리는 언어를 정면에서 마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언어의 측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언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옆에서 보면 언어가 종이처럼 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말들은, 커다란 풍경화 속 하나의 기둥처럼, 하나의 세로획 - 나(I) -으로 축소된다.(p41) <벤투의 스케치북> 中
저자는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드로잉의 목적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의 동행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저자 스스로 밖으로 표현하기보다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을 드로잉을 통해 표현한다. 동시에, 사람은 이미지에 의해 점차 변용(變容)될 수 있음도 함께 말한다. 그렇다면, 변용되는 존 버거의 지향점은 어디일까.
[그림] 존 버거의 드로잉(출처 :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11/11/22/john-berger-on-%E2%80%98bento%E2%80%99s-sketchbook%E2%80%99/)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p20) <벤투의 스케치북> 中
사람은 그가 어떤 실제의 이미지에 의해 변용되는 동안에는,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것의 이미지가 어떤 과거나 미래의 것으로 상상하게 될 것이다.(p29) <벤투의 스케치북> 中
<벤투의 스케치북> 초반에 존 버거는 스피노자와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벤투의 스케치북>은 이야기의 내향적 범주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면을 언어의 옆면에서 발견하고 드로잉을 통해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불운하게 살아간 스피노자과 일치된 경험을 다룬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둘 - 벤투와 나 - 을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보는 행동, 눈으로 질문하는 행동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내 생각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혹은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공유하기 때문이다.(p12) <벤투의 스케치북> 中
사실, 위와 같이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벤투의 스케치북>에는 많은 인물과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때문에, 리뷰의 내용도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책에는 스피노자의<에티카>와 관련한 많은 인용문이 나오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치는 않다 여겨진다. 오히려, <에티카>의 논리, 수학적 구조에 익숙한 이들은 이 책에 담긴 존 버거의 따뜻한 시선을 온전하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벤투의 스케치북>은 주변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사랑, 소소한 행복만 준비되어 있다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평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