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1차 대전의 원인 또는 발생 배경을 두 가지 관점 또는 수준에서 논의하였다. 1차 대전 발발 당시까지의 국제 관계 속에서 배태한 기본적 갈등 구조, 즉 영국과 독일의 대결구조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 그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발발의 도화선이 된 발칸 지역의 정치 상황과 그것을 통해 표출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갈등 구조의 검토였다.(p149)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1차세계대전의 기원>에서 저자 박상섭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영국-독일의 갈등과 함께 각각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로 대표되는 '범(凡)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에서 찾고 있다. 이를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차 세계대전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사건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영국에 대한 독일의 도전이라는 점으로 요약된다. 즉 그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두 최강국의 대결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단순히 두 국가의 충돌로 그치지 않고 그 두 국가에 의해 지탱되던 권력 배분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p55)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1866),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1)을 통해 제국으로 도약한 독일은 이후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새로운 유럽의 맹주로 영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이 위협적으로 생각한 것은 늘어난 독일의 철강 생산량도, 아프리카의 카메룬, 나미비아 등으로 진출한 독일식민지도 아니었다. 그보다 영국이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독일 해군(海軍)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럽의 군비경쟁(軍備競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바로 건함(建艦) 경쟁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해군과 관련한 두 강대국의 대립이 놓여 있었다.


 영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독일의 위협은 식민지 갈등이라는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영국이 그동안 3세기에 걸쳐,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는 거의 한 세기 가량 중단 없이 누려온 해상 패권에 대한 독일의 도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p60)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1813 ~ 1907)으로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웠던 영국이었지만, 그들에게 중앙아시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 유지를 위한 해양력(海洋力)이었기에, 영국은 러시아와도 기꺼이 손을 잡을 정도로 해군력은 영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결전이   독일과 덴마크에 걸쳐 있는 유틀란트(Jutland) 반도에서 벌어졌다.


[사진] 유틀란트 해전(출처 : 위키백과) 


 이른바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 스카게라크 Skagerrakschlacht(독))은 해전사에서 최대의 해상 조우전이자 최후의 순수한 해상 조우전이 될 터였다. 두 나라 해군이 만들어낸 비참한 광경은  전투에 참여한 자들의 기억을 떠나지 않았다... 유틀란트 해전은 해전사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전투이며 학자들 간에 가장 큰 논쟁의 대상이었다. 공식, 비공식 역사가들은 두 함대 사이의 교전을 거의 분 단위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분석했지만, 무슨 일이 왜 벌어졌는지, 실로 그 결과가 영국의 승리였는지 독일의 승리였는지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p388) <1차 세계대전사> 中


 치열한 전투였지만, 전투에 대한 평가가 모호한 것은 유틀란트 해전만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 자체를 규정하는 것 역시 이전 전쟁과는 달리 어려움이 있는데, 이는 이 전쟁이 국가 총력전(總力戰)의 성격을 가진 최조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총력전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1차 대전의 다른 기원인 '범슬라브주의-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중왕국 체제 안에서 자치권을 누리던 헝가리의 영토 안에는 세르비아인이나 크로아티아인 같은 남슬라브계 소수민족과 루마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헝가리의 차별 정책은 대단히 가혹하여 인접한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와의 첨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민족국가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국내 정치는 바로 국제정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p108) <1차 세계대전의 기원> 中


 총력전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철도(鐵道 railroad)'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 유럽의 도시가 농촌을 정복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KTX를 통해 지방중소도시 경제권을 붕괴시키고 있을 정도로 (빨대 효과) 철도는 지금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철도의 위력은 당시에는 현재보다 위력적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전투 인력의 공급(supply)을 담당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공급된 인력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을 처리한 것은 맥심 기관총(Maxim gun)으로 대표되는 현대 무기였다. 막대한 인력의 공급과 수요의 접점에서 쌓여가는 것은 전사자와 부상자였으며, 전선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참호전(塹壕戰  trench warfare)의 모습이었다.


[사진] 프랑스 협궤철도(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46917977523721498/)


 특히 독특한 것은 기차 기계인데, 이것은 선로와 차량을 결합해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독립체를 형한다. 그 기계는 사람들이 가득 찬 객차를 이끌고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도시와 마을을 통과해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이동시킨다. 여객 철도 시스템은 일상생활 외부에 국한되지 않고, 공업, 노역, 보안의 장소로부터 벗어나 있다. 철도  기계는 농촌을 일정한 속도로 통과하면서 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사회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변형시킨다. 처음으로 기계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 경험의 전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비록 북미보다는 유럽과 일본에서 훨씬 특징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농촌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철도는 자연, 시간, 공간의 기존 관계를 재구조화한다.(p179) <모빌리티> 中


 1830년대에 시작된 유럽 철도망의 건설은 도보와 말을 이용했을 때보다 부대의 이동과 보충을 어쩌면 열 배까지도 더 빠르게 함으로써 전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의 병참은 언제나 무계획적이었다. 또한 동시에 융통성을 허용하기도 했다... 철도는 평시와 마찬가지로 전시에도 엄격한 운행표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 아니 평시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p44) <1차 세계대전사> 中


 기관총, 독가스, 철조망으로 대표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비참한 전투 현장에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전반을 관통하는 인간 이성(reason)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무너지게 되었고, 이러한 절망감 속에 전쟁에 대한 짙은 회의는 빠르게 번져나가게 된다. 이미 1917년 즈음에는 거의 모든 나라의 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같은 해 미국의 참전으로 전쟁은 급속하게 종결을 맞이 하게 된다. 

 

 이제 전선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선이 교착되어 적군과 아군이 마구 뒤섞였고, 아군의 거점들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굶주림, 갈증, 추위, 눈과 비, 수면 부족, 배설물과 부패한 시체에서 풍귀는 악취 등 온갖 고통을 다 겪었다.(p283) <사생활의 역사 5> 中

 

 병사들은 어떻게 4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을까?... 마지막 가설은 모든 병사들이 민족주의 윤리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인데, 당시의 민족주의는 알사스와 로렌의 상실로 한층 더 격화되어 있었다. 진짜 '애국교'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민족주의는 우파와 좌파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였다. 오로지 극소수 좌파만이 이러한 가치에 이의를 제기했다. 1914년 국제 협력 체제의 완전한 붕괴는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로 설명된다.(p287) <사생활의 역사 5> 中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컸고, 전승국들은 승리에 대한 배당을 나누어야 했다. 영국의 경우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견제를 위해 중동 지역에는 독립에 대한 약속을, 유럽에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인도에서의 자치 약속을 했지만 이들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는 패전국의 지배지에서만 적용되는 원칙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다는 사실은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6년 초에는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아지즈 알 미스리가 외교언어인 프랑스어로 쓴 서신을 키치너에게 보냈다. 그가 개진한 내용은 이랬다.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완전하고 참된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 한 아랍어권 중동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영국의 지배도, 보호령도 아니다(non pas une domination ou un protectorat)... 키치너와 그의 부하들이 아랍의 지지를 절박하게 원하면서도, 후세인이 원하는 대가는 지불하려 하지 않고 위조화폐만 남발하는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었다.(p281)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저(간디)는 이미 자치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자치는 무기의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도의 땅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영혼의 힘에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P168)... 어떤 영국 성직자의 생각을 제가 다시 표현하자면, 자치 아래 무정부 상태가 질서 잡힌 식민 통치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 고상한 성직자가 생각하는 자치의 의미와 제가 생각하는 인도의 자치는 다릅니다. 우리는 배우고 가르쳐서 영국의 통치든, 인도의 통치든 폭정을 몰아내야 합니다.(P169) <힌두 스와라지> 中


 1919년 3.1운동 100주년을 한 달 정도 앞두고, 간략하게나마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페이퍼를 작성해본다. 계몽주의(啓蒙主義)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 The first World war). 이 전쟁이 큰 전쟁(大戰)으로 역사에 남지 않고, '제1치' 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류가 이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와 이를 알지 못한 1919년 우리 조상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2019년 3.1 100주년을 맞는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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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0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30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02-01 2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사진을 보니, 그 사이 귀요미가 아주 많이 컸네요.
그 때보다 훨씬 예뻐진 것 같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님, 설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2 00:34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 커진 것 같아요. 다만, 머리 크기는 거의 변화가 없이 몸만 커져서 귀여운 맛은 사라지고 조금 예뻐진 것 같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요. 서니데이님께서도 설 연휴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연의와 온 가족과 함께 멋진 시간들 연휴에 보내시고 재충전하시고 오소서 ^^

겨울호랑이 2019-02-02 00:3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되세요. 감사합니다!^^:)

雨香 2019-02-0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차 대전에 대해서 공부하듯 읽었습니다. ^^ (꾸벅)
역사를 그냥 파편화하여 접하다 보니 1차대전과 3.1운동이 비슷한 시대였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챘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4 20:12   좋아요 1 | URL
저도 이번에 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다보니 세계사 흐름안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야함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