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론>은 아우구스띠누스와 에보디우스간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등의 주제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 작품으로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전체 450 페이지에 달하지만, 사람의 능력에 따라 유효 페이지는 달라진다.
라틴어를 독해하실 수 있는 분은 유효 페이지가 450페이지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225페이지만 읽어도 된다.(그럴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배경과 기본 철학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다면 읽기가 쉽지 않은데, 저자 성 염 교수의 '해제'가 <자유의지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전체3권의 내용을 통해 아우구스띠누스는 죄악의 원천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며, 자유의지의 올바른 사용은 최고선(最高善)인 하느님으로의 지향인 반면, 잘못 사용할 경우에는 물리악을 당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결과는 모두 인간의 책임이며, 선하신 하느님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서 죄악으로 떨어지도록 만드셨는가?' 에 대한 질문에 자유의지는 '중간선'으로 선(善)으로 갈 수도, 악(惡)으로 갈 수도 있는 선택지라는 대답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론> 3권에서는 이 외에도 '영혼의 기원', '어린이의 고통과 죽음', '짐승들의 고통', '첫 인간의 범죄와 구원'에 관하여 포괄적인 논의를 하고 있는데, '자유의지'와 '악' 초점을 맞추어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리한 내용은 성 염 교수의 "해제" 부분을 주로 활용하였다.)
제1권 인간과 자유의지
1권에서 하느님이 악(惡)의 장본인인가?(1.1)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띠누스는 악의 조성자가 하느님이 아니며, 악이란 이성이 욕정에 굴종하는 것으로, 자유의지가 죄악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한다.
아우구스띠누스는 악(惡)을 2종류의 악, 즉 우리가 행하는 악(윤리악)과 우리가 당하는 악(물리악)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윤리악만이 고유한 악이고, 물리악은 윤리악의 결과로서, 물리악은 윤리악의 결과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또한, 윤리악은 인간이 학습되거나 모방되는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1.10.20; 3.14.39) 하고, 하느님은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 역시 악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quid sit malum
악한 행위를 규정하는 요소로서 정욕(精慾)과 법률(法律)이 제기되면서, 구체적으로 간통, 살인, 신성모독 등의 행위를 통해 욕정(libido)가 악행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있는 뿌리임이 드러난다.(1.3.8) 욕정은 '탓할 만한 정욕', 또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빼앗길 수 있는 것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 된다. 또한, 아우구스띠누스는 영원법 개념을 도입하면서 '영원법은 불변하고 정당하다'(1.6.15)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영원법을 연관시키면서 '현명한 인간(sapiens)'은 '질서있는 인간(ordinatus)'이라는 도식을 확립한다. 정욕은 이성의 지배를, 이성은 그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존재론상의 위계'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욕에의 굴종'은 영혼에 대한 죄벌이 된다.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면서 행복해지려는 욕구만 있지 그것을 옳게 달성할 의지가 모두에게 있는가?' 하는 부분은 의심스러우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올바로 그것을 바라고 달성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요구된다.(1.14.30) 그리고, 의지가 바로 '자유의지'가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는 바로 영원법에 종속하는 것이며(1.15.31) 이것은 선한 의지의 사용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제2권 하느님과 인간의 자유의지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인간들에게 의지의 자유 선택을 부여하였는가?(2.1.1)
여기에 대해 아우구스띠누스는 하느님은 존재하시며, 모든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의지 또한 선이라는 내용의 답을 한다.
아우구스띠누스는 "진리로부터의 신존재 증명(argumentum ex vertiatibus aeternis)"을 통해 신을 증명한다. 여기서 아우구스띠누스는 내적 감관이 외적 감관을판단하기 때문에 내적 감관이 우월하며, 이성은 내적 감관보다 더 우월한 것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성은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상위의 존재가 있으며, 이 존재가 '하느님' 이라고 논리를 편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근원적 진리가 최고선이자,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최고선 즉 하느님이라는 결론을 아우구스띠누스는 내린다. 이에 따라, 모든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형상을 지닌 모든 존재는 선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2.17.46)
2권에서 마지막으로 아우구스띠누스는 자유의지란 그것 없이는 아무도 선한 일을 못하는 능력이므로, 분명히 선이지만 중간선(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악용할 수 있는 선)이라고 주장한다. (2.18.50)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불변의 선을 등질 수도 잇고 하위에 있는 선을 선택하는 것에서 인간의 죄악이 발생하게 된다.
제3권 자유의지는 인간의 선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유래했다
아우구스띠누스는 하느님이 완전하시므로 모든 것을 예지하시지만, 미리 예지하시는 바와는 달리 무엇이 일어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의지를 예지하신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유의지로 예지하시기 때문에, 그 예지가 (인간의) 원하거나 원치 않는 의지를 박탈하지는 않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예지와 하느님의 정의를 어떻게 상합하는가?
여기에 대해 아우구스띠누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 영혼은 비록 죄악으로 시드는 일이 있더라도, 저 가시적 빛으로 환원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숭고하고 훨씬 더 선하다... 그래서 죄짓는 영혼을 비록 질책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런 영혼들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으리라고 중얼거릴 정도로 심한 동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3.5.12)
결함(vitium)이라는 것은 결함이 있는 바로 그 사물의 자연본성에 배치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면 어느 면에서도 악이 아니기 때문에(3.14.41), 결함 자체가 질책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게 된다.(3.15.42) 결론적으로, 인간의 죄악은 창조주 하느님께 돌리는 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참말임을 에보디우스의 말을 통해 이야기된다.(3.16.46)
그리고, 자유 의지의 선택의 결과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올바로 행함인 줄은 알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면' 그 결과는 '인간의 단죄(1권에서 말한 물리악)'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유의지론>에서는 플라톤의 사상적 영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강조한 지혜, 정의, 용기, 절제가 <자유의지론>에서도 선한 의지를 갖춘 사람이 지녀야할 덕목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이성보다 우월한 존재(하느님)을 증명하는데 있어, '수(數)의 진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수학을 중요시한 플라톤의 영향을 확인 할 수 있다. 그외에도, 욕정과 이성, 그리고 최고선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신(新)플라톤주의(플로티누스)의 유출설' 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등 어느 정도 플라톤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은 사상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플라톤 : 아우구스띠누스=아리스토텔레스 : 토마스 아퀴나스'
<자유의지론>은 기본 전제가 '하느님은 선(善)하다.'라는 내용이며, 최고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기초위에 출발한다. 증명의 '마지막 2%'라고 생각되는 이 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감받을 수 있겠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내용에 대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이 부분이 <자유의지론>의 논리적 한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논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 <자유의지론>은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마니교의 '선악이원론'의 논리에 대항하여 초기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자유의지'를 인간의 구성적 능력으로 간주했다는 철학적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