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쉬나메(Kush Nama)는 페르시아의 서사시로 501년~504년, 1108년과 1111년 사이에 이란의 하킴 이란샨 아불 카이에 의해 쓰여진 신화 역사의 일부이다.' (출처 : 위키백과)
'쿠쉬나메는 7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후의 신라를 다룬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이다. 이슬람 이전 시기 영웅 서사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서사시이다...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서사시의 제목으로 선(善)과 정의(正義)의 화신인 영웅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쿠쉬나메의 쿠쉬는 폭압자이고 기이한 용모를 지닌 악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 점이 쿠쉬나메의 독특한 설정이다.(p19)'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이 바실라(Basilla) 왕 태후르와 함께 중국과 싸움을 벌려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바실라의 공주 프라랑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의 <쿠쉬나메>는 1998년 발굴된 페르시아 서사시다. <쿠쉬나메>가 페르시아 서사시임에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교수가 작품 속의 '바실라' 또는 '마친 Machin'이 '신라'일 개연성이 높다는 내용을 밝힌 이후일 것이다. 이희수 교수에 따르면 <쿠쉬나메>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페르시아 문헌으로 된 신라 관련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아랍 사료들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대 한반도와 아랍 세계 간의 해상 교역 관계를 주로 다루는 데 비해, 쿠쉬나메는 삼국 시대 후반인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쿠쉬나메의 발굴과 해제는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정치적 관계는 물론, 한반도와 이슬람 초기 서아시아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유용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고대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 나아가 신라의 대외 관계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p21)'
이슬람 문헌 여러 곳에서 신라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 고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사에 신라가 역할을 하였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유적을 통해서도 페르시아 문화를 신라 유적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석조 유물(입수쌍조문석조유물)도 원의 중앙 아래서 나무 한 줄기가 수직으로 올라가고 위에는 잎이 무성하며 수간(樹幹) 밑에는 수간 앞뒤에서 긴 목이 교차되어 있는 두 마리 새가 마주 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는 벼슬이 있고 굵고 긴 꼬리는 반원을 그리면서 위로 올라가 위의 나뭇잎에까지 이르고 있다.(p457)... 경주 지방에서 출토된 이 두 유물의 문양은 페르시아계 문양에 그 원류를 두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페르시아계 문양은 대체로 평면은 원형이고, 중앙에 나무가 수직으로 서 있으며, 나무 좌우에 동물을 배치하고 있고, 연주문대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p458)' <고대문명교류사>
[사진] 입수쌍조문석조유물(立樹雙鳥文石造遺物) 문양 (출처 : http://m.blog.daum.net/yns7070314/8014209)
문화적인 교류이외에도 여러 형태의 인적 교류가 있음을 문헌산으로로 확인되는데, 잘 알려져 있듯 '처용' 설화에서 처용 역시 아랍계라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경주 곳곳에 있는 무인상을 비롯한 석조상을 통해서 이국적인 면모를 풍기는 인물들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사진] 경주 괘능에 있는 석조상( 출처 : http://yellow.kr/blog/?p=1277)
'동해 용(龍)이 기뻐하여 곧 일곱 아들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고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행차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치를 보좌했는데, 그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그의 아내가 몹시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해 사람으로 변신해서 밤중에 그의 집으로 갔다. 남몰래 그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왔다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p170)' <삼국유사 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중
<쿠쉬나메>는 앞서 말한대로 발굴이 1998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과연 '바실라'가 '신라'인가에 대한 반론 역시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신라'가 '바실라'라는 섬나라(<쿠쉬나메>에서 바실라는 섬이다)라는 공간 설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서사시에는 다분히 작가의 창작이 들어가 있으므로, 이러한 작가의 상상에 당시 아랍세계에 알려져있던 '신라'라는 실크로드 끝에 있는 국가는 매력적인 소재로 작용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작품 내용이 12세기까지 꾸준히 바뀌어 지금 전해온다면, 8세기 아랍세계와 중국(唐)과의 대립 역시 작품의 세계관 안에 녹아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지도]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 AD 751) (출처 : http://yellow.kr/blog/?p=1277)
우리에게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高仙芝, ? ~ AD 756) 장군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탈라스 전투 등으로 아랍세계와 중국이 충돌이 본격화되었다면, 아랍인들에게 중국보다 더 멀리에 있는 어떤 나라가 자신들을 도와 중국을 물리친다는 상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상상의 예로 기독교 유럽 세계의 '사제왕 요한'전설이 있다. 이슬람 세계에 포위된 유럽은 사제왕 요한이 세웠다는 아시아에 있는 기독교 국가가 있다는 희망 속에서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를 열어가게 된다. 그처럼, 중국과 부딪히게 된 이슬람 사람들 역시 중국 건너에 자신들의 형제 나라가 있다는 희망 속에서 이런 서사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사제왕 요한(Presbyter Johannes) 전설은 중세 시대에 동방(東方) 어딘가에 거대하고 풍요로운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제왕 요한의 이야기는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다. 동방의 무슬림과 온갖 이교도들의 나라 너머에 있다는 이 기독교 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중세 시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러 판타지가 섞여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제왕 요한은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의 후손이며, 관대한 군주이며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부유한 왕국은 청춘의 샘 같은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며 에덴 동산에 맞닿아 있었다고 한다.
사제왕 요한 신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제왕 요한과 가톨릭 세계가 힘을 합해 이슬람을 협공하자는 것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대패로 사제왕 요한의 신화는 사라졌다.'(출처 : 위키백과)
[사진] 사제왕 요한 전설 (출처 : 위키백과)
<쿠쉬나메>는 페르시아 서사시이고, 수록된 작품은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 추려서 옮긴 번역본이기에, 아쉬움이 많은 책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 남아있는 '신라의 향기'를 찾으려 읽다보면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쿠쉬나메>와 유사하게, 페르시아 왕자와 중국 공주의 사랑을 다룬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 ~ 1924)의 오페라 <투란도트 Turandot>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공주는 잠못 이루고'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