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정부의 권리와 권력(jus et potestas imperii)을 매우 큰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의 권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충분히 분명하게 밝혔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경험은 국가의 보존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민의 충성과 덕 그리고 명령 수행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에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충성과 덕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방법은 쉽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인간들이며 그들은 노동(labor)보다 욕망(libido)을 추구하기 때문이다.(p360)...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어떤 기만도 남지 않게 국가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들 각자의 기질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사적권리보다 공적 권리를 우선시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과제이며 여기에서 해야할 일이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1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1632 ~ 1677)의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를 읽던 중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소중한 존재이고, 자유를 비롯한 이들의 이익과 권리가 상호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잠시 이야기를 돌려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을 살펴보자. 칸토어는 집합론에서 일대일 대응을 통해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집합론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칸토어로, 1874년에 그는 대수적 수(algebraic number)보다 실수가 더 많음을 보였다. 이는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초월수의 존재를 새롭게 보인 것이었다... 대수적 수와 실수가 모두 무한히 많은데도 실수가 대수적 수보다 '많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 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다._ 티모시 가워드 외, <Mathematics 1>, p1013
칸토어의 설명이 다소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의 설명을 빌려보자.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에서 러셀은 수열의 순서를 바꾸고, 수열수 비교를 통해 크기가 다른 무한 집합의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다.
먼저 보기를 들어 설명하자. 다음의 수열로부터 출발해 보자. 1,2,3,4, ..., n, ...
이 수열은 가장 작은 무한수열수, 즉 칸토어가 w라고 부른 수열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최초라 나타나는 짝수를 맨 마지막으로 옮기는 조작을 순차적으로 되풀이 해 이 수열을 띄엄띄엄 드물게 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수열을 얻을 수 있다. 1,3,5,7,...2n+1... 2,4,6,8... 2n . 이 수열의 수열수는 2w다.
여기에서 두 수열 1,2,3,4.... , n과 1,3,4,5,..., n+1,..., 2을 비교해 보면 첫째 수열은 둘째 수열에서 최후의 항, 즉 2를 제외한 부분부열과 대등하지만, 둘째 수열은 첫째 수열의 어떠한 부분수열과도 대등하지 않다. 이는 첫째 수열의 수열수가 w라고 했을 때, 둘째 수열의 수열수는 w+1로서 정의에 의해 둘째 수열이 첫째 수열보다 크다. 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3
두 무한 집합이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설명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셀의 설명 방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책에서 무한 집합에서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1+w와 w+1은 다르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과 권리가 충돌할 때 이는 종합적인 판단이 아닌, 사안별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의 항을 수열의 마지막이 아닌 최초에 더하면 그것 또한 수열이므로 1+w=w이다. 따라서 1+w=w이다. 따라서 1+w는 w+1과 같지 않다. 이는 관계에 대한 산술 전체에 통용되는 성질이다.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4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떨 때는 시장 경제의 자유를, 다른 때는 국민 정서를 언급하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비판을 일삼는 일부의 행태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사안 별로 개인과 이익의 상충점을 소거해가면서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없는 남는 부분수열이 어느 집합에 속하는지를 보다 납득할 기준(이 기준은 사회 전체의 합의가 필요하겠지만)에서 판단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숫자로 표현되는 수학의 세계와 사회과학의 세계는 다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장황했지만, 이러한 생각이 시작된 시작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3월호에 실린 "분열을 팔아야 먹고 사는 언론"의 기사를 읽고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배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의 <공포의 문화 The Culture of Fear: Why Americans Are Afraid of the Wrong Things>를 읽으며, 언론이 어떻게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살폈고 여기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공포의 문화>에서 <신학-정치론>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로 대중의 변덕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중에 대해서 거의 절망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며, 대중은 모든 것에 달려들고 탐욕이나 사치로 인해서 쉽게 타락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의 기질에 따라서 이끌어 가고자 한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0
<공포의 문화>는 조만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 철학을 쉽게 설명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 페이퍼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철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3월호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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