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는 영국의 제프리 초서(Geoffery Chaucer, 1343 ? ~ 1400)의 작품으로 켄터베리를 향한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순례를 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번 페이퍼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켄터베리 이야기>의 프롤로그에 나와 있듯이, 이 작품은 원래 120개의 이야기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토머스 베게트(Thomas Becket, 1118 ~ 1170)의 사당을 향해 가는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여행의 지겨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각자 하나씩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었다. 초서는 이 120개 이야기 중에서 스물한 개를 완성했고 세 개는 미완 혹은 중단된 상태로 남겨 놓았다.(p121) <평생 독서 계획> 中


 서로 다른 신분을 가진 이들은 성지(聖地)를 향한 공통된 목적을 지닌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었다. '하나된 신앙' 이 강조된 중세의 질서 안에서 이들은 집단으로 움직여야 했으며, 이는 종교행사인 순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봉건 사회는 아주 촘촘한 알갱이들로 형성된 구조였다. 이 사회는 너무 빽빽한 덩어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개인들은 당시의 '프라이버시'라 할 수 있는 행위로, 비좁은 공간의 과도한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주위에 자신만의 울타리를 두르며 꼭 닫힌 정원에 자기를 가두려고 했다... 누군가가 외따로 떨어져 있다면 설령 나쁜 짓을 하려고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나쁜 짓을 저지를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다.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적의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광기의 여러 증상 가운데 하나였다.(p717) <사생활의 역사 2> 中


 낯선 곳으로의 떠남을 의미하는 순례는 중세인들에게는 일종의 '세례(洗禮)'와 같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순례는 일상을 떠나 자신을 새롭게 성찰하는 의미와 함께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의미를 지녔기에, 중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이성은 그들에게 낯선 곳, 다시 말해 고립을 벗어나 질서 속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문명으로의 복귀는 그들에게는 사생활로, 궁정으로, 다시 말해 집단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거기로 돌아가지만 고난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정화되고 쇄신된다. 사실 자의든 타의든 위험과 고립 같은 힘든 시련은 강한 자들과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지고의 선을 행해 나아갈 기회였던 것처럼 보인다.(p718) <사생활의 역사 2> 中


 공통의 목적을 가졌지만, 서로 다른 신분을 가진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작품 안에서 어느 누군가가 육욕(肉慾)의 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다른 누군가는 다른 이야기 속에서 교회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성(聖)과 속(俗).<켄터베리 이야기>의 세계관을 요약한다면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 음란한 색욕(色慾)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십시오. 그것은 정신을 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음탕한 욕망은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음란한 행위는 차치하고, 그런 죄를 범하겠다는 의도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만신창이가 됩니까! (p162) <켄터베리 이야기> - 변호사의 이야기 - 中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야곱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위대한 성인(聖人)이에요. 그런데 많은 다른 성인들처럼 두 성인도 두 명 이상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어요... 동정이나 처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만이 지키는 것이에요... 내 남편이 죽으면, 내가 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두 남자와 함께 산다고 해도 역시 죄가 아니랍니다. (p173) <켄터베리 이야기> - 배스의 여인의 이야기 - 中 


 <켄터베리 이야기>는 당대 지배층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중세의 가을 Herfsttij der Middeleeuwen> 속에서 중세의 두 기둥이라고 표현한 기사(귀족), 학자들 역시 풍자의 대상이 된다.

 

 중세 기사도 이상의 표본적 인물로 칭송되는 부시코 Boucicaut의 전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의지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것이 주어졌다. 그것은 신성한 법과 인간의 법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세상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두 기둥은 기사단과 학자들이다.(p139) <중세의 가을> 中


 귀족이란 말은 자비를 베푼 선조들의 명성일 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 귀족적인 성품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우리의 진정한 귀족적 성품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오는 것이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사회적 지위가 주는 것이 아니에요. (p203) <켄터베리 이야기> - 배스의 여인의 이야기 - 中 


 연금술을 배우면 이런 눈물만 흘리게 됩니다... 우리가 쓰는 용어는 아주 이상한 전문적인 말들입니다. 그래서 난해한 학문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작업장에 들어가면, 우리는 아주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재주를 부려보았지만 한 번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p518) <켄터베리 이야기>  - 성당 참사회원 종자의 이야기 - 中


 성직자 역시 <켄터베리 이야기> 속에서 풍자 대상으로 등장한다. 다만, 하위징아는 거대한 교회였던 중세 유럽에서 성직자들은 일반 대중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에 대한 조롱은 일종의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같은 지배계급이었지만, 친근감을 가졌다는 면에서 중세 성직자는 기사, 학자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던 듯하다. (이 부분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삼부회( Etas Generaux)를 구성했던 제1신분, 2신분이었던 성직자, 귀족들에 대한 평민들의 시각과 함께 살펴보면 좋을 듯하니, 잠시 접어두고 간다.)


 제 목숨을 걸고 말하는데, 아마 여러분들은 방귀 소리와 악취가 동일한 속도로 열두 개의 바퀴살로 골고루 퍼져나가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계신 고해 수사님은 매우 고귀한 분이시므로 이 지위에 걸맞게 방귀 소리와 냄새를 가장 먼저 맛보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만 해도 교단에서 훌륭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방귀 냄새를 처음으로 맡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p236) <켄터베리 이야기> - 소환리의 이야기 - 中 


 그 시대의 일상적인 종교 생활은 불쑥 정반대의 입장으로 전환되는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어떤 때는 사제와 수사에게 조롱과 증오심을 쏟아 부었으나, 그것은 동전의 표리(表裏)처럼 마음속 깊이 품은 애정과 존경심의 뒷면일 뿐이었다. (p338) <중세의 가을> 中


 그렇지만, 목적지인 켄터베리에 다가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띄게 되고, 결국 죄의 용서와 참회, 구원 등 교회 교리를 주제로 한 본당신부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켄터베리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가난한 마음으로 살면 이처럼 복된 나라를 얻을 수 있으며, 겸손하게 살면 하느님의 영광을 얻을 것이고, 굶주리고 목마르게 산 사람은 천국의 완전한 기쁨을 누릴 것이며, 열심히 일한 사람은 평안을 얻을 것이고, 죄를 뉘우치고 죽은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켄터베리 이야기> - 본당신부의 이야기 - 中 


 여러 세속적인 삶의 이야기와 지배 계급에 대한 비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결국 종교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켄터베리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순절 직전의 사육제를 떠올리게 된다. 성스러운 성지 순례 이전 여행의 어려움을 이야기를 통해 풀어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사순 기간 금육(禁肉), 금식(禁食)의 고통을 덜기 위해 행하는 사육제(카니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림] 사육제과 사순절의 싸움( 출처 : http://www.pictorem.com/24201/Fight%20Between%20Carnival%20and%20Lent.html)


 카니발 Carnival  :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사순절 직전 3~7일에 걸쳐 행하는 제전(祭典). 사육제(謝肉祭)라고 번역하는데, 라틴어의 카르네 발레(carne vale :  고기여 그만) 또는 카르넴 레바레(carnem levare : 고기를 먹지 않는다)가 어원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로마 사람을 회유하기 위하여 그들의 농신제(農神祭)를 인정한 것으로, 이교적(異敎的)인 제전이었다. 이것이 계승되어 매년 부활절 40일 전에 시작하는 사순절 이전 즐겁게 노는 행사가 되었다. (출처 : 두산동아백과사전)


 <켄터베리 이야기>는 이처럼 14세기 중세 영국 사회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비록 중세 음악은 다소 낯설게 들리지만, 중세인들의 보편적인 감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켄터베리 이야기>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클리프턴 패디먼(Clifton Fadiman, 1904 ~ 1999)의 <평생독서계획 The New Lifetime Reading Plan>에서 소개한 감상포인트를 마지막으로 <켄터베리 이야기>에 대한 페이퍼를 마친다. 



 맨 앞에 나오는 프롤로그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영문학 사상 가장 훌륭한 초상화의 갤러리이다. 이 작품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는 것은, 기사, 방앗간 주인, 수녀원장, 수녀시승, 면죄승, 바스의 여장부, 서기, 상인, 수습기사, 수도참사 회원의 종자의 이야기 등이다. 또한 여러 편의 프롤로그, 에필로그, 각 이야기들을 연결하는 대화들을 읽을 것을 권한다.(p121) <평생 독서 계획> 中

 

 이야기의 동시대성은 각자의 언어적 개성을 드러내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여행'이라는 서술 맥락으로 수용한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잘 들어났다... <켄터베리 이야기>는 산문 형식의 두 글인 멜리베오의 이야기와 파로코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모두 2행 시절로 되어 있다... <켄터베리 이야기>의 문학적 꾸밈은 이야기꾼의 두 가지 기능으로 지탱된다. 초서는 저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소개하나 마지막에는 교육적-그리스도교적으로 충분한 목적성을 보여 주지 못하는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를 전부 부정했다... 초서는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보카치오처럼 폭넓은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다양함과 활력, 복합적 특징을 부여했다.여기에는 매우 이질적인 주제와 양식, 구조가 공존했다.(p771) < 중세3 : 성, 상인, 시인의 시대> 中


나가기 전에 <켄터베리 이야기>를 선물해 주신 이웃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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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6-16 1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주 모순적인 사육제와 사순제가 붙어 있는 건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지 말입니다(왜 군대식 말투가...). <켄터베리 이야기>가 고상한 척하는 지배층의 아주 세속적인 적나라함을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여기 우리는 모두 방귀 안 뀌는 듯이 좋은 말, 문장을 구사하는 것에 기를 쓰고 있지만 인간은 아무리 미인도! 누구나 하루에 7번 이상은 방귀를 뀐다는 과학적 보고가...(곰곰이 내 하루를 뒤돌아보며)....인간의 뗄 수 없는 양면성을 말한다는 게 갑자기 방귀에 꽂혀서.... 댓글에서 방귀 냄새 풀풀))) 죄송합니다...(이 댓글은 망했....);;

겨울호랑이 2018-06-16 19:37   좋아요 2 | URL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안 그런 척‘ 하면서 살아가는게 우리 모습이 아닌가 싶네요. 반대로 ‘그런 척‘하면서 살기도 하구요... 적당히 알면서 속고 속이면서 살아가는게 우리 삶인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절대선‘과 ‘절대악‘을 규정한 형이상학적 가치는 사람을 질식시키네요... 방귀처럼 말입니다 ㅋㅋ

2018-06-16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6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6-16 2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의 독서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인지... 부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8-06-16 23: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는 북다이제스터님의 깊이 있는 독서가 더 부럽습니다.^^:)

2018-06-17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7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7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8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6-18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내용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어 살짝 다녀가려 했는데,
프로필 사진이 바뀌셨군요.
연의 어린이 완전 멋진걸요.
보는것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여러모로 보시하고 게십니다~^^

겨울호랑이 2018-06-18 12:22   좋아요 0 | URL
중세와 관련된 내용을 얼기설기 엮은 페이퍼라 좀 길었습니다. 연의를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철나무꾼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