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논고 대우고전총서 27
라이프니츠 지음, 윤선구 옮김 / 아카넷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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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 논고 Discours de Metaphysique>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의 저술 중 <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 <형이상학 논고>, <제일철학의 개선 및 실체의 개념에 대하여>, <자연, 실체들의 교통 및 영혼과 육체 사이의 결합에 관한 새로운 체계>, <동역학의 시범>, <자연과 은총의 이성적 원리>, <모나드론>의 7개 저술이 담겨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실체'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가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철학 1명제로부터 출발한다면,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신(神)의 실존'으로부터 개별 모나드의 실존으로 내려가게 된다.


1. 완전한 실체 : 신(神)


 먼저 정리해야할 개념이 '실재성'이다. 라이프니츠는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실재성(realitas)'과 '완전성(perfectio)'는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라이프니츠는 실재성은 '모순율'과 '가능성'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재성은 조건의 충족 여부에 따라 정도(精度)를 가지게 된다. 현실적 존재는 신으로서 최고의 정도를 가지는 반면, 무(無)의 정도는 '0'이 된다. '무'와 '신' 사이의 정도를 가지는 것을 우리는 '관념(觀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관념이 바로 'monad'가 된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실재성은 모순이 없는 적극적인 의미 내용이다. 모순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실재성의 첫 번째 조건은 내용이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여기에 중요한 실재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은 최고의 정도가 모순되지 않고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p339) -해제 中-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든 관념들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가지고 있으며, 실재성(완전성)의 크기에 따라 존재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무한한 존재인 신(神)의 실재성은 이처럼  '가능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지만, 유한한 존재들은 이러한 가능성만으로 실재할 수 없다. 존재가 본질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신(God)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체 substance'가 된다.


 '완전성이 무엇인가를 식별하는 데에 적용할 수 있는 아주 확실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수나 도형의 본질과 같이, 최고의 정도가 불가능한 형상들 formes 또는 본성들 natures은 완전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수들 중에서 가장 큰 수(또는 모든 수의 갯수)는 모든 도형들 중에서 가장 큰 도형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모순을 포함하지만, 가장 큰 지식과 능력은 어떠한 불가능한 것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의 무한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신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완전하게 행위하며...'(p30) <형이상학 논고>中


 '나는 신이 행한 것은 최고로 완전한 것이 아니고 신은 훨씬 더 잘 행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많은 근대인들의 견해에도 동의할 수 없다.'(p34) <형이상학 논고>中


 '신이 가능하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위하여 단지 가능성 또는 본질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실제로 신적인 본성의 탁월한 특권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Ens a se(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p96) <형이상학 논고>中


2. 라이프니츠의 실체 : 모나드(Monad)


 라이프니츠의 실체는 '모나드(Monad 單子)'다. 이들 모나드는 단순한 실체이며, 분할 불가능한 연장과 형태가 없는 '관념'이다. 그리고, 이들 관념은 '창(窓)이 없기' 때문에 오직 개별적으로 '신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신은 그가 우주에 대하여 갖는 상이한 관점에 따라 다양한 실체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한 실체에 발생하는 것이 그들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함이 없이 다른 모든 실체에 발생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신의 중재를 통하여 모든 실체의 고유한 본질이 된다.'(p68) <형이상학 논고>中


 '우리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모나드는 복합된 것 안에 있는 단순한 실체에 다름 아니다... 복합된 것이 존재하므로 단순한 실체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분이 없는 곳에서는 연장도, 형태도 또한 분할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자연의 진정한 원자이고, 간단히 말하면 사물의 요소이다.'(p251) <모나드론> 中 

 

 '모나드들은 단지 한번에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있다고, 즉 그들은 단지 창조를 통해서만 생성되고 파괴를 통해서만 소멸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모나드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그의 내부에 영향을 받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나드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창문을 가지고 있지 않다.'(p253) <모나드론> 中

 

 이들 모나드는 주어(主語)형태로 존재하며, 이들에 대해 서술될 수 있다. 이는 '주어는 술어에 의해 설명된다'는 내용으로 정리되며,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의 기술론(descriptive theory)을 연상시킨다. 다만, 러셀이 기술론을 통해서 주어가 존재(existence)할 수 없음을 밝힌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모나드의 속성으로서의 '기술(서술)'을 의미하는 한계를 가진다.


 '관념이나 사물의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하여 진술될 수 있다. 존재는 신, 즉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존재의 관념으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신에 대해서 존재가 진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실제로는 단지 다음과 같은 내용만이 도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신이 가능하다면, 이로부터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정의가 실질적 정의라는 것을 또는 그것이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것을 추론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p17) <인식, 진리 그리고 관념에 관한 성찰> 中


 '모든 참인 진술은 사물의 본성 안에 그 근거를 갖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한 명제가 동일명제가 아닐 때, 즉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때, 그것은 잠재적으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어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술어가 그 주어에게 귀속됨을 또한 판단할 수 있도록, 주어 개념은 항상 술어 개념을 포함하여야 한다.'(p48) <형이상학 논고>中


3. 신(God)과 모나드(Monad)의 관계


 그리고, 신은 조화 가능한 모든 모나드들의 지각을 예견하고, 모나드의 지각에 상응되도록 모나드들을 배열하게 되며(예정조화설豫定調和說), 항상 최선의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 의지를 규정( the best possible world)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유의지(自由意志)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신의 뜻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신이 유한한 실체들을 전체에 순응하도록 미리 조정하여 창조하였기 때문에, 유한한 실체가 다른 실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다른 실체의 표현 정도가 감소할 때 자신의 표현정도가 증가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p72) <형이상학 논고>中


'신은 그의 의지를 어떤 특별한 관점에서 표현하거나 모방함으로써 의지가 항상 그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추구하도록 섭리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통하여 신은 우리의 의지를 강제함이 없이, 우리 의지에 최선으로 보이는 것을 선택하도록 우리의 의지를 규정한다.'(p111) <형이상학 논고>中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신(神)의 존재'로부터 개별 모나드(單子)의 속성을 밝히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의 철학은 스콜라(Schola) 철학을 바탕으로 했으며, 초기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 ~ 430)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구체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실재성의 소극적 성질과 관련하여 '차가움은 뜨거움의 소극적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악(惡)을 선(善)의 결핍'으로 판단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결핍론'과 통한다.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 사용과 관련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 신들을 닮은 모나드의 왕국을 '신국(神國)'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동저자의 <신국론>의 내용과 연결된다. 이러한 이유로, 라이프니츠 철학 이전에 기독교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라이프니츠 철학은 존재론적인 면에서는 현대의 러셀의 '기술론'과 맞닿아 있을 만큼 시대에 앞선 철학이기도 하지만, 실체론에 있어서는 중세(中世) 기독교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 역시 존재한다. 중세의 한계와 현대의 가능성을 그 사이에서 보여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통해 사상(思想)의 발전(發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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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30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웅, 어려워요~--;
저는 님의 리뷰로 갈음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__)

겨울호랑이 2017-05-30 16:53   좋아요 1 | URL
제가 정리를 잘 못해서 어렵게 느끼신 듯 합니다... 쉽게 쓰려고 하는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네요.. 다음에는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양철나무꾼님 감사합니다^^:

양철나무꾼 2017-05-30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헛~, 아닙니다~!
님은 충분히 잘 정리해주셨고,
덕분에 제가 어려워라 하는 분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님의 것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제가 어려워 하는 분야라는 말이었습니다.
덕분에 정리되었는걸요, 제가 완전 감사드려야 하죠~^^

연의 어린이는 더운데 잘 지내나요?^^

겨울호랑이 2017-05-30 17:04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저도어려워서 여러 차례 본문 수정을 했습니다. 그래서제가 잘 이해 못해 어렵게 느끼신 듯하여 추후 수정, 보완리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연의는 하루가 다르게 쑥 커나갑니다. 이젠 제법 어린이 티가 나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양철나무꾼님 건강에 유의하시고 하루 마무리 즐겁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5-30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철학 논쟁이 일정 부분 증명이 힘든 내용에 있기에 논외로 한다면, 철학 논쟁의 백미는 논리 형식에 있는 거 같습니다. 라이프니치의 형식 논리에 big jump가 ‘따라서‘ 앞뒤에 있었는지 살펴본 재미가 있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5-30 23:13   좋아요 2 | URL
라이프니츠 저술의 원문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만연체‘로 서술된 면이 있었습니다. 제가 편집한 부분이 북다이제스터님께 논리상의 비약으로 비춰진 것은 아닌지 다소 염려가 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7-05-30 23:24   좋아요 2 | URL
‘신은 그의 의지를 어떤 특별한 관점에서 표현하거나 모방함으로써 (따라서) 의지가 항상 그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추구하도록 섭리하였다‘에서 자연스러운 자연을 창조한 신이 ‘특별함‘과 부자연스러움으로 뜻을 표출하고 섭리한다는 것이 ‘따라서‘ 앞뒤에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논리 형식 오류로 보입니다, 내용과 뜻과 상관없이요. ^^

겨울호랑이 2017-05-30 23:43   좋아요 2 | URL
제 리뷰에 누락된 부분에 대해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짚어주셨네요^^: 라이프니츠는 완전한 신이 자신의 의지(선의지)를 개체들에게 ‘조명‘처럼 비추며 인도하지만, 결코 개체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의 뜻은 ‘신국‘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개체들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에서 각각 분리되어 있으나 이들의. 두 세계의 관계 역시 신의 예정조화로 질서를 유지한다고 라이프니츠는 주장합니다만... 저 역시 깊이 와닿지는 않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 제 리뷰의 부족한 부분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5-30 23:44   좋아요 1 | URL
더 어려운 얘기입니다. ㅠㅠ
개체들은 자유의지가 원래 없는 존재라고 신경생리학자들이 밝혔다고 하는데...ㅠㅠ

겨울호랑이 2017-05-31 00:01   좋아요 2 | URL
네.. 우리가 ‘원자모형‘에 익숙해서 모나드를 ‘원자‘라는 개념으로 쉽게 생각하게 되는데, 모나드를 쉽게 ‘명사‘로 생각하시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산소‘, ‘카이사르‘ 같은 관념이 모나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물질적인 ‘수소‘는 연장(extensión)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나드가 아닌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많이 어렵습니다..ㅜㅜ

AgalmA 2017-06-03 21:21   좋아요 2 | URL
북다이제스터님 신경계 자유의지에 대해 강한 믿음이 있으신 거 같은데
˝우리가 자유의지를 실행하는 것은 최초의 의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한 후에 그것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동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이다.(benjamin libet) p56˝ <가상계>
이런 생각은 어떠신지. 여울님 서재글에서 봤지요. http://blog.aladin.co.kr/yeoul/9347129
간혹 저는 자유의지를 신경계 우연적 충돌로 환원하는 주장에서 모든 것을 신의 주사위로 말하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받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6-04 00:04   좋아요 1 | URL
^^: 여울님과 AgalmA님의 글을 지금 읽었네요. ‘자유의지‘라는 문제에 대해서 라이프니츠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신‘ 은 창조의 주체로서 능동적 존재, ‘인간‘은 창조된 피조물로서 수동적 존재라는 인식이 놓여있고, 그위에서 자유의지 문제가 언급이 됩니다. 그렇게 볼때, 라이프니츠가 말한 ‘자유의지‘ 문제는 놓여진 상황에 대한 일종의 ‘대응‘ 성격이 강하다고 여겨지네요. 주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선택지 역시 제한적이었으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유의지는 일종의 ‘선택의 자유‘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능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현대 과학 철학과는 같은 단어, 다른 의미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제 짧은 의견입니다. 북다이제스터님과 AgalmA님 그리고 여울님 덕분에 보다 깊이 생각해 수 있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일깨워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AgalmA 2017-06-03 22:15   좋아요 2 | URL
여울님도 말씀하셨지만(남의 서재에서 이거참ㅎ;..)
신경계와 자유의지는 매우 미묘한 관계입니다.
이 책 주장에 따르면, 신경계는 ‘초기 발생의 작용이자 표현이자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것들은 육체에게 ‘사유의 개정‘을 요구합니다. 즉 그것들을 실행하지 않을 시 가상성으로 그냥 끝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초기 전제로 돌아가 만약 행동으로 현실계가 되었을 때 그것은 신경계의 강렬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연속적인 사고와 반응(동참, 거부)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 모든 걸 신경계로 다 설명하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경계로 인한 반복적 행동이 다수 있더라도 예외성(이것까지 신경계 작용으로 설명하려 들고 있지만)을 신경계의 돌연변이 증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거죠.
저는 지금 어떤 인간적 우위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양쪽의 가능성과 의심스러움을 더 생각해봐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6-04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이 말씀하신 모나드와 연장을 전 추상성과 구체성으로 이해했는데요. 추상성이 구체성을 포괄한다고 하지만 그 추상성이 개별 구체성을 포괄한다는 것에 언제나 한계가 있단 뜻으로 보입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7-06-04 00:37   좋아요 1 | URL
아갈마 님 말씀을 제가 잘 이해하지 못 했다는 전제 하에, 자유의지는 동참과 거부 행위의 사후 합리화 과정이라고 이해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7-06-04 00:36   좋아요 1 | URL
그리고 자유의지는 선택의 자유를 포함하여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모든 착각 행위를 포괄하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