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 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52 역자 해설 中
이 페이퍼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Nikos Kazantzakis, 1883 ~ 1957)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호메로스(Homeros, BC 8세기 ?),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 ~ 194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그리스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을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1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화자인 '나'가 조르바에 대해 설명한 말이다. 여러 면에서 자신과 다른 조르바. 두 주인공의 다른 성향 속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 > 속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떠올리게 된다. 거칠게 표현해 '이성'에 가까운 아폴론을 '나'를 대입할 수 있다면, '감정'의 디오니소스에는 '조르바'를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함께 하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러한 면에서 그리스 비극(悲劇)의 요소를 갖는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아폴론적 예술가인 조각가의 예술과 디오니소스의 예술인 비(非)조형적 음악 예술 사이에 그 기원과 목표에 따라 커다란 대립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그들의 두 예술의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결부되어 있다.... 그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서로 결합하여 나타나고, 이 짝짓기를 통해 마침내 디오니소스적이기도 하고 아폴론적이기도 한 아티케의 비극을 산출한다.(p29)... 그렇다. 원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와 그 안에 사로잡혀 있는 자의 고요한 정좌가 아폴론의 형상 속에 가장 숭고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개별화의 원리가 깨졌을 때 인간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즉 자연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환희에 찬 황홀을 이 전율과 함께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p33)...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주의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관찰할 수 있으며, 그 밖에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자연주의적 격정으로 변했음을 인지할 수 있다. _ 프리디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p111
조르바를 디오니소스에 대치시키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면, 다음에 나오는 '개별화 원리의 부정'을 통해 공통점을 찾아보자. 여기에 더해 조르바의 연인인 오스탕스 부인에게서 여신(女神)아프로디테를 발견한다면, 애인인 조르바에게도 신격(神格)을 부여해 주는 편이 공정하지 않을까. 다소 억지스런 설정이지만, 이렇게 봤을 때 이들의 세계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이고, 올림푸스의 신계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들 밖의 세계는 다른 세계다. 수도원의 숨겨진 비밀과 과부를 마녀로 모는 어둠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주위는 분명 화자와 조르바의 세계와는 구분되는 중세(中世)시대다. 이렇게 본다면, 다른 세계는 고대와 중세의 대립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잠시 옆으로 새지만, 개인적으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과부의 등장 장면을 통해 영화 <말레나 Malena>에서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ci)를 떠올리게 된다. 많이 예쁘다.
그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반쯤 미라가 되고 화장을 치적치적한 늙은 여자가 아니라, 그가 입버릇처럼 여자를 지칭할 때 쓰는 <암컷들> 전체였다. 개별적 존재는 사라지고 개별적 특징들은 말소되었다. 젋었느냐 늙었느냐, 아름다우냐 추하냐 따위는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차이일 뿐이었다. 모든 여자 뒤에는 위엄이 있고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68
수도원은 성모의 과수원이 아니고 마귀의 정원이오. 가난, 겸손, 정절... 말로는 이게 수도승의 왕관이라고! 글쎄올시다, 돌아가라니까. 돈, 오만, 미소년! 이게 수도승들의 삼위일체올시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94
1300 ~ 1500년 사이의 유럽으로 돌아가 보자. 어떤 부류의 여성들이 마술에 가담했다고 고발당했던가? 혼인상의 지위가 알려진 한에서 보면 그녀들의 대부분은 결혼을 한 것 같다. 어떤 여성들은 마법적 치유를 행했고 약초를 다루는 데 능했으며, 어던 여성들은 실패한 산파 내지 치유자였다. 유산은 흔히 마술의 탓으로 돌려졌다. 어떤 여성들은 창녀나 늙은 포주였다.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알려진 여성들은 마술로 고발당하기도 쉬웠다. _ 슐람미스 샤하르, <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p477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숱 많은 머리채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검은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빗속을 달려가는 여자가 보였다. 탄탄하고 둥그스름한 몸매가 비에 젖어 달라붙은 옷 위로 드러나 고혹적이었다.(p51)...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바로 그날부터 과부는 끊임없이 내 고독한 가슴 앞을 지나며 내게 손짓하고 엉덩이를 흔들어 대었다. 낮 동안은 나도 강건했다... 낮 동안은 전력으로 싸웠지만, 밤이 되면 내 마음은 무기를 놓았고, 내면의 문이 열리면서 과부가 들어왔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59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낯선 크레타로 왔을까. 나는 사업에 성공해서 이상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막연한 꿈에 불과하다. 화자는 무엇인가 없애야할 것은 알지만, 그것을 넘어서 무엇을 건설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 '나'의 모습에서 혁명의 시대를 이끈 '계몽주의 이성'을 떠올리게 된다. 계몽주의 이성은 과연 중세 이후 근대의 방향성을 제시했는가.
나는 낭만적인 구상을 하기도 했다. 갈탄광이 성공했을 때 얘기지만, 일종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한 형제처럼 지낸다. 나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 있었다. 새로운 삶의 누룩이 될...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29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재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을 빚는 재료인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4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비겁하게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고 싶어 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82
'나'로 표현되는 그런 혁명과 새로움에 대한 낙관주의는 조르바를 통해 새로운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육체, 고통 등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눈을 뜨면서 새롭게 변화해간다.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가 이루어진 듯 보인다.
이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조르바는 두 개의 바위 사이에다 불을 피우고 음식을 장만했다.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 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6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조화가 이루어졌을까. 여기에서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을 들고오자. 베르그송이 말한 닫힌 도덕과 닫힌 종교, 그리고 열린 도덕과 열린 종교의 개념에서 본다면 낙관적이었던 화자의 생각은 이후 부정적인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을까. '열린 사회'의 기대에서 '닫힌 사회'의 인정으로.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사랑과 살과 고통의 절규로 설명한 대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겠다.
닫힌 도덕은 부동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그 도덕이 변한다면, 그 도덕은 자신이 변한것을 곧바로 망각하거나 변화를 고백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떤 순간에서도 이 도덕이 제시하는 형식은 결정적 형식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도덕은 하나의 발동이고, 운동에의 요구이다. 그것은 원리상 운동성이다. 이 점에 의해 이 도덕은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할 것이다. _ 앙리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p82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살과 고통의 절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이런저런 연금술로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버린다면?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68
이처럼 닫힌 도덕과 종교를 인정하고 이들이 사회를 보존하기 위한 소산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제는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말한 구절들이 조르바와의 만남속에서 구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인식과 선/악에 대한 모호성 등.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영원히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85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 _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259>, p273
하느님도 신나게 놀고, 죽이고, 부당한 짓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일을 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꼭 나처럼요. 하느님도 입맛 당기는 걸 먹고 끌리는 여자를 취해요. 물 찬 제비 같은 여가자 지나가는 걸 보면 당신 가슴도 뛸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갈라지고 이 여자가 사라져 버립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누가 이 여자를 데려갔을까요? 행실이 참한 여자라면 사람들이 <하느님이 데려가셨다>라고 할 거고, 행실이 걸레 같은 여자라면 사람들이 <악마가 데려갔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두목, 몇 번이나 말했지만 다시 말하건대, 하느님이나 악마는 하나고, 똑같은 거예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16
이 책에는 선의를 가진 말은 없다... 모든 것이 휴양을 취한다 : 차라투스투라가 했던 것처럼 선의를 허비하는 일이 어떤 휴양을 필요로 하는지 결국 누가 알겠는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일의 끝에 인식의 나무 아래 뱀으로서 누워 있던 것은 바로 신 자신이다. : 신은 이런 식으로 신적 존재로부터의 휴양을 취했던 것이다. _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 선악의 저편>,p440
이렇게 문제는 도덕(道德)의 계보학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노예의 도덕인 '선(善)'과 '악(惡)'의 개념을 갖는 것이 두목인 '나'라는 것과 주인의 도덕인 '좋음'과 '나쁨'을 갖는 것이 부하인 조르바라는 점이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과연 '나'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창조적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될 때 시작된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p367)... 원한을 지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적'을 상상해보자 - 바로 여기에 그의 행위가 있고 그의 창조가 있다 : 그는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殘像) 또는 대립물로 다시 한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고귀한 인간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고, 거기에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된다. _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10>, p371
그렇지만, 나는 온전하게 노예의 도덕을 벗어나지 못한다. 중세시대 마녀 사냥에 비할 수 있는 과부의 죽음 앞에서 이를 지켜주지 못하고 무력하게 지켜봐야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힘 없는 자의 전형을 보인다. 행동에 의해 반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상에 의한 복수를 통해 손실을 벌충하려는. 결국 '나'는 새롭게 창조하지 못하고 현실 속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내용면에서도 <그리스인 조르바>는 비극이다.
내 졸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습관에 따라 다시 한 번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피와 살과 뼈를 제거하여 추상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들과 연관시켜 지금 일어난 일은 결국 필연적이었다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오늘의 비극은 우주적인 조화(調和)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라는 최종의 가증스러운 위안에 이르렀던 것이다.(p122)... 내게 시간이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냈다. 과부는 수천 년 전인 에게 문명 시대에 죽은 것이며, 크노소스의 고수머리 처녀들은 오늘 아침에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죽은 것이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23
결국, '나'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파산'이라는 외부 상황의 자극에 의해서 겨우 자유를 느꼈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에 불과했다. 때문에, 화자가 느낀 자유 안에서 진정한 해방감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실어 내보낼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은 시험데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아지 않는 강력한 적 -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143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될 듯하다. '나'로 표현되는 아폴론적인 요소(이성)와 '조르바'로 표현되는 디오니소스(감성)적 요소의 결합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된 내용이며, 공간적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세계와 주변 세계의 대립이 고대와 중세라는 시간적 갈등을 이룬다. 또한, 창녀로 몰린 과부와 수도원을 탈출한 수도사의 죽음이라는 시대적 모순에서 이성은 새로운 시대를 제시하지 못했고, 감성은 이를 막지 못하면서 구시대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여거에 더해 이들을 맺어주던 회사의 '파산'을 통해 이성과 감성은 분열되고 중세 이후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더 이상의 기회는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거칠게 이런 구도로 생각해 본다.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이후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步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요.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37
여태까지의 이야기에서 빠진 인물이 한 명있는데 바로 호메로스다. 호메로스의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전반에 걸쳐 조르바의 여행이야기가 회상되는 것을 보면 <오뒷세이아 ODYSSEIA>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나, 조르바 그리고 오르탕스 부인의 만찬에서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변화하는 오뒷세우스의 동료 모습이 떠올랐지만.... 다소 두서없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억지스러운 부분도 분명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마른 목은 포도주로 축여 주었다. 음식은 곧 피로 변했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고, 우리 옆에 앉은 여자는 시시각각으로 젊여져,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p22
키르케는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등받이 의자와 안락의자에
앉히고 그들을 위해 치즈와 보릿가루와 노란 꿀과 프람네 산(産)
포도주를 함께 섞어 저으며 여기에 해로운 약도 섞었으니,
그들이 고향 땅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었소.
그들이 그녀가 준 것을 다 받아 마시자마자 그녀는 즉시
지팡이로 그들을 때리더니 돼지우리들 안에 가두어버렸소. _ 호메로스, <오뒷세이아제10권 233 ~ 238),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