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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ㅣ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평점 :
돌궐이 강력하게 추구했던 교역 중심의 국가 체제는 자신들이 직접 물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얻어낸 물자를 확보한 교통로를 통해 유통시킴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정주 농경 사회처럼 단순히 1, 2차 산업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통에 초점을 맞춘 3차 산업에 기반을 둔 것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방식이었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582
투르크 계 유목제국인 돌궐(突厥)은 고구려(高句麗)와의 관계 등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의 구체적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 주로 중국측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무래도 중국 측의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다보니 역사의 실체를 인식하기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정재훈의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는 중앙유라시아 제국 돌궐(괵튀르크)의 역사를 투르크인의 관점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돌궐제국의 의의를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초원제국의 등장으로 인해 서로는 비잔틴,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동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는 실크로드(silk road) 중 '초원길'을 활성화시켰다는 점과 유목민족 최초의 문자 사용에서 찾는다. 유목민족의 문자 사용으로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통합된 힘을 바탕으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동서양 농업/공업의 산지를 연결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업 제국. 이것이 중앙아시아 유목제국들의 진정한 모습이고, 그 토대를 만든 것이 돌궐제국이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돌궐이 중국에서 비잔티움을 바로 연결하는 동서 교류의 매개로서 그 사이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자 이제까지 한 번도 통합된 적 없이 개별 세력들이 분절되어 갈등을 벌이던 유라시아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에는 일시적으로 '투르크가 만들어낸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것은 비록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의 길을 걷지만, 초원과 오아시스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킨 결과는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초원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자유무역지대(FTA)'였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22
돌궐이 자신들이 만든 문자를 사용해 세 면에 걸쳐 자세하게 역사를 기록한 점은 시사를 하는 바가 컸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문자가 없어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유목민들이 문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위구르, 키르기스 등을 거치면서 유목민들의 문자가 몇 세기 동안 더 사용되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즉 돌궐은 자신의 문자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냄으로써 문자 자료가 부족한 북아시아 유목사에서 신기원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529
돌궐제국의 세계사적인 의의가 위와 같다면, 고구려와 연결하여 국사적인 의의도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수나라 이전 분열시대를 겪던 중국은 북방제국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열세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역학관계는 분열하던 중국이 수(隨, 581~619)가 등장하면서 급변하게 된다. 돌궐에 보내던 조공을 거부하고 이를 축적한 재화를 바탕으로 통일왕조를 만든 수나라. 그리고, 수를 대신하여 등장한 당(唐)나라는 때마침 동돌궐의 멸망으로 북서쪽 지역에서 안정을 찾게 되는데,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고구려의 명운과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양견이 돌궐에 보내던 세공을 거부함으로써 그동안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은 단순히 돌궐을 견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향후 통일에 필요한 자원을 축적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북중국 정권과 돌궐과의 관계는 그만큼 엄청난 부담이었고, 이것은 모두 돌궐이 운영하는 제국 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37
수 문제는 전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돌궐이 비록 오랑캐지만 이들을 포섭해 장성 내에 머물게 하면서 외부 세력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제는 이미 통일 체제가 안정된 상태에서 오랑캐인 돌궐은 외연으로 포괄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고 장성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270
수 양제가 돌궐에 배타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반면, 당 태종 이후 군주들은 동돌궐 잔여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대(對)고구려 원정에 적극 활용한다. 수나라 시대와 당나라 시대 사이에 일어난 630년 동돌궐의 멸망 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대한 대응이 668년 고구려 멸망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수나라가 황하와 양자강의 이른바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지역의 역량으로 고구려를 침입했다 실패했다면, 당나라는 여기에 초원 유목제국의 힘까지 더했기에, 고구려로서는 다소 힘든 싸움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돌궐의 역사를 통해 짐작해 본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세계제국 당. 그렇지만, 현종 이후 당 말기에는 절도사들의 세력들이 커지면서 당이 쇠락의 길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안록산(安祿山, 703~757)과 사사명(史思明, ? ~ 761) 그리고 고구려 유민 출신의 이정기(李正己, 732? ~ 781?) 등이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로 당을 위협한 이들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민족 포섭 정책이 반드시 당에게 유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630년 고비 남부에 웅거하던 동돌궐의 몰락은 결국 수말 당초에 수조에 대항한 다양한 할거 세력들을 통제하고 다시 패권을 장악한 당조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구축하게 해 주었다.(p325)... 동돌궐의 붕괴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 상황은 태종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기존의 중원 왕조들처럼 장성 이내의 내지를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이를 기반으로 유목 세력들을 통제해 대외적으로도 안정적 질서를 확보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았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330
추장들은 당조의 관직을 제수 받고 이를 세습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인 위상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더욱 중요한 것은 기미부주에 편제된 추장이 이 무렵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조의 대외 확장에 중요한 행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점이다.(p392)... 번장은 태종이 처음에 투항한 이민족 추장들을 모두 숙위의 장군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을 지방 군사령관인 도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이 무렵 당조의 대외 확장은 상당 부분이 번장이 이끄는 번부락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_ 정재훈,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 p393
<돌궐 유목 제국사 552~745>는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초원 유목제국 돌궐의 역사와 그 의의를 알려주고, 이를 통해 '유목민족=야만인=약탈자' 로 인식하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는데, 이 책과 함께 저자의 또다른 저작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을 읽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되리라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고 글을 마무리한다...
PS. 개인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전쟁이 통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실크로드의 패권을 둘러싼 세계전쟁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관련 리뷰와 페이퍼를 통해 하나하나 정리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