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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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 ~ 1980)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통해 현대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기력'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자유, 평등, 인간 본성, 사랑 등의 개념을 통해 무력감의 원인을 밝히고 있는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의 본문 내용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무기력을 떨쳐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평등(平等, Equality)


 오늘날 '평등'의 개념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과거 평등의 의미가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을 가지는데 반해, 오늘날의 평등의 의미는 타인과 구별되지 않음을 뜻한다. '개인은 개별 존재로서의 의미 대신에 추상적인 존재(전체)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전체로서의 개인(추상화된 개인)이 아닌 개별화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하였다.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 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p30)'


2. 인간의 본성(本性 Human nature)


 인간의 본성은 주어진 부분(상수)과 변화되는 부분(변수)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이처럼 규정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면서 이성과 사랑의 힘을 통해 자신의 본질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적극적인 '자유'를 통해 행동화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분열을 해결하는 수단인 이 대답들은 인간 본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정의를 낳는다. 분열과 불균형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근절할 수 없는 부분이다.(p48)'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이성과 사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만큼 자신의 본질에 도달한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p49)'


3. 자유(自由, Liberty)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인 '자아실현(自我實現)'은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자유의 활동으로 달성가능하며,  적극적인 자유와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개인은 점점 더 성장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적극적인 자유는 현대적 의미의 '평등'과는 달리 개인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있어, 타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로부터 적극적 자유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자아실현이 사고 행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p78)'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발견, 혹은 인간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유한성으로 인한 장애, 제약,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p61)'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도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p81)...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p82)'


 '자아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고유함을 완벽히 긍정한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다르게 태어난다. 이 차이는 태어날 때 물려받은 신체적, 정신적 기질이 다른 탓이며, 거기에는 수많은 상황과 각자의 경험이 추가된다.(p85)'


4. 사랑(愛 Love)


 적극적인 자유는 '나와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인정한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다름을 인정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기에, 우리는 상처받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p73)


 '사랑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이 방식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유일하게 만족을 주는 방식이다.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p20)'


5. 교육(敎育 Education)


 이러한 '적극적 자유 -> 자발적 활동 ->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현대 사회 속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외부에서 바라는 바를 우리에게 강제하기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어렸을 적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생각과 느낌, 소망은 물론 심지어 감각적 느낌까지도 주관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고,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p119)'

 

 '우리의 느낌과 감정 못지 않게 독창적 사고 역시 왜곡된다. 처음부터 우리의 교육은 아이의 독자적 사고를 막고 아이의 머리에 완성된 생각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이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손으로, 이성으로 세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이 낯설고 거대한 세상에서 방향을 잡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p93)'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는 현대적 의미의 '평등'을 추구한 결과,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 현대인들이 '무기력'에 빠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 및 사회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다. 무지와 인식의 결핍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무력감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총동원하여 절망적으로 저항해 봤자 개인은 결국 내면적으로 그 무기력을 인식하게 된다.(p180)'


  저자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결국 현재 상화에 대한 '관찰'로부터 올바른 현실 '인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결과를 바탕으로 '자발적 활동'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의 결론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현대인들의 무기력 문제를 정신분석학의 방법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우리의 무기력을 완전하게 치유하기에는 다소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구조적인 빈곤의 문제, 사회적인 불평등의 사회적 문제 역시 현대인들에게 많은 무력감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주는 무력감은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행위를 통해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 평등, 우애(自由, 平等, 友愛, Liberte, Egalite, Fraternite)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대부터 사용된 구호 '자유, 평등, 우애(또는 박애)'는 그러한 면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제시한다. 앞서 '자유'와 '평등'이 개인의 무력감을 떨치기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할 덕목이라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이념으로서 우애(Fraternite)가 실현될 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무력감이 온전히 치유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사진] 자유, 평등, 우애(박애) [출처 : 뉴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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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2-08 17: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요 위의 사진 제가 가지고 있는 ‘레미제라블‘ 표지랑 닮았어요.
이 참에 레미제라블 시도해 봐야겠어요~^^

겨울호랑이 2018-02-08 19:07   좋아요 2 | URL
^^: 「레미제라블」표지하면 어린 코제트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저는 방대한 양에 도전을 미루고 있습니다만, 양철나무꾼님의 좋은 리뷰 기대해 봅니다!

조그만 메모수첩 2018-02-08 17: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으려고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 읽은 책인데 겨울호랑이님 리뷰를 읽으니 뭔가 책을 다 읽어버린 느낌이예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2-08 19:09   좋아요 3 | URL
^^: 감사합니다. 다만, 책의 문장과 작은 단락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라 조그만메모수첩님께서 직접 읽으시면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알케 2018-02-08 18: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애 fraternité라는 번역을 늘 수상쩍게 봅니다. 맥락 상 피지배계층 간의 ‘형제애적 연대˝로
뜻을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예전엔 ‘박애‘라는 얼척없는 일본식 번역어로 불렸으니 뭐.
현 시대에선 계급, 계층간 정서적, 물리적 연대 solidarité로 새기는게 맞을 듯합니다

프롬 할배는 60년대 미국 사회당 시절의 글들이 이채롭죠. 프롬 할배에게서 프로이트를 -10
마르크스를 +20하면 좋을텐데....ㅋ

겨울호랑이 2018-02-08 19:12   좋아요 0 | URL
^^: 알케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혁명구호에 ‘박애‘는 좀 어색하지요. 알케님 말씀처럼 ‘형제애적 연대‘ 또는 ‘계급 내 단결‘정도의 의미가 보다 더 적절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리히 프롬의 다른 저작도 폭 넓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알케님 글을 읽고 하게 됩니다^^:

[그장소] 2018-02-09 0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떤 부분에선 그 시대에 이런 통찰이 ? 싶다가 결론에선 맥이 탁 풀린 , 그 시대의 통찰력도 어쩔 수 없구나 싶었던 책였는데요 . 그래도 처음 무기력을 들여다 보게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랬네요!^^ 잘 읽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18-02-09 08:56   좋아요 2 | URL
^^: 그렇군요.. 저는 대체적으로 프롬의 통찰력에 대해 많이 감탄한 편이었습니다.. 그장소님께서 말씀하신 프롬의 한계에 대해서는 제가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장소] 2018-02-09 12:14   좋아요 2 | URL
시대를 생각하니 , 옛 사람의 통찰에 놀랐던 거더라고요 . 감탄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걸 고민한다는데 놀라운 감탄을 했었고요 . ㅎㅎ이미 예견된 무기력이라 , 알아도 안다는 것 외에 별수 없겠네..그랬어요 . 저 감정이 너무 마이너한 가요~^^?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02-09 12:35   좋아요 2 | URL
무슨 말씀을... ^^: 그장소님께서 마이너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라구요.. 프롬이 1980년에 사망했으니, 아주 옛날 사람도 아니지만, 요즘 우리가 하는 고민이나 문제는 예전부터 있어온 것들이 다수인 것 같습니다. [기출문제]가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자격시험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것 같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