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광복절 밤에 의미있는 행사가 있었다. 독립투쟁의 장군 홍범도(洪範圖, 1868 ~ 1943)의 유해 봉환식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상징으로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전투(1920)년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운 인물, 그렇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이후 잊혀져간 장군. 쓸쓸하게 중앙아시아에서 말년을 보내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 <홍범도>가 상영되는 고려극장에서 경비를 서다 괴한과의 격투 후 며칠 뒤 사망한 인물. 이 정도가 일반에게 알려진 홍범도에 대한 대강이 아닐까 싶다.
1920년대 일본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부대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金佐鎭, 1889 ~ 1930)과 '북로군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줄곧 일본군의 가장 중요한 추적 목표가 되었던 인물은 홍범도였고 독립군 부대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도 그였지 않은가? 후일 북로군정서의 활약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군정서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배경이 있다. 반면에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국민의회가 1920년 2월 중순 이후 상하이 임정과 불편한 관계가 되자 아무래도 홍범도는 임정과는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242/348
홍범도와 상해임시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더해 그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수 없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유해봉환식에 사용된 사진 속의 권총 역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 ~ 1924)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일정부분 레닌,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 ~ 1940)과 사상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위로했으며, 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홍범도에게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범도는 매우 기뻤다. 그는 레닌에게 합리적 한인정책을 펴달라고 했다. 면담이 끝난 뒤 범도는 레닌, 트로츠키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p278)... 1927년 10월 범도는 소련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증번호는 578492번.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82/348
다만,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 ~ 1953)과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보면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생각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과 달랐던 듯 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난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입장을 인정한 레닌에 대해 홍범도가 우호적인 마음을 가졌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으로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일본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분명 하나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차르 러시아와 전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발전에 내재하는 혁명 역량을 레닌은 경탄할 만한 깊이로 평가했다. 일본은 노예화를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은 해방을 목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정도로 '비난하는' 위선적인 '평화주의'는 레닌의 경멸을 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억압 전쟁과 대조되는 민족해방 전쟁은 레닌에게 일국 혁명의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레닌의 아류들, 특히 스탈린은 피억압 민족 투쟁의 진보적, 역사적 의의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으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임무를 도출했다. 이것이 이들의 치명적 오류다.(p756)... 이 모든 오류를 통해 스탈린은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독재'를 저속하게 이상화시켰다... 스탈린 일당은 이 오류의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히 결별한 채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몰고 갔다. _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 p757
<홍범도>에서 저자 역시 '홍범도'라는 인물을 바라볼 때 지나친 영웅주의가 아닌 사회적 인물로 평가하길 당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를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 행동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과거 독립투쟁가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31 착한 스승(베르길리우스)은 내게 "너 지금 보는
이 영혼들이 누군지를 넌 묻지 않느뇨?
그럼 너 더 나아가기 전에 내 알리고 싶노라.
34 저들이 죄를 짓지 않았고 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너 믿는 믿음의 한 몫인
성세 聖洗를 못 받았기에 넉넉치 못하니라.
37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만큼
맞갖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였나니
나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로다.
40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 탓으로
우리는 버림을 받고 오직 이 흠집 까닭에
가망도 없이 뜬 소망 속에 사느니라."
133 그를 우러러 모든 이가 그에게 영광을 드릴 때
누구보다도 먼저 그이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거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보았노라. _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4곡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 플라톤(Platon, BC 424 ~ BC 347) 과 같은 인물들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 그나마 림보(Limbo)에 머물러 최소한의 벌을 받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예수 탄생 이전에 태어나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었던 이들도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설정은 오늘날 관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중세의 이러한 구원관과 일제 하 독립투쟁가들의 사상을 문제삼는 것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최근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 ~ 1947),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 ~ 1958) 등에 대한 재평가도 분명 이뤄져야할 것이다. 늦은감이 있지만 이들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가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는 다행이라 여겨진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점은 홍범도의 투철한 생애와 민족운동을 개인적 관점이나 '영웅사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와 민족, 국가가 요구하던 시대적 과제와 모순을 척결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홍범도라는 뛰어난 인물을 사회와 고립된 한 개인의 입장이 아닌, 민족과 사회 등 여러 분야와 관련을 맺으며 존재하는 '사회적 인물'로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323/348
민족을 사랑하고, 일본에 적극 저항한 인물. 192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대파했지만, 바로 뒤이어 일어난 간도참변(경신참변 庚申慘變, 1920)으로 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에 큰 피해가 생기자 자유시로 건너간 그의 행적 속에서 위엄있지만 자애로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인물의 모습을 발견한다.
농부로서 홈범도 대장은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또는 기다란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멘 야전가방은 벗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나간 권총이 있었다.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아, 선생님. 어찌 그렇게 일하십니까? 시넬을 입고 가방을 멘 채......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먹는다오 하는 그는 조선 낫으로 그냥 가을을 하였다. 선생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 왜놈들을 벨 때 돕자는 사람이 있으면 눈물나게 반가웠지만 조를 벨 때 돕자는 건 그리 반갑지 않어. _ 장세윤, <홍범도> , p288/348
나(홍범도)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뿐이며 자나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 속 가득한 끓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왔고 (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 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_ 장세윤, <홍범도> , p161/348
이제 18일이면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장군은 대전 현충원에 안치될 것이다. 편히 쉬시라 말씀드리고 싶지만, 같은 곳에 위치한 간도특설대의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과 같은 이들이 이웃이라 선뜻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장군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이 편히 쉬실 수 있을 때가 오도록 우리가 항상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장군의 귀환( https://www.mpva.go.kr/hongbeomdo/selectBbsNttList.do?bbsNo=325&key=1651)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시리즈를 출판한 출판사 역사공간에서는 <홍범도> 개정판에서 아래의 문장 다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그의 유해가 크즐오르다에서 고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인 1962년 3워 1일 한국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뀜)에 소설 <홍범도>가 연재되었다. 그리고 1984년 11월 초에는 크즐오르다의 묘지에 반신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99/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