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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작은 진동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간 네트워크를 따라 전달되었다. 그 길을 따라 순례자와 전사 戰士, 유목민과 장사꾼들이 여행하고, 먼 곳에서 온 물건이 거래되었으며, 사상이 교류하고 수용되고 다듬어졌다. 이 길은 번영뿐만 아니라 죽음과 폭력, 질병과 재앙도 실어 날랐다. 끝없이 뻗은 이 연결망은 19세기 말 독일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Ferdinand von Richthonfen에 의해 명명된 이후 그 이름으로 불렸다. 바로 실크로드 silkroad다.(p14) <실크로드 세계사> 中
[사진] 실크로드(출처 : 위키백과)
피러 프랭코판(Peter Frankopan)은 <실크로드 세계사 The Silk Road : A new history of the world>속에서 고대부터 2010년대까지 문명 교류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인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오랜 기간 세계의 중심은 중앙아시아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 유수의 지적 증심지는 유럽이나 서방이 아니라 바그다드와 발흐,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였다... 그들은 사상을 주고받으면서 철학과 과학, 언어와 종교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p16)... 그러나 근대 초기에 진보의 주역이 바뀌었다. 15세기 말 두 차례의 해양 탐험이 가져온 결과였다... 갑자기 서유럽은 지방의 벽지라는 위치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통신과 수송과 교역 시스템의 구심점으로 탈바꿈했다.(p17) <실크로드 세계사> 中
중앙아시아 중심의 세계사를 표방하는 <실크로드 세계사>는 로마보다는 페르시아가, 십자군보다는 셀주크 투르크가 역사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마치, 지도를 거꾸로 보는 것과 같은 인식 변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대 사회가 결코 분리된 각각의 문명권이 아닌 서로 영향을 깊이 미치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약 900 페이지에 이르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벽에 부딪치고 말것이다. 그러니, 일단 아래의 내용을 인정하고 넘어가자. 인류 역사는 고대부터 교류의 역사였다.
고대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를 서유럽의 시발로 보는 것은 로마가 줄곧 동방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방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인도를 페르시아만 및 홍해와 연결하는 교통량이 늘면서 고대의 초기 실크로드는 활기를 띠었다.(p59) <실크로드 세계사> 中
후대에 '비단길'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실크로드를 따라 종교, 문화, 사상, 질병 등이 활발하게 퍼져나가게 된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 이 길을 따라 전염되었으며, 이 길을 통해 헬레니즘(Hellenism) 문화가 통일 신라에도 전파되었고, 불교와 기독교 역시 이 길을 통해 동과 서로 퍼져나갔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파되면서 서로 혼합되고 받아들이면서 영향을 끼쳤다. 동방 기독교는 영지주의(gnosis)와 결합하면서, 서방 기독교와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중국의 불교는 도교(道敎)의 영향으로 선(禪)사상을 결합시키는 등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7세기 초의 문헌들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자기네의 생각을 불교와 조화시키려 노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저 불교와 상충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대체로 말해서 기독교가 바로 불교라고 중국에 갔던 한 선교사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 사상과 불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융합하려 노력했다.(p110) <실크로드 세계사> 中
그리고, 이러한 문명의 교류와 발전의 중심지는 바로 중앙아시아였다. 동과 서의 교류 중심지로서 중앙아시아는 세계의 교역품과 금(金)과 은(銀)이 모이는 풍요로운 곳이었고, 티그리스- 유프라테스(Tigris- Euphrates)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오랜 기간 인류에게 에덴(Eden)동산이었다. 그렇지만, 15세기에 들어 실락원(Lost Paradise)의 시대가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개척되던 초기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중앙아시아로 흘러가면서 중앙아시아는 크게 부흥하게 되지만, 분위기가 바뀌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풍요와 왕권의 중심지, 후원과 위신의 완벽한 상징이었다. (p165)... 많은 자료들은 대규모 교역품이 페르시아만을 드나들고 중앙아시아에 이리저리 뻗어 있던 육로를 따라 이동했음을 입증한다... 9세기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7 만점의 도자기를 실은 배가 난파한 사실은 당시 엄청난 교역 물량을 보여준다. 이 시대는 황금기였다.(p168) <실크로드 세계사> 中
당시 황금시대가 시작된 것은 유럽뿐만이 아니었다. 발칸 반도에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오스만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자금은 계속 늘고 있는 조세 수입으로 충당했다.(p384)... 그러나 서아시아가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에서 흘러들어오는 금, 은과 기타 보물들의 홍수로 돈을 벌고는 있었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수출품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바로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였다.(p386)... 유럽과 인도의 영화는 아메리카 대륙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p392) <실크로드 세계사> 中
[사진]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벌(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ajamarca)
15세기 유럽이 중심이 된 것은 과학, 종교, 자본주의의 결합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다. 풍요로운 부(富)를 과시하는 중앙아시아에 비해 가진 것이 없던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통해 폭력을 행사할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동양에 대한 인식의 변환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부정적인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형성되는 것도 이즈음부터다.
유럽이 1490년대의 대탐험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그들이 폭력 및 군국주의와 굳건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p423)... 싸움과 폭력과 살육도 정당성이 있는 한 미화되었다. 이것이 아마도 종교가 그렇게 중요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p424)... 유럽 각국 정부는 군비에 충당할 자금이 부족하자 대출 시장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미래의 세금 수입을 담보로 돈을 뜰어올 수 있었다... 정부 부채에 대한 그들의 투자는 애국심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국가 재정에 투자하는 것은 출세하는 길이었고, 또한 부자가 되는 방법이었다.(p428) <실크로드 세계사> 中
표면 아래서 강력한 흐름이 눈에 띄지 않은 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뻣뻤해지고 있었다. 동방을 이국적인 초목과 보물로 가득한 놀라운 나라로 보던 태도를 바꾸어, 현지 주민들을 아메리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p451)... 아시아에 대한 태도는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인한 흥분에서 노골적인 수탈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p451) <실크로드 세계사> 中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시작된 식민지화는 19세기 들어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에 빠지면서 제국주의(帝國主義) 시대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중앙아시아 역시 교역의 감소와 더불어 쇠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이는 비극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인도의 대부분이 영국의 손에 넘어가자 육상 교역로가 생명력을 잃었다. 구매력과 소비력, 자산과 관심이 결정적으로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군사기술과 전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병대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 또한 수천 년 동안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해주던 길을 따라 운송되던 물량의 감소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는 그 이전의 남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p457) <실크로드 세계사> 中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한 러시아의 대립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1813 ~ 1907)으로 치닫게 된다. 이제는 전쟁터로 바뀐 중앙아시아는 러시아, 영국, 오스만 투르크의 격전장이 되버렸다. 아직 석유를 주동력으로 사용하기 이전,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기에는 세계적인 밀의 생산지 우크라이나가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였다.
[사진] 우크라이나 밀(출처 : https://www.agweb.com/article/higher_wheat_prices_more_complex_than_ukraine_turmoil_naa_ben_potter/)
문제를 러시아의 영토가 빠른 속도로 확장되면서 자신감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p468)... 크림 반도와 아조프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곳들에서 잠깐 비쳤던 어렴풋한 전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러시아를 통제하고 암묵적으로 인도에서의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법은 크림 반도와 캅카스 전역의 통제권을 오스만에 넘겨주는 것이었다.(p477) <실크로드 세계사> 中
당시 식량부족으로 힘들어 하던 히틀러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을 통해 소련을 침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침공 결과는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Schlacht von Stalingrad)를 통해 독일의 패배로 끝나게 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 바르바로사 작전(출처 : http://www.stalkerzone.org/collapse-barbarossa-stopped-hitlers-death-machine/)
히틀러는 1940년 7월 말 새로운 모험을 발표하면서 그것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위장했다. 이제 볼셰비즘을 제거할 기회라고 그는 요들 장군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문제가 된 것은 원자재와 무엇보다도 식료품이었다... 바케는 독일의 문제에 소련이 해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했다.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스텝 지대는 유목민들의 목장에서 곡창지대로 서서히 변모했다.(p612)... 우크라이나는 열쇠였다. 흑해 북안과 카스피해 너머까지 펼쳐지는 풍요로운 농작물 평원을 손아귀에 넣으면 독일은 천하무적이 된다.(p613) <실크로드 세계사> 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대신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소련과 대립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중앙아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레이건의 아래 말이 잘 표현하고 있다. 미국은 '검은 황금'이라 불리우는 석유의 생산지인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결코 잃어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란-이라크 전쟁(1980 ~ 1988)', '걸프전쟁(1990)', '미국 -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 ~ )', '미국 - 이라크 전쟁(2003 ~ 2011)'등의 사건이 직간접적으로 미국과 연계되어 이어지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시청자들에게 말했다.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소련과 따뜻한 바다 인도양의 입구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소련이 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 그 나라를 점령하고, 가능하다면 이란과 파키스탄까지 점령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란에 매장된 석유는 세계 경제의 장기적인 건전성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p795) <실크로드 세계사> 中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계속된 유럽-미국의 패권은 최근 중국(中國)의 부상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만들어가는 중국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실크로드 세계사>는 마무리 된다.
[그림] 일대일로(출처 :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9D%BC%EB%8C%80%EC%9D%BC%EB%A1%9C)
중국 정부는 물자와 에너지원에 연결되고 도시, 항구, 대양들에 접근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꼼꼼하고도 신중하게 구축하고 있다. 교역의 물량과 속도를 대폭 늘리기 위한 기반시설을 개선하거나 아예 새로 건설하는 데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는 발표가 매달 새로 나온다.(p854)... 시진핑이 2013년에 제시한 일대일로 一帶一路 비전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된다는 것은 중국이 미래를 계획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p862)<실크로드 세계사> 中
<실크로드 세계사> 가 다루는 시대의 범위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그렇지만, 해당 시기의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서술하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다. 동시에, 실크로드의 역사 전체를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세계사의 우리의 시각이 확장됨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살펴보자.
많은 경우 우리는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 개인의 극단적인 분노의 결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처럼 엄청난 일이 개인의 단순한 증오에서만 비롯되었을까? 여기서 당시 히틀러가 단기간에 유럽을 지배하면서 식량과 원자재가 부족했었다는 점을 연계해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자원 부족을 절감한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게 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자원을 소모하는 인구(人口)를 줄이려는 목적으로도 유대인 대학살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와 나치독일의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유태인 학살은 나름의 위기 탈출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태인 학살을 독일 국내 문제, 히틀러 개인의 문제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조금 범위를 넓혀 본다면, 이처럼 새롭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크로드 세계사>는 이렇게 새로운 관점을 여러 곳에서 제시한다.
이처럼, <실크로드 세계사>는 우리에게 문명권들간의 영향력과 배경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서 '국내'요인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을 버리고, 세계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실크로드 세계사>는 좋은 문명교류사 입문서적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